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3 13

담보의 규정(신24:10-13)

담보의 규정(신24:10-13) 본문은 이웃에게 돈을 꾸어주기 위하여 담보물을 잡으려 할 때 지켜야 할 규례다. 즉 담보를 잡힐 때 어떤 물건을 담보할 것인지 채권자가 직접 간섭하지 말로 전적으로 채무자의 뜻에 맡겨야 했으며(10-11절), 만약 그가 가난한 자이거든 생활필수품이나 겉옷 등은 해가 지기 전에 되돌려 주도록(12-13절) 규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규례는 연약한 자의 생존권을 보호하는데 근본 목적이 있다. 또한 이웃 사랑은 이렇게 작은 배려에서부터 시작된다.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시10:13-14)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시편10:13-14)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도 이런 처지에 놓이고, 이로 인해 마음이 아플 때가 많습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고, 그리스도인이 위기에 처하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악인들이, 비웃으며 조롱하는 자들이 이렇게 속으로 생각하고, 또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지금 뭐하고 계시냐? "너희의 하나님은 지금 주무시고 계시냐?" "네가 믿는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감찰하시고, 다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라면서 왜 침묵하고 계시냐?" 이런 말을 ..

빌라도의 재판(1)(막15:1)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막15:1) 마가복음 기자는 이미 앞에서 예수님을 심문한 당국자가 대제사장들을 중심으로 한 산헤드린 공의회라는 사실을 지적했는데,(막 14:53,55) 새로운 단락을 시작하면서 그 사실을 다시 확인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산헤드린 공의회의 책임이 결정적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생각이었겠지요. 산헤드린은 예수의 심문을 ‘새벽’에 끝냈습니다. 끝장토론처럼 밤새도록 의견을 나누었다는 뜻일까요? 여기에 연루된 사태가 좀 복잡해 보입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앞 단락에서 두 가지 사건을 보도했습니다. 하나는 산헤드린의 심문이고, 다른 하나는 베드로의 부인입니다. 이 두 사건은 동시에 일..

베드로의 울음(10)(막14: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제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막14:72) 닭이 두 번째 우는 소리를 듣고 베드로도 울었다고 합니다. 닭도 울고 베드로도 울었습니다. 닭의 울음이 물리적인 새벽을 알리는 신호였다고 한다면 베드로의 울음은 양심적인 새벽을 알리는 신호였겠지요. 양쪽 모두 어둠과 비양심의 세계를 떠나서 밝음과 양심의 세계로 나가는 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베드로의 울음이 어느 정도의 진정성이 있었는지 확신은 없습니다. 그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운 것인가요? 그 참회의 내용은 무엇인가요? 스승에 대한 최소한의 의리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일까요? 위기에 순간에 스승을..

베드로의 울음(9)(막14: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제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막14:72)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자 곧 닭이 두 번째 울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이미 앞에서 예고하신 것입니다.(막 14:30)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한 무게를 지녔습니다. 구약 말씀이 복음서에서 그대로 성취되듯이 예수님의 말씀도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독일의 교회당 첨탑에는 닭 모형이 달려 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늘 십자가만 보던 우리에게는 재미있는 광경입니다. 닭이 새벽을 깨우는 동물이듯이 교회가 새벽을 깨운다는 의미일까요? 아니면 닭이 베드로의 배교 행위를 각성시켰다는 의미일까요? ..

심리학2. / 류현모교수

기독교 심리학은 창세기 3장의 선악과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의지로 불순종을 선택한 인간의 마음에 실존하는 객관적인 죄를 인정한다. 또한 그로인한 하나님과의 관계, 다른 인간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가 뒤틀리는 인간의 원죄를 인정한다. 우리는 자신의 내부정보를 통해 하나님과 그분이 정한 도덕률에 반발하려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폴 비츠는 원죄 교리와 인간 자유의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의 가장 큰 장점은 죄에 대하여 우리 자신에게 책임을 묻고, 우리의 상태에 의미를 부여하고, 변화의 방향성에 대한 책임을 우리 자신에게 도입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세속적 심리학은 세속적 신학, 철학, 과학의 가설들에 영향을 받고 있다. 무신론자들은 초자연을 부인하기..

팀워크로 함께 일합시다!(창 1:26; 롬 12:4-5)

팀워크로 함께 일합시다! (창 1:26; 롬 12:4-5) 창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롬 12: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롬 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일터 현장에서는 혼자 할 수 있는 일보다 팀워크를 필요로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팀워크는 무엇입니까? 천재가 혼자서 여러 사람이 할 일을 다 해낸다거나 여럿이 모여 일하기만 한다고 팀워크는 아닙니다. 팀워크가 어떤 것인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서 단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

'깨어 있으라'(막13:32-37)

해설: 마지막 날을 예측하고 예언한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에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 점에 대해 예수님은 단호히 못을 박으십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32절). “그 날과 그 때”는 알 수 없지만 “그 달과 그 해”는 알 수 있다고 해석하는 것은 기본적인 어법을 무시한 처사입니다. 이것이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수법입니다. “아들도 모르고”라는 말씀은 놀랍습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나의 말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31절)라는 말씀으로 당신의 초월성과 선재성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런 분에게도 재림의 날이 알려져 있지 않다면,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 날을 알 수 없습니다. “오직..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막 10:46-52)

맹인이고 거지라 불리는 바디매오와 예수님의 만남입니다. 육체적인 연약함이 사회적 약자로 살아가게 하였습니다. 바디메오는 여리고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부르짖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여기소서라고 소치를 칩니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조용히 하라고 하였습니다. 평상시 같으면 조용히 하였을 것입니다.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들어간 바디매오 그럴 수록 더 크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생명이고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그 소리가 예수님께 들렸습니다. 예수님은 바디메오를 불렀고 원하는 것을 묻습니다. 즉 소리 지른 이유를 묻습니다. 보기를 원한다는 말에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고 말씀합니다. 바디메오가 즉시로 보게되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바디매..

어찌할꼬 이제 남은 것은 심판뿐이다.

어찌할꼬 이제 남은 것은 심판뿐이다. 글쓴이/봉민근 우리는 왜 하나님을 잘 믿지 못하는 것일까? 문제는 말로만 믿는 데 있다. 말로는 천국을 쥐락펴락한다. 정말 고질병처럼 고치지 못하는 부분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자신의 주장을 펴지 않는다. 말로는 늘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고 한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온갖 믿음 있는 척 자신을 포장하는데 달인이 되어 간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면서 전혀 은혜받은 자답게 살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오히려 자신의 주장과 감정이 앞선다. 잘못된 삶을 알면서도 과감히 고치려는 노력보다는 현재의 편안함을 추구한다. 자신의 십자가를 전혀 지려고 하지 않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 자기 자신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가 공동체 속에서도 뚜렷이 나타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