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3064

팔복(15)- 절대 생명 / 정용섭 목사

종말에 완성될 생명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완전하고 절대적인 생명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질문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답을 찾기도 힘들다. 우리가 지금 상대적인 생명 세계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절대적인 생명을 생각해낼 수가 없다. 기껏 해봐야 배고프지 않고, 병들지 않고, 싸움이 없고, 죽지 않는 생명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쉽게 생각하고 있는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면 생명이 완성될까?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배고프지 않으면 배부름도 모른다. 배부름을 모르면 행복도 모른다. 병들지 않으면 건강한 게 무엇인지도 알 수 없다. 죽지 않으면 살아있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의 상상력을 아무리 발휘해도 절대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 이는 곧 하나..

팔복(14) / 정용섭 목사

하늘나라를 기다린다는 말을 냉소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배부르게 먹고 존경받는 삶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 신자이면서도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조금 좋은 뜻으로 지금 여기서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게 최선이지 하늘나라가 오는 걸 기다리는 게 뭐 중요하냐는 주장들이다. 그래서 이런 기다림의 신앙을 무책임한 것으로, 비현실적인 것으로 여긴다. 과연 그런가?기독교가 말하는 기다림의 영성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막연한 내세를 기다리는 게 아니다. 기다린다는 말은 생명이 종말에 완성된다는 의미이다. 지금 우리의 생명은 완성된 게 아니다. 세상도 완성된 게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도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우리 자신의 생명과 세상을 보라. 모든 것이 유한하다...

팔복(13) / 정용섭 목사

하늘나라가 가난한 자의 것이라는 말은 나중에 죽어서 하늘나라에 간다는 뜻일까? 즉 내세 천국을 가리키나? 그러니 지금은 인생이 고달파도 참고 지내라는 말일까? 이렇게 되면 그야말로 복음이 ‘민중의 아편’이 되고 만다. 빈부격차의 문제도 그냥 내버려두어야 한다. 경제정의는 무의미한 구호에 머물고 만다. 이건 오해다.이 문장을 좀더 깊이 이해하려면 하늘나라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야 한다. 하늘(하나님) 나라는 질적으로 새로운 세상이다. 우리는 여기서 상대적인 것에 묶여서 산다. 다른 사람보다 좀더 돈이 많고 좀더 건강하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것으로 만족해한다. 요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체제는 이런 삶의 방식으로 더 강화하고 있다. 기독교인들도 하늘나라를 복지가 최상으로 보장된 세상으로 여긴..

팔복(12) / 정용섭 목사

가난한 자들이 왜 복 있는 자들인가? 본문이 답한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죽어서 천당에 간다는 말이구나, 하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런 생각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자신에게 삶의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의 것에 자신의 영혼을 걸어두지 않는다. 자신에게 능력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생명을 성취하려고 애를 쓴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을 세상의 것에 걸어둔다. 인생이 흘러가면서 이들의 영혼이 어떤 상태로 들어가는지를 보라. 세상의 것에 자기 영혼을 걸어두는 사람은 세상의 것이 잠정적이고 무상하다는 사실 앞에서 절망한다.아마 이런 말을 실감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부자들은 모두 재미있게 사는 것 같다고 여길 것이다. 사회..

팔복(11) / 정용섭 목사

누가복음의 ‘가난한 자’와 마태복음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다르게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같은 이들을 가리킨다. 가난은 삶의 능력을 약화시킨다. 팔복이 선포되던 2천 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고아, 과부, 종들은 가난한 자를 대표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나라를 잃고 다른 나라에 망명 온 이들이나 빌붙어 사는 이들도 가난한 자들이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삶의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노력해서 부자가 될 수 있는 길도 막혀 있었다. 그들은 세상의 완전한 변혁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심령이 가난한 자도 역시 자기에게 생명의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비록 경제적인 가난에서 벗어나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경제적인 능력이 자기를 구원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가난한 자다.여기서 삶의 능력이 자신에게 없..

팔복(10) / 정용섭 목사

마태복음 기자가 전하는 팔복의 첫 항목은 이렇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여기서 심령은 헬라어 프뉴마다. 프뉴마는 히브리어 루아흐와 비슷한 개념이다. 그것은 영, 내적인 생명, 바람, 숨이라는 뜻이다. 종교적인 깊이가 가장 깊었던 민족인 히브리인들과 철학적인 깊이가 가장 깊었던 민족인 헬라인들이 세상을 비슷하게 보았다는 증거다. 지금 우리는 그들의 생각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이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니고, 우리가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다 부분적으로만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대인들의 언어 세계를 공부해야 한다. 이를 통해서 부분적인 생각을 관통하는 진리에 열린 태도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프뉴마는 낱말풀이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것은 개념이다..

팔복(9) / 정용섭 목사

경제 문제의 추상화는 극단적인 내세주의자들에 의해서만 주장되지 않는다. 나름으로 사회의식이 있고, 교회개혁을 주장하는 이들에 의해서도 주장된다. 수년 전에 ‘청부론’ 논쟁이 한국교회를 뜨겁게 달군 적이 있다. 김동호 목사가 청부론의 대표자이시다. 청부론은 말 그대로 기독교인들이 깨끗한 부자로 살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분은 여기에 덧붙여 ‘고지론’도 주장하셨다. 고지론은 기독교인이 사회의 중요한 자리에 먼저 들어가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세상이 바뀐다는 주장이다. 그 중요한 자리가 전투용어인 고지이다. 전투에서 고지를 선점하면 전투에서 유리하다. 고지론과 청부론이 한국의 젊은 지성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들린 것 같다.깨끗한 부자가 누군가? 성경에도 그렇게 해석될 수도 있는 인물들이 나오긴 한다. 믿음의 모범..

팔복(8) / 정용섭 목사

가난의 문제를 중심 주제로 삼은 신학을 가리켜 ‘해방신학’이라고 한다. 로마가톨릭교회가 거의 국교처럼 되어 있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1960년대에 시작된 신학의 흐름이다. 보프나 구티에레즈 같은 해방신학자들은 모두 가톨릭 학자들이다. 해방신학은 라틴 아메리카에 머물지 않고 전 세계에서 확장되어 현대신학을 대표하는 신학 운동의 하나가 되었다. 여기서 해방신학에 대한 전체적인 윤곽을 설명하지 않겠다. 신학대학원 석사나 박사 과정에서 한 학기 공부할 내용을 여기서 다루기는 역부족이다. 그 신학의 기본 관점만 짚겠다.해방신학은 말 그대로 왜곡된 경제 사회 구조로부터의 인간 해방을 복음의 중심으로 이해하는 신학 운동이다. 특히 구조적인 악한 질서에 대한 실천적 항거가 중요하다. 해방신학을 추종하는 가톨릭 사제들 중..

실상 / 정용섭 목사

원당에 들어와 살다보니세상이 작동되는 실상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네요.물론 하양 아파트에 사는 동안에도비슷한 걸 경험하긴 했지만이제는 그게 일상이 되었습니다. 모든 생명체가 생존하기 위해서처절하게 투쟁하고 있습니다.하루살이로부터 고양이까지,토끼풀부터 대나무까지...모든 것들이 서로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을 칩니다.아마 인간도 그 일부겠지요. 아래 사진은 개미들이 죽은 곤충을 밀고 가는 장면입니다.하나는 풍뎅이처럼 보였고,다른 하나는 지렁이였습니다.지렁이는 아직 숨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아 보였어요.개미는 보통 개미가 아니라 아주 작은 개미에요.불개미라고 하나요. 우리가 그냥 스처지나가는 지구 곳곳에서서로 먹고 먹히는 생존경쟁이 처절하게 펼쳐집니다.이런 방식을 뛰어넘는 생존의 길이 있을까요?여기에 인간이 어..

팔복(7) / 정용섭 목사

마태복음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라고 말하는데 반해서 누가복음은 단순히 ‘가난한 자들’이라고 했다. 심령은 오늘 잘 쓰지 않는 단어다. 프뉴마는 영, 또는 정신이라는 뜻이다. ‘마음’으로 번역해도 가능하기는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순수한 우리말인 마음은 프뉴마를 담기에는 너무 단순해 보인다. 루터는 그것을 ‘geistlich’라고 번역했다. 영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가난한 자들이라는 뜻이다. 마태의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이라는 표현과 누가의 가난한 자들이라는 표현은 보기에 따라서 다를 수도 있고 같을 수도 있다.누가는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을 비롯해서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예수님의 탄생 설화에서도 마태복음에는 당시 최고 석학이라 할 동방박사들이 등장하지만 누가복음에는 하층민에 속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