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하늘과땅사람 62

하늘땅 사람이야기48 - 인생은 오늘의 점철 (2015.11.23)

평안하신지요? 이제 소설 절기에 이르렀네요. 교회력으로는 일년의 마지막 주일을 막 지냈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대림절의 촛불을 하나하나 밝혀 나가면서 또 다시 기도를 올려야 하겠습니다. 시대가 빚어내는 어둠과 혼돈이 더욱 깊어지고 있습니다. 윤동주는 1942년 6월에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중에서)라고 노래했지요. 그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이 나라는 국제사회에서 노골적으로 조롱받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외국 유수의 언론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후퇴를 우려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그렇게도 분명하게 보이는 것이 왜 우리 국민들의 눈에는 안 보이는 걸까요? 내면화된 공포심 때문일까요..

하늘땅사람이야기47 - 바늘로 우물 파기

바늘로 우물 파기 모처럼 단비가 내리는 오후입니다. 찾아왔던 이들이 다 돌아가고 홀로 앉아 라흐마니노프의 '베스퍼스Vespers'를 들었습니다. 성무일과 중 '저녁기도'를 뜻하는 베스퍼스가 제 마음에 저릿하게 다가온 것은 날씨 탓도 있는 것 같습니다. 스웨덴 라디오 콰이어의 목소리에 담긴 채 무장무장 밀려오는 음의 파도에 몸과 마음을 맡기니 참 평안해졌습니다. 처리해야 할 많은 일들에 대한 근심도 잠시 물러갔습니다. 예배로의 부름으로부터 시작되어 주님에 대한 찬미, 빛을 모심, 시편 기도, 부활의 노래, 마니피캇, 글로리아를 거쳐 승리의 노래에 이르는 합창곡들이 지친 제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얼마나 큰 위안이었던지요. 늘 푸근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날 찾아와 주어 고맙습니다. 이역만리에서 ..

하늘땅사람이야기 46 - 나무가 부르는 노래

나무가 부르는 노래 평안하신지요? 간밤에는 창문을 흔드는 바람 소리에 잠이 깼습니다. 베란다 창문이 좀 열려 있었나 봅니다. 창밖을 내다보니 시원하게 비가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모처럼 내리는 단비였습니다. 충남에서는 물 부족으로 제한 급수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현지인들에게는 심각한 문제인데 내가 당사자가 아니라고 그 심각성을 깊이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조금 숨을 돌릴 수 있을까요? 가만히 어두운 창가에 서서 바람이 휘젓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물끄러미.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잠시 나무를 흔들다가 놓아주곤 하는 바람, 바람이 부는 대로 자유롭게 춤을 추는 나뭇잎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목사님께 들려드리고 싶은 마음이 어린아이..

하늘땅사람이야기45 -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어제의 만남은 참 유익했습니다. 함께 오신 재즈 뮤지션 덕분에 대화가 더 유쾌했던 것 같습니다. 재즈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음악을 듣고 있으면 이런저런 일로 들떴던 마음이 차분해지고, 애집하고 있던 일로부터 조금은 거리를 둘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아요. 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쿠바 출신 할배들이 만들어내는 그 조화롭고 자유로운 소리에 매혹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생이란 너무 엄숙한 것도 비극적인 것도 아니라고, 순간순간 다가오는 기쁨과 슬픔을 한껏 맛보면서 즐겁게 견뎌내는 거라고 말하는 듯 했습니다. 어쩌면 아직 정오 무렵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는 낯설 수도 있는 세계관일 겁니다. 하지만 오후 4시에서 5시 어간을 지나고 있는 내게는 그 할배들이 보여주는..

하늘땅사람이야기44 - 눈 떠 바라보기를 잊지 마라

눈 떠 바라보기를 잊지 마라 평안하신지요? 무정하고 무심한 세월이 흐르고 또 흐르더니 어느덧 상강霜降 절기를 맞게 되었네요. 옛 사람은 이맘 때를 가리켜 "만산滿山 풍엽楓葉은 연지臙脂를 물들이고, 울 밑의 황국화黃菊花는 추광秋光을 자랑한다"고 노래했습니다. 단풍을 보며 여인의 볼에 찍는 연지를 떠올리는 것이 참 정겹습니다. 국화의 노란빛이 사뭇 부드러워진 가을빛이 깃든 것이라 하는 상상력이 참 여유롭습니다. 이런 여유는 멈춰설 때만 누릴 수 있는 것일 텐데, 달구치듯 우리를 몰아가는 어떤 강박관념 때문에 가을을 만끽하지 못하고 삽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남해에서 함께 보낸 시간이 벌써 아련한 그리움으로 물들고 있습니다. 자옥한 미세먼지 때문에 해돋이의 장관을 보지 못하고 푸른 바다 풍경을 보지 못한 것이..

하늘땅사람이야기43 - 치곡致曲의 삶을 향하여

치곡致曲의 삶을 향하여 오늘 만나서 참 반가웠습니다. 홍안의 청년으로 만난 후 거의 40년의 세월이 흐르고 있군요. 세월의 빠름을 한탄해보아야 아무 소용 없는 일이지만, 그동안 뭘 하고 살았나 돌아보니 회한이 밀려옵니다. 인생의 각 시간에 주어진 역할들을 감당하느라 나름대로 갖은 수고를 다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대개는 시간에 등 떠밀리며 살았지만 시간을 타고 산 때도 없지는 않습니다. 어느 것이 더 나은 삶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등 떠밀리며 살던 시간, 어지러움이 아득하게 밀려올 때면 애써 잊고 살았던 허무함이 마치 안개처럼 나의 존재를 삼켜버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 허무함은 어둠의 중심으로 우리를 이끄는 냉소주의와는 달랐습니다. 지금 애집하고 있는 일들이 어쩌면 부질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늘땅사람이야기42 - 가시밭길을 걷다

가시밭길을 걷다 안녕하세요? 일전에 만나 뵈어 반가웠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사귀어 온 사람처럼 스스럼없이 대해주시어서 저도 격의없이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기성세대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마음은 여전히 청년이라고 말하지만 저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청년 시절의 불온함도 열정도 치기도 제게서 이미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지레 마음이 늙어버린 것이 아닌가 싶어 두렵기도 합니다. 추석 연휴 기간 중에 제가 마음으로 좋아하는 목사님 한 분이 강원도의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야영을 하면서 지내시는 이야기를 SNS를 통해 곁눈질하면서 그의 청년 정신을 부러워한 적도 있습니다. 홀로 그 깊은 계곡에 들어가 텐트를 치고, 밤의 추위와 싸우면서, 평소에 좋아하던 음악을 듣고 ..

하늘땅사람이야기41 - 성과 속의 경계를 넘어

성과 속의 경계를 넘어 안녕하신지요? 한로를 앞둔 절기여서인지 조석 기운이 선선합니다. 새벽녘에는 한기가 느껴지기도 하더군요. 개울가에 핀 물억새가 갈색에서 흰색으로 변해갈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사무실에 앉아 있다가 문득 인기척이 느껴져 돌아보았을 때 선생님은 문 밖에서 저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짧은 시간의 응시였겠지만 공교롭게도 눈길이 그렇게 마주친 것이지요. 누구시냐고 묻는 제게 선생님은 제 글을 읽고 꼭 만나고 싶어 어렵게 찾아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기치 않은 만남은 설렘이기도 하지만 부담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정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의례적인 응대만 하고 얼른 하던 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저를 대하는 선생님의 마음이 진실하다는 느낌이 들었고, 저는 이야기 ..

하늘땅사람이야기40 -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평안하신지요? 모처럼 맞은 휴일입니다. 라디오에서는 가볍고 부드러운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아내에게 무슨 곡이냐고 물었더니 영화 의 주제곡인 'speak softly love'라네요. 영화의 비장함에 비해 이 곡은 얼마나 부드러운지요. 폴 모리아 악단의 연주는 감미롭기 이를 데 없습니다. 연휴의 첫날 이 곡을 선곡한 까닭은 알 수 없지만 마음이 좀 말랑말랑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짧기는 하지만 지난 며칠 동안의 여정은 참 즐거웠습니다. 어떤 장소는 그곳에 머물고 있는 혹은 머물렀던 누군가에 대한 기억과 더불어 의미있게 다가옵니다. '통영' 하면 충무김밥이나 오미사 꿀빵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고 이순신 장군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제게 그곳은 유치환, 백석, 김춘수, 김상옥..

하늘땅사람이야기39 - 세상의 모든 라헬을 위하여

세상의 모든 라헬을 위해 주님의 평강을 빕니다. 한번도 뵌 적이 없는 분에게 불쑥 편지를 쓰는 무례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한국에 살고 있는 평범한 시민입니다. 목회자로 살고 있습니다. 출판사의 부탁으로 앞으로 출간될 선생님의 책 원고를 읽고 몇 마디 추천의 글을 쓰게 된 것이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습니다. 내가 선생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참척(慘慽)의 고통을 당해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경험한 어머니라는 사실 뿐입니다. 사랑하는 아들 토드가 스물 한 번째 생일이 지난지 채 1시간도 되지 않았을 때 죽임을 당했다지요? 선생님은 그 순간을 "나의 하늘에서 별들이 떨어졌다"고 쓰셨습니다. 벌써 33년 전 일이니 세월이 꽤 흘렀네요. 하지만 세월이 흘렀다고 해서 그 순간의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