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558

삶에 대하여 / 정병선 목사

삶은 광활한 미답지이다.쉬지 않고 개발하고 가꾸어도 손길조차 닿지 않은 영역이 있을 만큼 삶은 무한히 거칠고 광활하다.또한 삶은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이다.정성껏 마음 다해 돌보아도 어디서 어떻게 깨어질지 알 수 없을 만큼 삶은 유약하기 그지없다.하지만 삶은 그 이상이다. 삶은 위대한 선물이고 고귀한 은총이다.온 세상이 선물이고 은총인 것처럼 삶 또한 받음에 터 박고 있는 그분의 선물이요 은총이다.진실로 그렇다. 세상에 받지 않은 삶이 어디 있는가? 받음이야말로 삶의 알파요 오메가다.삶은 창조자의 숨결이고, 섬섬옥수 수놓은 신비의 작품이다. 다산 정약용이 산에서 지내면서, 일이 없어 사물의 이치를 가만히 살펴보았다고 한다.그의 눈에 들어온 사물의 이치는 이러했다.“누에가 껍질을 깨고 나오면 뽕잎이 먼저 싹..

영적 소비자를 넘어 왕 같은 제사상으로 / 정병선 목사

예부터 산다는 일에는 뭔가를 사고 파는 행위가 동반했었다. 생활에 필요한 것은 여러 가지인데 비해 자가생산 능력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은 예부터 사고 파는 거래행위를 해왔다. 하지만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에서처럼 판매와 구매만이 전부인 비인격적인 거래는 아니었다. 거래는 삶의 전부가 아닌 일부였으며, 삶과 문화를 교류하는 미덕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생활이 온통 거래다. 생필품뿐 아니라 지식과 예술도 거래의 대상이 되었고,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능력에 따라 연봉에 차이가 나는 건 당연하고, 내 가치를 흥정하는 연봉 협상이 더 이상 낮선 풍경이 아니다. 우리의 생활도 그렇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각각 자기 능력을 판매하러 일터(직장)로 나가고, 저녁이 되면 생필품을 구매하거나 여가의 즐거움..

인문학적 교양을 넘어 생명의 깊이로 / 정병선 목사

삶은 복잡계다. 얽히고설킨 실타래와 같아서 풀어가는 게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읽는 것조차도 용이하지가 않다. 사실 삶을 읽기 위해서는 깊이 있는 관찰과 진득한 성찰이 요구된다. 관찰과 성찰이 없으면 관습과 소문과 편견이 일상을 지배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물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것처럼 삶도 일상의 틈을 빠져나가게 된다. 하여, 생각이 있는 이들은 삶을 붙잡기 위해 삶읽기를 해왔다. 그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사실 인문학은 복잡계인 삶을 읽기 위해 오랜 세월동안 수행해 온 가장 인간적인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철학자 서동욱은 인문학의 중심인 철학의 미덕을 일컬어 “철학은 한 번도 삶을 배신한 적이 없다. 그것은 생명을 죽음으로 이끌지 않으며 죄의식 같은 마음의 감옥을 짓지도 않는다. 우리를 비루한 존..

살았으나 죽은 교회(계3:1-6) / 정병선 목사

사데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교회입니다. 메시지 성경에서는 “원기 왕성한 것(being alive)으로 유명하다만, 그러나 실은 죽은 자다. 돌처럼 죽어 있다.”고 풀어 설명했습니다. 이 교회는 말 그대로 원기가 왕성하기로 유명한 교회였습니다. 무기력한 교회가 아니라 매우 활력있는 교회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교회들도 아마 그 교회를 매우 활기 넘치는 교회로 인정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만은 그 교회가 살아있는 교회가 아니라 죽은 교회라고 말씀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매우 활력있고 역동적인 교회를 가리켜 죽은 교회라고 말씀하신다는 게 사실 이해가 잘 안 됩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2절이 말해줍니다. 이것저것 하는 일은 많은데 하나님께 인정받을 만한 행위가 없다는..

구원의 방편을 넘어 하나님나라의 참여로 / 정병선목사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성 삼위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시라는데 있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 또한 창조주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행하신 일의 계시이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진실 하나를 암시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인간과 세상의 현실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 구원이 필요할 만큼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 그것도 도덕, 정치, 철학, 교육, 종교를 통해 극복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창조주께서 나서지 않으면 결코 회생될 수 없을 만큼 깊은 수렁에 빠져 있다는 것. 그렇다. 세상의 근원적인 문제는 바로 구원이다. 사람들이 다들 풍부한 소비를 위한 생산 경쟁, 더 많은 부의 축적을 위한 경제 전쟁에 몰두하고 있지만 사실상 모든 시대의 중심 문제는 언제나 구원이었다. 아담 이래로 지금까지 온 세상은..

발람의 가르침을 따른 교회(계2:12-17) / 정병선 목사

버가모교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오늘 한국교회에 반면교사가 되는 교회입니다. 버가모는 매우 이교적인 도시였습니다.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는 성채 위에 가로가 약 37미터, 세로가 약 34미터나 되는 거대한 제우스 신전이 세워져 있을 만큼 여러 신을 숭배하는 도시였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사탄의 위’가 있는 곳이라고 했는데, 제우스 신전이 바로 ‘사탄의 위’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암튼 이 도시는 경제적으로 번창하는 도시이면서 황제 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아시아에서 최초로 로마 황제에게 바치는 성전을 건축한 황제 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당연히 모든 시민은 황제 숭배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여러 신전의 제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지목을 받을 만큼 도시 전체가 이교적이고 황제..

개인의 장벽을 넘어 상생의 관계로 / 정병선 목사

한 사람은 곧 우주다.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서 양심을 따라 선택할 자유와 책임을 지닌 주체다.때문에 사람의 자유와 권리는 존중받아 마땅하다.어떤 이념, 어떤 신앙, 어떤 관습도 한 사람의 고유한 자유와 권한을 제한하거나 억압하거나 강제해서는 안 된다. 물론 사회적 약속이나 국가의 법률을 해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정한 규칙에 따라 처벌할 수 있지만, 공적인 처벌을 할 때에라도 개인의 고유한 인권은 존중되어야 한다.인권을 무시하는 공권력의 남용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중받아야 하며,어떤 경우에도 수단이나 방편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반대의 진실도 외면해서는 안 된다.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제한적이어야 한다.고삐 풀린 자유와 권리(나의 자유와 권리만을 외치는 것)는..

2년 전 그날, 그리고 오늘 / 정병선 목사

2년 전 오늘, 그러니까 2009년 5월 12일은 아들과 나에게 매우 특별한 날이다. 그 날 아들은 죽어가는 애비를 살리겠다며 건강한 간의 일부를 떼어내기 위해, 나는 굳어진 간을 떼어내고 아들의 간 일부를 이식받기 위해 아침 일찍이 2시간의 시간차를 두고 차례로 수술대에 올랐다. 그리고 아들은 8시간, 나는 11시간을 수술대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날 수술실은 분명히 태양 같이 밝은 조명이 밝혀있었을 것이다. 여러 의사와 간호사들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 채 분주했을 것이다. 건강한 생명은 지켜내야 하고,위태롭게 꺼져가는 생명의 촛불은 되살려내야 하는 수술인 만큼 수술팀 전체가 빈틈없이 매달렸을 것이다. 또 수술실 밖에서는 홀로 남은 아내, 그리고 형제들과 여러 지인들이 초조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결..

미지근한 교회(계3:14-22) / 정병선 목사

일곱 교회 중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교회는 라오디게아교회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께 한 마디의 칭찬도 듣지 못한 교회였습니다. 주님이 좋아할만한 구석이라고는 거의 없는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는 한 마디로 말해서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교회였습니다. 주님은 말씀했습니다. “나는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한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겠다.”(v.16).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미지근한 너를 보면 속에서 구역질이 난다는 것입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혐오스럽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확인하고 넘어갈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로 라오디게아교회를 말하면서 ‘미지근하다’, ‘차갑다’, ‘뜨겁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 표현은 사..

환원주의를 경계하라./ 정병선 목사

앞서 말한 대로 한국교회 안에는 ‘믿음 환원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모든 일의 원인을 하나님 한 분에게만 두는 ‘하나님 환원주의’,기도하면 만사가 해결된다는 ‘기도 환원주의’,중요한 건 오직 내세뿐이라는 ‘내세 환원주의’,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은 오직 영혼 구원이라는 ‘전도 환원주의’ 등여러 형태의 환원주의가 신앙생활 전반에 깊숙히 침투해 있다. 물론 하나님의 주권을 존중하는 것과 ‘하나님 환원주의’,피조물의 태도로 겸손히 기도하는 것과 ‘기도 환원주의’,영혼 구원을 위해 헌신하는 것과 ‘전도 환원주의’,종말론적인 하나님나라를 대망하는 것과 ‘내세 환원주의’는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하지만 종이 한 장의 차이는 실로 엄청나게 크다. 하나님의 주권을 존중하며 의존하는 것은 매우 훌륭한 신앙의 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