2024/03 386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시68:19)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시68:19) 인생의 절대 절망과 실존 앞에 서 있는 시인. 세상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합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시인.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고 광야 길에 동행하시며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영원합니다. 그 사랑과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며, 믿음의 고백과 삶으로 증거하게 하소서! 아멘!

대제사장 관저에서(22)(막14:65)

'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막14:65) 산헤드린 법정에 의해서 사형 선고가 내려진 후에 예수님에게 대한 모욕과 린치가 가해집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물론 산헤드린 의원이었겠지요. 그들은 두 가지 모욕을 가했습니다. 첫째, 침을 뱉었습니다. 침을 뱉는 것은 극심한 경멸을 뜻합니다.(민 12:14, 신 25:9, 욥 30:10 참조) 빌라도에 의해서 사형 선고를 받은 뒤에도 군인들이 예수님에게 뱉었다고 합니다.(막 15:19) 둘째,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선지자 노릇을 하라.”고 외쳤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선지자이면 누가 주먹으로 쳤는지 알아맞힐 수 있지 않느냐, 하는 조롱입니다. 더 정..

대제사장 관저에서(21)(막14:64)

'그 신성 모독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막14:64) 예수님이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었다는 어제 묵상의 진술이 불편하게 느껴지신 분들이 계신가요? 초월의 한 특성은 전지전능입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의 능력으로 공생애를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인간들에게서 보이는 모든 인식론적 한계를 그대로 안고 사셨습니다. 그걸 부정하는 것은 신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반(反)기독교적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어느 한 순간도 예수님의 참 인간성(vere Homo)을 부정한 적이 없으니까요.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초월적이지 않은 존재를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것이 가능한가요? 그리고 정당한가요? 거기에 어떤 근거가 있을까..

대제사장 관저에서(20)(막14:64)

'그 신성 모독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막14:64)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한 유대의 최고 법정이 예수님을 신성모독자로 단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어제의 묵상에 이어 오늘 조금 더 보충하겠습니다.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기독교가 유대교와 구별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가 놓여 있습니다. 즉 신의 본질에 대한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본질은 초월성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또는 하나님을 향한 그 어떤 형상도 만들 수 없습니다. 형상을 만들면 이미 초월성이 상대화하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은 바로 창조자이십니다. 그의 창조 행위는 자연에 있는 것을 가공하는 것이 아니라 무(無)로부터의 창조입니다. 초월자 하나..

성전에 대한 심판 (막13:14-23) / 김영봉목사

해설: 이어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의 심판에 대해 예언 하십니다(14절). 앞에서 그분은, 예루살렘 성전이 심판 받아 파괴되는 날은 곧 오겠지만 그것이 마지막 날의 징조는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니엘 9장 27과 11장 31절 그리고 12장 11절에 예언된 “황폐하게 하는 가증한 물건이 서지 못할 곳에 서는”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공격 당하여 부정한 것들이 성전을 황폐하게 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주후 64년부터 시작된 로마의 예루살렘 공격은 70년에 성을 점령하고 성전을 파괴하기에 이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상상하기에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사건을 예수님이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 때가 오면 도피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15-16절). 하나..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막 10:1-12)

이혼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 시대에 크게 인기가 없습니다. 이혼이 자유롭고 때로는 당당하다고 말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혼 문제 특별히 남자가 아내를 버리는 문제에 대하여 분명한 답을 하십니다. 우선 모세의 기록을 통하여 말씀합니다. 신명24:1절의 관점에서는 모세의 이혼증서가 나옵니다. 그러나 모세가 이렇게 기록한 것은 사람들의 완악함때문입니다. 악한 마음으로 인하여 여자가 당해야 할 고통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기록한 본래의 원칙은 둘이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결혼을 통하여 한 몸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짝 지워 준 것은 나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서로 배우자를 버리고 다른 이에게로 장가 들거나 시집가는 것은 간음죄를 짓는 일입니..

사람들로 부터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사람들로 부터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글쓴이/ 봉민근 살다 보면 억울한 일도 많다. 심한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라고 한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모함을 당하고 악의적인 일에 휩싸이기도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말이 남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 모른다. 자기가 한 말이 비수가 되어 남의 가슴에 상처를 남기지만 가해자는 자신의 행위를 모른다. 아니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당당하기까지 하다. 자신이 뭐라도 된 것처럼 권세를 부리며 머리 위에 앉아 군림하려 한다. 주님도 그런 일을 수도 없이 당하셨는데 주님은 어떻게 이를 극복하셨을까? 화병도 날만한데 주님은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가슴앓이 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믿음으로 모든 것을 참으며 이해하고 못 들은 체하며 그냥 넘기는 것..

믿음과 겸손한 순종으로 갈 수 있는 하나님 나라.(막 10:13-22)

막 10:13-22 묵상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겸손하고 온유한 자에게 은혜로 주어집니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어린아이를 꾸짖는 제자들. 예수님께서 어리석은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것입니다. 영생을 바라고 예수님께 나아오는 부자 청년. 재물이 많아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합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합니다. 믿음과 겸손한 순종으로 갈 수 있는 하나님 나라.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게 하소서! 제자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게 하소서!

도봉산은 늘 그 자리에 있습니다.

도봉산은 늘 그 자리에 있습니다. 계절이 바뀌더라도 다른 모습이지만 늘 든든히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아침마다 나를 맞이해 주는 도봉산이 있어 행복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선물입니다. 그러나 도봉산 앞에 선 나는 늘 흔들리고 다른 모습입니다. 계절 따라 마음은 달라지고 날씨 따라 생각조차 흔들립니다. 새날을 맞을 때마다 습관적으로 도봉산을 바라보는 그 시간이 참 좋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다가 심호흡을 하면서 바라보고 일에 뭍혀 있다가 허리를 펴면서도 자연스럽게 눈길이 갑니다. 그 순간마다 참 좋습니다. 내가 살아있음이 신비롭고 나를 지으시고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 하나님의 손길을 맛보며 감격하기도 합니다. 얼마나 힘드신지요? 그 마음을 어찌 헤아리며 그 누가 그 마음에 어떤 위로의 말을 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