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518

신앙의 세례를 받은 행복의 가면 / 정병선목사

사람들은 신앙이 행복에의 길이라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하지 않는 사람보다 훨씬 행복하다고 말한다. 과히 틀린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람 바울을 보자. 그는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수 있는 능력을 체득했노라고 말했다. 배부르든지 배고프든지, 풍부하든지 궁핍하든지 요동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 즉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말했다(빌4:11-12). 참 대단하다.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수 있다니! 눈곱만한 손해를 입어도 밤잠을 설치고, 남보다 조금만 부족해도 상대적인 박탈감에 어금니를 깨무는 것이 우리의 성정인데 비천과 풍부를 다 품을 수 있다니! 그의 고백과 삶을 들여다보면 온갖 비바람과 눈보라에도 끄떡하지 않는 큰 산 같다는 느낌이 든다. 바울은..

삶의 지평을 넓히라 / 정병선목사

삶은 삶의 지평만큼 살 수 있습니다. 삶은 매우 정직해서 삶의 지평 이상을 살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해하고 바라보는 삶의 지평만큼이 곧 내 삶이 됩니다. 때문에 삶의 지평을 넓히는데 삶을 투자하는 것은 매우 지혜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삶의 지평을 넓히는데 삶을 투자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적인 삶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스위스 출신의 영화 감독 잉그마르 베리만은 “나이가 든다는 것은 등산하는 것과 같다. 오르면 오를수록 숨이 차지만 시야는 점점 넓어진다.”고 말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살아갈수록 삶의 시야가 점점 넓어지는 삶이야말로 정말 인간적인 삶, 삶다운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삶의 지평이 좁으면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요? 시야가 점점 넓어지는 삶을 살..

죄 많은 여인과 예수님(눅7:36-50) / 정병선목사

행실이 좋지 않은 한 여인이 예수님에게 값진 향유를 부은 이야기는 네 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다른 세 기자들과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누가를 뺀 나머지 기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 짓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죄 용서의 문제로 연결 짓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누가가 이 이야기를 잘못 전한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게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누가가 잘못 전했다기보다는 다른 관점에서, 그러니까 죽음의 맥락에서 해석하지 않고 죄용서의 맥락에서 해석한 것이라고 보면 별로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 안에는 ‘성경에 나오는 하나의 사건, 하나의 이야기 속에는 하나의 뜻만 들어있다’는 생각이 아주..

삶은 읽어가는 길 / 정병선목사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건강한 자존감이 있어야 하고, 건강한 자존감을 위해서는 크든 작든 뭔가를 성취해 본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듬뿍 받는 것도 자존감의 든든한 토대이지만 사랑받음의 경험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뭔가를 성취해 본 경험도 필요합니다. 성취감에는 삶의 에너지를 증폭시키는 놀라운 에너지와 존재에 대한 긍정의 힘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아마 성취를 통해 얻는 에너지보다 더 강한 에너지는 없을 것입니다. 성취를 통해 맛보는 희열보다 더 짜릿한 희열은 없을 것입니다. 정말 성취의 순간은 존재의 영광이 가장 빛나는 최고의 순간입니다. 성취가 부르는 치명적인 위험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진실이 있습니다. 삶의 에너지를 증폭시키고 존재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는 성취감이 매력적인 만큼 유혹적이기도..

고통과 행복 / 정병선목사

사람은 누구나 고통은 최소화하고 즐거움은 최대화하기를 원합니다. 이 땅에서는 비록 그렇게 살 수 없다 해도 저 세상에서만큼은 괴로움과 슬픔이 없는 완전한 삶을 꿈꿉니다. 실제로도 인류는 그동안 과학, 의학, 심리학, 정신분석학, 종교, 기술, 복지 등 다양한 방법들을 총동원해가며 고통 없는 삶을 향해 달려왔습니다. 고통 없는 삶을 인류의 이상처럼 생각하며 고통과 두려움을 몰아내기 위한 지난한 싸움을 싸워왔습니다. 하여, 오늘에 이르러서는 상당한 성공을 일구어냈습니다. 적어도 의학적으로는 신체적인 고통을 몰아내는데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루었습니다. 의학 기술의 발달로 인해 아무리 어렵고 큰 수술이라도 큰 고통 없이 수술하고 있고, 수술 이후에도 통증클리닉 덕분에 심각한 고통에 시달리는 일이 적어졌습니다. 정..

바울이 본 예수의 세계(롬5:1-5) / 정병선목사

우리는 대부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믿음의 세계에 발을 딛고 살고 있습니다. 조상 대대로 우리의 삶을 형성하고 지탱해 준 한민족의 세계에서 빠져 나와 예수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모여서 예배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안에서 어떤 세계를 보셨습니까? 우리의 뿌리였던 한민족의 세계에서, 오늘 대다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보편적인 삶의 세계에서 예수의 세계로 들어와 보니 뭐가 다르던가요? 무엇이 다르고, 얼마나 다르던가요?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바울은 유대의 세계에서 예수의 세계로 전환한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 안에서 뭘 발견했을까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기도대로 이루어지는 꿈같은 세상 / 정병선목사

살다보면 난데없이 엉뚱한 상상이나 질문에 붙잡힐 때가 있다. 오늘 점심을 먹고 난 후에도 그랬다. 점심을 먹고 후식으로 때 이른 수박 맛을 음미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생각지 않은 질문이 찾아왔다. ‘만일 우리 기도가 모두 응답받는다면 어떻게 되지?’ 이 질문이 뇌와 접속하자말자 뇌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저 혼자 바쁘게 작동하더니,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을 받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이 스냅 사진처럼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현실은 놀랍게도 너무 끔찍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냐고 의아해할지 모르겠다.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받는 현실이 왜 끔찍하냐고 묻고 싶을지 모르겠다.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받는 것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간절한 소망이 아니냐고 항변하고 싶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성급함을 누르고 잠..

죽음과 삶의 역설 / 정병선목사

앞에서 죽음 현상에 몰두하는 삶의 어리석음과 모순을 이야기했습니다. 매우 매력적이고 도덕적인 ‘고지론’이나 ‘목적이 이끄는 삶’의 교훈까지도 사실은 삶을 소외시키고 죽음 현상으로 내모는 또 하나의 덫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돌이켜 삶을 통째로 보고 삶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면, 삶의 작은 일부인 성취가 아니라 삶 자체에 충실하게 된다면 삶은 절로 행복의 노래, 감사의 노래가 되어 창조주와 구원의 주님을 찬미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옳습니다. 진리와 자유의 영이신 성령의 검으로 견고한 진이 되어버린 거짓 상식을 폭로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비책이 없습니다. 하지만 죽음 현상에 내몰리지 않을 수 있는 최고의 비밀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있습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서 던..

죽음을 사는 삶의 모순 / 정병선목사

지금도 지울 수 없는 감동으로 남아있는 영화가 있습니다. 마이크로 코스모스. 초원의 작은 생명체들이 벌이는 평생과도 같은 하루를 담은 영상입니다. 멀리서 볼 때는 별일 없어 보이는 땅과 숲과 연못 속에 사실은 우주보다 더 크고 기기묘묘한 곤충들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놀랍도록 정직하고 아름답게 담아낸 걸작입니다. 대충 대여섯 번은 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볼 때마다 몰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창조의 영광과 신비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알을 깨고 나온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고, 번데기에서 신비로울 정도로 아름다운 자태의 나비가 나오는 것을 볼 때는 숨이 멎을 정도였습니다. 모든 존재는 정말 제각각 완전했습니다. ‘영광’ 그 자체였습니다. ‘신비’ 그 자체였습니다. 생명 앞에선 언어가 사..

만백성은 찬양하라?(시편67) / 정병선목사

오늘 시는 매우 짧고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습니다. 1-2절을 보면 은혜, 복, 주님의 뜻, 구원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요, 성경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익숙한 단어들입니다. 교회에서 귀가 따갑도록 들은 단어들입니다. 너무 많이 들어서 새로운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 진부한 말들입니다. 하지만 이 시를 쓴 시인은 지금 상투적으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시인은 매우 진지하게, 단어 하나하나 속에 풍부한 신앙적 진실을 담아서 함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1절과 2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복을 내려달라고, 주님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은혜, 복, 환한 얼굴 빛, 다 같은 맥락입니다. 공동번역 성경은 ‘은혜’를 ‘우리를 어여삐 보아 달라’는 말로 풀어서 번역했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