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20 13

불신앙의 전형(대상1:35-54) / 리민수 목사

불신앙의 전형(대상1:35-54)  본문은 언약 백성의 주류에서 제외된 에서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다. 곧 창36장에 근거하여 이삭의 장자 에서의 계보를 에서의 후손들(35-37절), 세일의 후손들(38-42절), 에돔의 왕들(43-54절)로 소개하고 있다.   에서는 육신적으로 장자의 권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언약 백성의 정통 족보에 오를 수 있었지만, 영적인 축복을 현세적 만족과 바꾸어 버림으로써, 구속사적 흐름의 본류에서 제외되고 말았다.  에서와 그 후손 에돔 족속은 이후로 하나님이 언약 백성이 된 이스라엘 백성과 대조되어 불신앙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눅11:8-10) / 이금환 목사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누가복음11:8-10)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친구이기 때문에 요구를 들어주고, 친구이기 때문에 도와주는 것을 많이 봅니다. 우리나라같이 혈연, 지연, 학연으로 엮여 있는 사회에서는 더욱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는 말씀에 공감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친구가 아니라면 "당신이 아무리..

옳음의 능력 / 정용섭 목사

지난 설교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이다.“... 더 나가서 본문의 세리처럼 지금 여기서 이미그 옳음의 능력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여기서 옳음의 능력이 무엇인지충분히 전달되지 않은 것 같다. 저 말은 ‘칭의의 능력’이라고 보면 된다.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때우리는 삶의 참된 능력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보통 사람들은 삶의 능력을 다르게 생각한다.돈이나 권력으로 다른 사람을 제압함으로써자신을 높이는 것을 삶의 능력으로 여긴다.그게 우리 눈에 쉽게 들어오기 때문에그렇게 생각할 만하다.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그런 것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옳다는 인정을 받았다는 것은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통치에 들어갔다는 의미이다.더 정확히 말하면 그 사실을..

삶의 완성(2) / 정용섭 목사

지난 주일 설교 마지막 단락에서우리가 비록 신앙의 부침이 있겠지만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집중하면평생 전체를 놓고 볼 때신앙이 앞으로 진보할 것이며,삶의 완성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삶의 완성’이라는 말을 오해할 수 있다.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완성은 불가능하다.구원받았는데도 여전히 불완전하다는 사실을몹시 불편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그들이 소위 구원파다.구원이 이미 완성되었다고 믿기 때문에그들은 회심기도를 드리지 않는다.일종의 실증적 구원론이다.구원에 대한 열정은 높이 살만 하나 구원이, 또는 하나님 나라가‘이미’와 ‘아직 아님’의 변증법적 긴장관계 안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적으로 미숙한 것만은 분명하다. 요한 웨슬리는 ‘기독자 완전’(Christia..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 정용섭 목사

어제 저는 WCC 부산 10차 총회 개회예배에 참석했습니다.예배 순서의 하나인 신앙고백이 로 드려지더군요.이 신조는 동방 서방 모든 교회가 인정하는 것입니다.샘터교회는 매월 첫 주일에 성찬예식을 하면서신앙고백을 로 드리는 까닭에이번 총회의 예배가 더 반가웠습니다.번역이 매끄럽게 되었더군요.그래서 이번 주 샘터교회도 이번 총회 예배에서 사용된 번역문을 따르려고 합니다.중심 내용은 원래의 것과 비슷합니다. 단 하나의 차이가 있는데, 성령에 대한 것입니다. '필리오 께'(그리고 아들로부터)가 빠졌습니다. 정교회와 함께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래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우리는 한 분이신 성부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전능하셔서, 하늘과 땅과 이 세상에 보이고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비 / 정용섭 목사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 나오는세리의 기도는 기독교 영성의 핵심이다.“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그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했다는 뜻이다. 말이 그렇지 저런 기도를 드리기가 쉽지 않다.겉으로 기도를 드릴 수는 있겠으나그런 기도의 영성으로 살아가기는 어렵다.그런 삶이 무엇인지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우리 손에 잡히는 건 주로 실증적으로 확실한 것들이다.그것이 뭔지는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없다.우리 모두가 붙잡으려고 맹렬히 따라가는 그것을 생각하면 된다.그런 것들로부터 우리가 완전히 초월할 수도 없다.특히 자본주의가 극에 달한 오늘의 시대에아무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돈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는 어렵다.그런 현실은 어쩔 수 없으나그런 삶이 우리의 영혼까지 잠식해 ..

선한 사람은 선한 것을 내고 (마 12:33~37) / 김재홍 목사

"나무가 좋으면 그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그 열매도 나쁘다.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악한데, 어떻게 선한 것을 말할 수 있겠느냐?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선한 사람은 선한 것을 쌓아 두었다가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것을 쌓아두었다가 악한 것을 낸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은 심판 날에 자기가 말한 온갖 쓸데없는 말을 해명해야 할 것이다. 너는 네가 한 말로, 무죄 선고를 받기도 하고, 유죄 선고를 받기도 할 것이다."-------1. 죽음을 쏟아내는 우리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소망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수요일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성회수요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감당할 수 없..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이신 예수님(마가복음 4:35-41) / 원용일 목사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이신 예수님(마가복음 4:35-41)비유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시던 예수님이 이제는 뭔가 다른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떤 모습인가, 특히 그 통치자가 누구인가 보여주십니다.마가복음 4:35-41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40 ..

분노는 선택이다. / 봉민근

분노는 선택이다.         글쓴이/봉민근세상에 자기중심적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지나친 것이 문제다.상대에 대한 배려심이 없는 사람은 분노를 쉽게 나타낸다.자신은 옳다고 주장하며 살지만 누구나 자신의 의는 절대적이지 않다.자신을 정확한 저울에 올려놓고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완전한 사람이다.감정도 경영이라는 말이 있다.감정을 잘 다스리는 자가 성숙한 인격의 사람이다.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는 성경의 말씀을 기억했으면 좋겠다.분노는 선택이다.분노는 다스릴 수 있다.하고 싶은 말을 다하면 그 자리에서는 속이 시원할지 몰라도 반드시 후회가 찾아온다.분노는 마귀에게 틈을 주는 것이다.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영웅이다.화를 내는 사람은 이미 패배자다.분노는 파괴적이고 분노의 끝은 관계..

주님 은혜 의지하여 (히 5:1-6) / 김영봉 목사

해설: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늘에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4:14)으로 소개한 저자는 인간 대제사장과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을 대조하여 설명한다. "각 대제사장"(1절)은 아론 이후로 이어져 온 대제사장들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관계되는 일"(1절)은 제사를 뜻한다.  "그는 자기도 연약함에 휘말려 있으므로"(2절)라는 말은 대제사장도 역시 죄를 짓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뜻이다. “그릇된 길을 가는 무지한 사람들”은 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들을 “너그러이 대할 수 있습니다”라는 말은 대제사장이 자신도 죄인임을 알기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 겸손히 섬길 수 있었다는 뜻이다. 대제사장은 백성을 위해 속죄 제사를 드리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의 죄를 위해서도 속죄 제사를 드려야 했다(3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