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554

구원의 방편을 넘어 하나님나라의 참여로 / 정병선목사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성 삼위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시라는데 있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 또한 창조주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행하신 일의 계시이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진실 하나를 암시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인간과 세상의 현실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 구원이 필요할 만큼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 그것도 도덕, 정치, 철학, 교육, 종교를 통해 극복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창조주께서 나서지 않으면 결코 회생될 수 없을 만큼 깊은 수렁에 빠져 있다는 것. 그렇다. 세상의 근원적인 문제는 바로 구원이다. 사람들이 다들 풍부한 소비를 위한 생산 경쟁, 더 많은 부의 축적을 위한 경제 전쟁에 몰두하고 있지만 사실상 모든 시대의 중심 문제는 언제나 구원이었다. 아담 이래로 지금까지 온 세상은..

발람의 가르침을 따른 교회(계2:12-17) / 정병선 목사

버가모교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오늘 한국교회에 반면교사가 되는 교회입니다. 버가모는 매우 이교적인 도시였습니다.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는 성채 위에 가로가 약 37미터, 세로가 약 34미터나 되는 거대한 제우스 신전이 세워져 있을 만큼 여러 신을 숭배하는 도시였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사탄의 위’가 있는 곳이라고 했는데, 제우스 신전이 바로 ‘사탄의 위’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암튼 이 도시는 경제적으로 번창하는 도시이면서 황제 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아시아에서 최초로 로마 황제에게 바치는 성전을 건축한 황제 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당연히 모든 시민은 황제 숭배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여러 신전의 제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지목을 받을 만큼 도시 전체가 이교적이고 황제..

개인의 장벽을 넘어 상생의 관계로 / 정병선 목사

한 사람은 곧 우주다.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서 양심을 따라 선택할 자유와 책임을 지닌 주체다.때문에 사람의 자유와 권리는 존중받아 마땅하다.어떤 이념, 어떤 신앙, 어떤 관습도 한 사람의 고유한 자유와 권한을 제한하거나 억압하거나 강제해서는 안 된다. 물론 사회적 약속이나 국가의 법률을 해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정한 규칙에 따라 처벌할 수 있지만, 공적인 처벌을 할 때에라도 개인의 고유한 인권은 존중되어야 한다.인권을 무시하는 공권력의 남용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중받아야 하며,어떤 경우에도 수단이나 방편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반대의 진실도 외면해서는 안 된다.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제한적이어야 한다.고삐 풀린 자유와 권리(나의 자유와 권리만을 외치는 것)는..

2년 전 그날, 그리고 오늘 / 정병선 목사

2년 전 오늘, 그러니까 2009년 5월 12일은 아들과 나에게 매우 특별한 날이다. 그 날 아들은 죽어가는 애비를 살리겠다며 건강한 간의 일부를 떼어내기 위해, 나는 굳어진 간을 떼어내고 아들의 간 일부를 이식받기 위해 아침 일찍이 2시간의 시간차를 두고 차례로 수술대에 올랐다. 그리고 아들은 8시간, 나는 11시간을 수술대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날 수술실은 분명히 태양 같이 밝은 조명이 밝혀있었을 것이다. 여러 의사와 간호사들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 채 분주했을 것이다. 건강한 생명은 지켜내야 하고,위태롭게 꺼져가는 생명의 촛불은 되살려내야 하는 수술인 만큼 수술팀 전체가 빈틈없이 매달렸을 것이다. 또 수술실 밖에서는 홀로 남은 아내, 그리고 형제들과 여러 지인들이 초조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결..

미지근한 교회(계3:14-22) / 정병선 목사

일곱 교회 중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교회는 라오디게아교회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께 한 마디의 칭찬도 듣지 못한 교회였습니다. 주님이 좋아할만한 구석이라고는 거의 없는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는 한 마디로 말해서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교회였습니다. 주님은 말씀했습니다. “나는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한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겠다.”(v.16).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미지근한 너를 보면 속에서 구역질이 난다는 것입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혐오스럽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확인하고 넘어갈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로 라오디게아교회를 말하면서 ‘미지근하다’, ‘차갑다’, ‘뜨겁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 표현은 사..

환원주의를 경계하라./ 정병선 목사

앞서 말한 대로 한국교회 안에는 ‘믿음 환원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모든 일의 원인을 하나님 한 분에게만 두는 ‘하나님 환원주의’,기도하면 만사가 해결된다는 ‘기도 환원주의’,중요한 건 오직 내세뿐이라는 ‘내세 환원주의’,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은 오직 영혼 구원이라는 ‘전도 환원주의’ 등여러 형태의 환원주의가 신앙생활 전반에 깊숙히 침투해 있다. 물론 하나님의 주권을 존중하는 것과 ‘하나님 환원주의’,피조물의 태도로 겸손히 기도하는 것과 ‘기도 환원주의’,영혼 구원을 위해 헌신하는 것과 ‘전도 환원주의’,종말론적인 하나님나라를 대망하는 것과 ‘내세 환원주의’는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하지만 종이 한 장의 차이는 실로 엄청나게 크다. 하나님의 주권을 존중하며 의존하는 것은 매우 훌륭한 신앙의 태..

환난 가운데 있는 교회(계2:8-11) / 정병선 목사

바울은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라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스리는 통치자라는 걸 넘어서 예수님과 교회가 운명공동체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교회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운명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관심은 일차적으로 교회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물론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교회 밖 세상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온 세상이 다 그분의 것입니다. 지금도 온 세상을 사랑으로 품고 계십니다. 길가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도 얼굴을 비추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세상이 주님의 몸은 아닙니다. 온 세상 가운데에서도 특별히 당신의 백성 공동체인 교회만이 주님의 몸입니다. 오직 교회하고만 모든 ..

교회의 담을 넘어 일상의 영성으로 / 정병선 목사

나는 교회가 하나님나라의 유일한 전초기지임을 믿고 중시하는 교회주의자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교회 생활에 열심인 성도들을 볼 때면 고맙고 감사한 생각보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들의 순전한 믿음에 도전을 받기보다는 믿음에 생활을 앗기고 있다는 사특한 의구심이 든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믿음과 생활의 역현상 때문이다. 본디 믿음은 삶을 위해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다.소위 ‘믿음생활’을 위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생활’하게 하기 위해 허락된 은총이다.다시 말하면 우리의 구겨진 존재와 삶을 구원에 참여시키기 위해서인 것이다.사실 ‘믿음⌒생활’이란 아주 소박한 것이다.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만도 아니고,교회당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일들 - 예배 · 기도 · 말씀 묵..

성속 이분법을 넘어 영육의 통합으로 / 정병선 목사

교회 안에 통념화되어 있는 이원론은 그 뿌리가 아주 깊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플라톤은 눈에 보이는 현상계(감각적 현실 세계)를 실제가 아닌 가상의 세계로 보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이데아의 세계(초월적 세계)를 가상이 아닌 실제의 세계로 보았다. 즉 현상계는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할뿐 이데아야말로 세계의 진정한 원형이라고 보았다. 하여, 그는 감각적 세계로부터의 해방과 초월적 세계로의 상승을 매우 중시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기독교 신앙은 눈에 보이는 감각적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 세계를 배타적으로 이해하는 플라톤의 이원론을 근본적으로 거부한다. 물론 현상적으로 보면 영적인 세계와 물리적인 세계가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면이 없지 않다. 육체가 영혼..

사랑과 진리 사이의 긴장(계2:1-7, 18-29) / 정병선 목사

요한계시록에는 일곱이라는 숫자가 많이 등장합니다. 일곱 교회, 일곱 사자, 일곱 인, 일곱 뿔, 일곱 눈,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일곱 재앙 등 일곱과 관련된 숫자가 참 많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일곱은 완전수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전체를 아우르는 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곱 교회는 일차적으로 지금의 터어키인 소아시아 지방에 있는 일곱 교회가 해당되지만 이차적으로는 전체 교회를 함의한다고 할 수 있고, 일곱 교회 이야기도 단지 일곱 교회 이야기가 아니라 전체 교회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곱 교회 중 첫 번째로 등장하는 에베소교회는 여러 가지로 장점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에베소교회는 행함이 없는 교회가 아니라 행함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