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554

톨스토이의 가출과 죽음(1) / 정병선목사

나는 2011년 새해 벽두에 톨스토이를 읽었다. 톨스토이의 작품이 아니라 미국 작가인 제이 파리니가 쓴 [톨스토이의 마지막 정거장]을 읽었다. 전기적 성격의 소설인 그 책은 오랫동안 서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에 소설을 잘 읽지 않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방치해 두었었는데, 책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고 하여 꺼내 읽었다. 연초에 너무 무거운 것보다는 좀 가볍게 읽어보겠다는 마음으로. 자극적인 재미는 없었지만 톨스토이의 인생에서 가출이 갖는 상징성에 마음이 끌렸다. 하여, 서가에서 잠자고 있던 또 한 권의 책 - 톨스토이의 큰딸이 아버지의 죽음과 가출에 대한 사람들의 억측을 해소하기 위해 쓴 [톨스토이]를 꺼내 읽었다. 그리고 내친 김에 오래 전에 읽었던 [참회록]을 또다시 읽었다. 읽으면서 참 많이..

믿음으로 수행하라(마5:1-10) / 정병선목사

삶과 고통이 한 덩어리가 된 것은 자유의지가 타락한 이후부터입니다. 의지의 타락이 고통의 실제적인 원인입니다.그런데 만일 의지가 없었다면 인간의 운명이 어땠을까요? 인류의 문명이 여기까지 발전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못했을 겁니다. 의지가 빠진 이성만으로는 과학이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고, 지식이 발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성에 의지가 가세했기 때문에, 지극한 불편과 위험과 역경을 뚫고 돌파해내는 불굴의 의지가 가세했기 때문에 사람이 지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고 위대한 성취를 할 수 있었지 의지가 가세하지 않았더라면 인류는 멸종했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행동은 의지로부터 나옵니다. 의지야말로 모든 행동의 원동력입니다. 의지 없이는 행동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설사 행동하더라도 작은 난관 하나조차 뚫어낼 수..

한 말씀만 하소서(2) -자유의지와 고통의 관계- / 정병선목사

자유의지와 고통의 관계 우리가 고통의 원인을 추적하고 또 추적하다 보면 결국 자유의지의 문제에 닿게 된다. 하나님께 순종할 수도 있지만 순종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의지 말이다. 세상의 모든 고통을 한 번 살펴보라. 고통을 가하는 주체는 거의 언제나 사람이다. 물론 사람을 넘어선 천재지변도 고통을 유발하긴 하지만 그 이외의 고통은 거의 다 사람 때문에 발생한다. 그렇다. 사람이 바로 고통의 진원지다. 그리고 사람이 고통의 진원지가 된 것은 순전히 자유의지 때문이다. 자유의 문제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아마도 가장 깊이 고민하신 문제였으리라고 생각된다. 성경이 직접 언급하지는 않기 때문에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한 번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하나님은 지혜로우실 뿐만 아니라 자유하신 분이시다. ..

한 말씀만 하소서(1) / 정병선목사

고통은 삶이 내지르는 신음이고 삶에 드리워진 어둠이다. 고통은 삶이 입은 상처다. 사람뿐 아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고통으로 신음하며 탄식하고 있다(롬8:22). 사실이다. 고통의 문제는 온 생명의 문제다. 그러기 때문에 고통의 문제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일 수 없다. 고통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삶의 신음소리를 듣는 것이고, 또 아픈 상처를 건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고통의 문제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매우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일임이 분명하다. 고통의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통의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삶과 고통은 분리할 수 없는 한 덩어리이고, 고통을 말하지 않고는 인생을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마음이 아프고 무겁다 하더라도 고통의..

요셉의 진술이 진실의 전부일까?(창37:27-36) / 정병선목사

사람이 고통의 한 가운데 있을 때 본능적으로 갖게 되는 일차적인 반응은 고통을 피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괴로울 때 술을 찾지요? 좀 심하면 마약을 찾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잠깐이라도 괴로움을 잊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육체적인 고통이 심할 때 진통제를 찾는 것도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고통을 누그러뜨리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또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다른 일에 집중하기도 합니다. 안 하던 운동을 열심히 한다든지, 새로운 일을 만들어서 정신없이 일을 한다든지,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연애를 한다든지,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든지 하는 것도 다 고통을 잊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결국 우리가 고통을 다루는 방식은 대부분 고통을 삶의 외부로 밀어내는 방식입니다. 60초 시한폭탄을 돌리는 게임을 하는 것..

고통 앞에서(사38:1-14) / 정병선목사

고통의 문제는 가장 절실하고 심각한 생명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지구촌 구석구석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삶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불행을 느끼는 가장 원초적인 느낌이 뭔지 아시지요? 고통입니다. 고통보다 더 잔인하고 처절한 불행감은 없습니다. 고통은 인간의 감정과 판단을 좌우하는 척도이기도 합니다. 나에게 고통을 가하는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이 적대감이고, 나에게 고통을 가한 사람의 행동을 불의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당한 고통을 되갚아 주고 싶은 마음이 어쩌면 정의에 대한 원초적인 감정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가장 외로움을 느끼는 것도 고통의 와중에 있을 때이고, 가장 무력감을 느끼는 것도 고통에 휩싸여 있을 때입니다. 사람이 가장 치욕스러움을 느끼는 것도 역시 고통을 당할 때입니다. 그렇습니다. 고통의..

고통과 자살(시편119:65-71) / 정병선목사

우리는 지금 충격적인 자살 소식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온 국민을 경악케 했던 전직 대통령의 자살을 비롯해서 젊은 연예인들의 잇단 자살, 그리고 ‘행복전도사’를 자처했던 최윤희 씨의 자살까지, 그야말로 자살이 일상의 뉴스가 되어버린 참으로 우울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지난 9월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20대 사망자 4051명 가운데 44.6%인 1807명이 자살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집계되었습니다. 하루에 5명 정도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는 겁니다. 10대의 경우는 전체 사망자 가운데 29.5%가 자살입니다. 인생의 아름다움을 채 피워보지도 못한 청소년들이, 세상과 인생의 어떠함을 아직은 충분히 경험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삶의 가벼움과 무거움의 신비를 채 알기도 ..

사마리아인의 감사(눅17:11-19) / 정병선목사

오늘 이야기는 매우 단순합니다. 갈릴리 언저리를 맴돌며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시던 예수님이 돌연 예루살렘으로 방향을 돌려 갈릴리와 사마리아 경계를 가로질러 가시다가 어느 마을에서 나병 환자 열 명을 만나 낫게 했는데, 그 중에 한 사람만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단순한 이야기 속에는 매우 심오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유대사회는 악성 피부병이나 나병에 걸린 사람을 매우 엄격하게 격리시켰습니다. 악성 피부병에 걸리면 일단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악성 피부병이라고 판단이 되면 즉각 가족과 마을을 떠나게 했습니다. 마을에서 일정한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 혼자 살게 했습니다(레13:46). 그런데 예수님이 한 마을에서 나병 환자를 열 명이나 만난 걸 보면 그 마을..

잃은 양의 비유가 말하는 것(눅15:1-10) / 정병선목사

누가복음 15장은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이야기로 유명한 장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일수록 잘못 이해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가복음 15장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전도에 관한 메시지로 많이 설교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찾으시니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잃은 양을 찾는 일에 열심이어야 한다는 식으로 많이들 설교합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성경을 읽는 것은 본문의 배경을 생각하지 않고, 교회 유리한 대로 끌어다대는 아전인수식 성경 읽기의 전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누가복음 15장 이야기는 평판이 좋지 않은 세리나 죄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말씀 듣는 것을 보고,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불평한 데서 나온..

지금, 여기 / 정병선목사

1. 나무 앞에서 사람이란 존재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동물 같다. 줄기차게 소유와 성취를 향해 내달리는 걸 보면, 그것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성취하고 소유해야만 비로소 웃는 걸 보면, 사람은 나무처럼 존재에 충실하지 못하는 것 같다. 나무는 존재와 삶이 하나다. 사는 것이 곧 존재하는 것이요, 존재하는 것이 곧 사는 것이다. 나무는 여기저기를 들쑤시며 다니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자기 자리에 뿌리를 내리며 일평생을 산다.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고, 비가 내리면 비에 젖어 산다. 시샘하는 것도 없고 불평하는 법도 없다. 한국의 봄을 수놓는 진달래는 소나무나 플라타너스처럼 키가 크지 않다고 불평하지 않는다. 키 큰 나무들 속에 난장이처럼, 못난이처럼 숨어 있지만 한 번도 소나무가 되겠다며 몸부림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