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1904

마가복음 후기(3)(막16:10,11)

'마리아가 먼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막16:10,11) 예수의 부활을 최초로 경험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슬퍼하며 울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행동은 이해가 갑니다. 대략 3년 가까이 스승으로 모시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을 당했으니 그들의 슬픔이 오죽하겠습니까. 사람의 슬픈 감정은 아주 자연스러운 겁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복음서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복음서는 사람의 감정에 대해서 별로 강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서의 주제는 사람의 감정과 행동이 주아니라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

마가복음 후기(2)(막16: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막16:9) 위 구절은 예수님의 부활 시점을 확정적으로 말합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이라고 말입니다. 다른 전승들은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무덤이 빈 것을 확인했다고 말할 뿐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귀신이 들렸었다는 말은 마가복음에는 없습니다. 대신 누가복음에 나옵니다.(눅 8:2) 어제도 말씀드렸듯이 이 여자가 바로 막 16:1절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럴 가능성도 있고, 아닐 가능성도 있습니다. 상식적으로만 본다면 똑같은 여자가 아닐 겁니다. 바로 앞에서 나온 여자를 반복해서 언급할 수는 없는 거 아닐는지요.   부활한 ..

마가복음 후기(1)(막16: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막16:9) 마가가 기록한 원래의 마가복음은 16:8절로 일단 끝납니다. 9-20절은 훗날 어떤 사람에 의해서 추가된 부분입니다. 그것은 본문에서 이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보도인 막 16:1-8절은 예수님을 갈릴리에서 만날 것이라 말했지만 9-10절에는 그것에 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거지요. 9-11절에는 부활의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나타나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막달라 마리아를 일곱 귀신 들렸던 여자라고 말합니다. 그 막달라 마리아는 16:1절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자일까요? 그 뒤로 이어지는 짤막한 단편들은 ..

그는 살아나셨다(35)(막16: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막16:8)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예수의 부활에 관한 마가복음의 보도는(막 16:1-8) 아주 간단하고 짧습니다. 세 명의 여성들이 무덤에서 천사를 만났다는 이야기뿐입니다. 거기에 어떤 교훈도 없고 결론도 없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이 부활 보도가 약간 확대되었습니다. 복음서의 구성으로만 본다면 복음서 기자들이 부활을 소홀하게 다루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왜 그럴까요? 복음서 기자가 예수 부활을 소홀하게 언급하고 싶어서 그렇게 한 건 아닙니다. 부활 사건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종말에 가서야 확연하게 드러날 궁극적인 생명 사건을 그들이 무슨 수로 자세하게 묘..

그는 살아나셨다(34)(막16: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막16:8) 여자들이 놀라서 떨며, 무덤에서 도망하고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무덤 안에서도 아무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도대체 무엇을 본 것일까요? 앞 구절에서 천사들에게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천사들이 그렇게 놀랄만한 현상인가요? 성서에는 천사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나옵니다. 구약은 접어두고, 신약에도 나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찾아가서 예수를 잉태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리아가 놀라긴 했지만 정신을 놓지는 않았습니다. 천사와 대화도 했습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여자들이 본 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천사는 아닙니다. 천사를 보..

'그는 살아나셨다'(33)(막16: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막16:8) 위 구절에서 의외의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말을 들은 여자들이 몹시 놀라고 떨었다고 합니다. 무덤에서 도망했습니다. 너무 무서워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 사실을 전하라는 천사의 말을 무시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말을 천사에게서 들었다면 “할렐루야!”를 외치는 게 당연한 일이었을 텐데요. 그게 아니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무덤을 구석구석 살펴보는 게 상식적으로 옳은 거겠지요. 그런데 이 여자들은 못 볼 걸 보았다는 듯이 무서워서 도망갔습니다. 쥐 죽은 듯이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과 초기 추종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

그는 살아나셨다(32)(막16: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막16:7) 무덤의 천사는 세 명의 여성 제자들에게 계속 말합니다.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가서 전달하라는 겁니다. 그냥 ‘제자들’이라고 하지 않고 ‘베드로’ 이름을 덧붙였습니다. 베드로가 수제자이기에 강조하는 것일까요? 아마 초기 기독교 당시에는 ‘제자들과 베드로’가 일종의 관용어로 사용된 것 같습니다. 그녀들이 전해야 할 내용은 부활의 주님이 갈릴리로 갈 것이며, 거기서 만날 수 있으리라는 사실입니다. 갈릴리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시작된 곳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제자들을 부르셨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른 곳입..

그는 살아나셨다(31)(막16: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막16:6) 기독교 신앙은 “예수가 살아나셨다.”는 명제에 모든 것을 걸어두고 있습니다. 이게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도박과 같습니다. 이것이 옳다면 기독교가 진리라는 사실이 확인될 테지만, 그것이 인정받지 못하면 기독교의 뿌리가 송두리째 흔들립니다. 부활이 아니라 도덕성과 정신수양을 신앙의 근거로 삼았다면 위험성은 훨씬 줄어듭니다. 도덕성과 정신수양은 보편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거니까요. 초기 기독교는 오히려 위험한 길을 선택했습니다. 아니 그걸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 아니면 기독교가 존재할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까요. 예수 부활은 무조건 증..

그는 살아나셨다(30)(막16: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막16:6) 예수님의 제자들과 여러 추종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할지 모른다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막아보려도 노력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부활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무언가를 기대했다가 십자가 처형으로 모든 것을 포기한 제자들과 추종자들에게 죽어 매장되었던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특히 여성 제자들에게 그런 일들이 먼저, 그리고 자주 일어났을 겁니다. 서로 다른 상황에서, 다른 방식으로 부활 현현이 경험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제자들이 헛것을 보았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런 경험을 서로 나누..

그는 살아나셨다(29)(막16: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막16:6) 예수 부활이 역사적 사건이라는 말은 그것이 허공에 뜬 것이 아니라 분명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마리아라는 여자의 몸을 통해서 구체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듯이 부활 사건도 역시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는 귀신처럼 혼령으로 부활한 게 아닙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단순히 그리움으로 환생하신 게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몸으로 부활하신 겁니다. 그게 역사적인 사건이라는 말의 일차적 의미입니다. 그는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막 16:6) 그가 몸으로 시간과 공간의 역사 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