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학단상 202

깃들 곳(막 4:32)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막 4:32) 신약학자들의 일부 견해에 따르면 오늘 본문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교회가 비록 작은 공동체로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온 세상 사람들이 그 앞에 모여들었으며, 또한 모여들 것이라고 말입니다. 기독교는 지금 큰 나무와 같습니다. 유럽의 기독교가 아무리 쇄락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가장 중요한 종교이며, 남북 아메리카도 개신교와 가톨릭이 중심 종교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상황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세계적으로 볼 때 기독교가 큰 나무라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도 이미 큰 나무로 자랐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작은 세계 (3)(막 4:3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막 4:31)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을 약간 나이브하게 받아들이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대량 생산과 소비의 악순환 가운데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삶에 대한 경종이겠거니 하고 말입니다.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작은 세계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근원입니다. 상식적인 차원에서 물리의 세계를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원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원소가 이 세상의 근본이라는 게 참으로 신기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신기한 것은 원소가 우주와 비슷한 구조라는 사실입니다. 원소는 핵, 중성자, 전자를 담고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공간입니다. 우주도 대부분은..

작은 세계 (2)(막 4:3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막 4:31) 설교 명망가들의 설교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기독교 신앙과 풍요로운 삶의 일치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어야만 물질적으로도 잘 살게 된다는 사실을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암시적으로 강조합니다. 동남아 국가가 가난한 이유는 불교를 믿기 때문이고, 중동 국가들의 사회가 혼란한 것도 알라를 믿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과거 공산권 국가들이 총체적으로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이유 역시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유물론적 무신론에 빠진 탓이고, 반면에 미국은 기독교 신앙으로 잘산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역사적 사실도 많은 논란거리이지만, 그것은 접어둔다 하더라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목사들이 ..

오병이어 (91)(막 6:43,44)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 (막 6:43,44) 앞에서 저는 오병이어와 만나 사건을 연결해서 설명하면서 ‘은총’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오병이어와 만나 모두 우리의 일상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우리는 왜 그것을 은총이라고 말할까요? 은총이 도대체 무얼까요? 라틴어로 그라티아, 헬라어로 카리스라고 하는 은총은 말 그대로 값없이 받는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값없이 선물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연이라고 말하고 싶겠지요. 그 자연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이런 점에서 자연주의자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 사이에는 작을 수도 있고 클 수도 ..

오병이어 (57)(막 6:42)

'다 배불리 먹고' (막 6:42) 아래는 판넨베르크의 설교 “생명의 밥”의 한 대목입니다. 1974년12월 뮌헨 마르쿠스 교회에서 드린 대학예배의 설교입니다. 생명의 밥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을 배부르게 하고 삶의 조건들을 향상시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돌을 빵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예수님을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구원자로 축하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사탄의 유혹보다 더 나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은 사실상 인간의 위기와 고난에 참여했기 때문에 유혹을 당한 것입니다. 삶의 조건들을 향상시킴으로써, 또한 “세계를 위한 밥”을 통해서 세계의 고난을 제거하라는 유혹 말입니다. 그런 유혹에 빠져버렸다면 예수님은 생명의 굶주림을 영원히 해..

백배의 은총(막 4:20)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막 4:20) 20절 말씀은 8절 말씀의 반복입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무슨 이유로 이 비유를 반복하고 있을까요? 1-8절과 13-20절은 거의 똑같은 내용의 반복입니다. 앞 구절의 내용은 단순한 비유이고 뒤 구절은 그것에 대한 해명이라고 하지만 독자들의 눈에는 그런 차이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기껏 해봐야 ‘씨’가 ‘말씀’으로 바뀐다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몇 단어가 첨가될 뿐입니다. 8절과 20절 말씀도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양쪽 모두 좋은 땅에 떨어져서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결실을 맺었다고 합니다. 씨를 말씀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렇게 긴 구절을 똑같이 반복한다는 것은 조금 이상합니다. 저는..

예수의 명령 (2)(막 2: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막 2:11) 예수님의 두 번째 명령은 “네 상을 들라.”입니다. 그 상은 그가 실려 왔던 들것, 곧 침대입니다. 병이 나았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충분했을 텐데, 이상하게도 예수님은 침대를 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병이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일까요? 그렇지만 우리가 조금 더 섬세한 시각으로 이 말씀을 들여다보는 것도 나름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더구나 ‘큐티’ 공부는 객관적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것보다는 그 말씀을 대하는 사람의 실존적 해석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이렇게 사소하게 보이는 구절을 통해서 어떤 영적인 단서를 발견하는 게 필요합니다. 다시 묻습니다. 예수님은 왜 중풍병자에게 침대를 들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이 말씀은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