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2 13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게 사람 마음이라지만, 세상을 살면서 지켜야 할 여섯 가지 마음이 있습니다. 첫 번째 마음은 믿음을 갖고 믿음으로 사람을 상대하는 신심(信心)입니다. 두 번째 마음은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여유로운 큰마음인 대심(大心)입니다. 세 번째 마음은 같은 마음을 갖고 같은 생각을 갖는 동무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동심(同心)입니다. 네 번째 마음은 작은 소리와 가르침에도 귀 기울이고 자기 잘못을 되돌아보며 회초리로 자신을 때릴 줄 아는 겸손한 마음인 겸심(謙心)입니다. 다섯 번째 마음은 티끌보다 칭찬을 먼저 발견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아 작은 이를 큰 사람으로 만드는 칭심(稱心)입니다. 여섯 번째 마음은 함께 행동하는 마음을 갖고 함께 생활하고 실천하는 사람..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딤후2:22)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디모데후서2:22) 바울이 말하는 청년의 정욕에는 왜곡되고, 빗나간 성욕은 물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지나친 명예욕, 헛된 야심, 자기 만족을 채우려는 잘못된 욕망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정욕"은 청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이에 상관없이 일어납니다. 믿음이나, 거룩함은 자라지 않는데 정욕은 켜져만 갈 수도 있고, 몸은 늙어가도 정욕은 더욱 크게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일어나는 정욕은 피하고, 오직 성령에 잡힌 바 되어야 제어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몸이 주인 없는 마음과 몸이라면 정욕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의 지배..

최소한의 사회적 통제의 필요성(신24:5-9,16)

최소한의 사회적 통제의 필요성(신24:5-9,16) 우리 사회는 각각 특이한 개성을 가진 개인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사회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 구성원을 통제하고 결집할 수 있는 규범이 필요하다. 특히 이스라엘과 같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선택된 백성들은 더욱 그러한 규범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최소한이 규범이 본문에 언급되어 있다. 그 규범이란 크게 권익 보호(5-6절), 형사 처벌(7절,16절), 공중위생 조항(8-9절) 등이다. 특히 약자 보호를 위해 맷돌의 전부나 위짝만이라도 담보해서는 안 되었으며, 유괴범은 반드시 극형에 처해야 했다. 이는 어느 시대나 필요한 최소한의 사회적 통제다.

심리학1. 정신과 육체(Mind-body problem) /류현모교수

인간은 물질적 차원과 초자연적 차원으로 구성된 다차원적 존재이다. 물리-화학-생물학적 차원이 물질적 차원이라면, 심리-윤리-종교적 차원은 정신적 또는 영적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무신론자들은 정신적, 영적 차원의 초자연적 부분을 무시함으로 인해 인간존재의 상당한 부분에 대한 이해를 포기해 버린다. 심리학은 그리스어 어원인 ‘Psyche(영혼)+ology(학문)’가 뜻하는 것처럼 영혼을 탐구하는 학문으로 19세기 후반 등장한 인간의 행동과 심리과정을 연구하는 경험과학의 한 분야를 뜻한다. 기독교는 다른 어떤 세계관보다 영적인 측면과 심리학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본주의, 공산주의, 포스트모던의 이론들을 포함하는 현대 심리학을 검토해 보면 세속 심리학과 기독교 사이에 심각한 충돌이 있음..

하나님의 뜻과 내 뜻

하나님의 뜻과 내 뜻 글쓴이/봉민근 사람은 고난 앞에 약하다. 고난을 벗어나고 싶어 한다. 예수님 앞에 소경의 소원은 눈을 뜨는 것이었다. 그들의 외침은 “보기를 원하나이다”였다.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한다. 자신의 소원을 들어 달라는 기도다. 그렇다면 요셉의 소원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노예에서 해방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었을까? 그런 기도를 수도 없이 했을 것이다. 그는 기도하면 할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노예도 모자라 감옥에 갇히는 절망의 자리로 옮겨졌다. 하나님은 왜 그의 기도를 듣어주지 않으셨을까? 이유는 확실하다. 하나님의 계획이 계셨다. 기도한다고 모든 것을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해야 들어주신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잊으면 기..

베드로의 울음(8)(막14:71)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막14:71) 가룟 유다와 베드로를 비교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둘 다 예수님을 배반한 인물입니다. 일반적으로 가룟 유다의 배신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으로, 베드로의 배신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가룟 유다는 자기의 잘못을 인식했지만 회개하지 않고 자살한 반면에 베드로는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배신과 회개는 복음서가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반해서 가룟 유다에 관한 것은 서로 경우마다 틀립니다. 가룟 유다가 배신자로 악명이 높지만 초기 기독교는 그에 관해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마태복음과 사도행전만 유다의 자살을 보도합니다. 사도신경은 빌라도에게 책임을 묻지 유다에..

베드로의 울음(7)(막14:71)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막14:71)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참 점잖은 표현이군요. 수사학에 능한 당대의 웅변가가 상대를 설득하는 한 과정처럼 보입니다. 어부 베드로가 언제부터 이런 세련된 말을 구사했을까요? 마가복음 기자의 각색일까요? 이 자리에서 그런 편집과정을 따질 계제가 아니니 덮어둡시다. 어쨌든지 우리는 지금 본래의 투박하고 직선적인 성격과 말투를 숨기고 변호사와 같은 말투로 자기를 방어하는 베드로를 보고 있습니다. 사람은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한다고 하는데, 베드로의 경우가 바로 그런 순간일까요? 그 순간에 베드로의 표정을 어땠을까요? 어..

베드로의 울음(6)(막14:71)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막14:71) 세 번이나 거듭해서 “당신은 예수와 한 통속이야.” 하는 말을 들은 베드로는 급기야 저주하며 맹세했다고 합니다. 이럴 수가 있을까요? 너무 심하지 않나요? 앞에서 두 번 부인한 수준으로 이번에도 부인하고 넘어갈 일이지 어쩌자고 저주 맹세를 한단 말인가요? 유대인들은 자기 자신이나, 자기의 출생, 또는 운명을 저주할 수 있었습니다. “저주하다”는 뜻의 헬라어 ‘아나테마티제인’은 성서에서 늘 저주받아 파멸될 사람이나 도시에 저주를 내릴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의 저주 선언은 그 대상이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 이 저주는 예수를 대상으로 합니다. 실제로..

일터에서 몰입 활용하기(열왕기상 18:41-43)

일터에서 몰입 활용하기 (열왕기상 18:41-43) 41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 소리가 있나이다 42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43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 쪽을 바라보라 그가 올라가 바라보고 말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이르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엘리야 선지자는 갈멜 산에서 이방 신들을 섬기는 850명의 선지자들과 대결하여 승리했습니다. 이후에도 3년간의 가뭄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엘리야는 몰입하여 기도했습니다. 머리를 무릎 사이에 넣는 쉽지 않은 자세로 집중하고 있습니다. 비가 오느냐고 물어 안 온다고 하니 다시 가서 구름을 보라고 합니다. 구름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니 ..

하늘과 땅은 없어져도 (막13:28-31) / 김영봉목사

해설: 재림의 때에 대해 말씀하신 후,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드십니다(28절). 며칠 전, 예수님은 성전을 향해 가는 길에서 무화과나무 하나를 저주하여 죽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성전 종교의 종말에 대한 ‘예언 행동’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선택이 끝날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이것과 연결시키면, “무화과나무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는 것”이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비유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회복되면 예수께서 재림할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948년에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에 건국되었을 때, 재림의 날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그와 유사한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28절의 비유에서 무화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