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용섭목사 703

임박한 하나님 나라 (눅 10:1-11) / 저용섭 목사

성령강림 후 4주, 2025년 7월 6일 누가복음은 로마 제국의 고위 관료인 데오빌로에게 교회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변증서입니다. 눅 1:1-4절에서 집필 목적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3절)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연작입니다. 집필자가 똑같고 수신자도 같습니다. 사도행전의 서론에 해당하는 행 1:1-11절에는 예수의 부활 및 승천 이후 당시 교회가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8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당시 교회는 선교 공동체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는..

하나님 나라의 긴박성 (눅 9:51-62) / 정용섭 목사

성령강림 후 3주, 2025년 6월 29일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중에 벌어진 어떤 이야기를 오늘 설교 본문인 눅 9:51절 이하가 보도합니다. 북쪽 갈릴리에서 남쪽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먼저 사마리아 지역에 들어가서 예수님이 머물 곳을 찾아보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 일행을 거부했습니다. 이유는 예수 일행의 목적지가 예루살렘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당시 사마리아 지역 사람과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 지역 사람들의 사이가 몹시 좋지 않았습니다. 기분이 상한 제자들이 예수께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말합니다. ‘벼락 맞을 놈들!’이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엘리야 이야기를(왕하 1장) 알고 있었나 ..

“내가 벌하리라!”(사 65:1-9) / 정용섭 목사

성령강림 후 2주, 2025년 6월 22일 자연숭배 오늘 설교 제목은 “내가 벌하리라!”입니다.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는 제목입니다. 우리말 성경 개역 개정>의 사 65:7(b)은 “그들의 품에 보응하리라.”입니다. 이를 공동 번역>은 “내가 톡톡히 … 벌하리라.”라고 번역했습니다. 공동 번역>이 더 자연스럽게 들립니다. 사 65:7절 전체를 공동 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산들 위에서 분향하고 언덕들 위에서 나를 모욕하는 그들의 죄를 조상들의 죄와 겸하여 벌하지 않을 수 없다. 야훼의 말이다. 내가 그들의 소행대로 톡톡히 벌하리라.' 선지자들의 문장에는 ‘여호와의 말씀이다.’라거나 ‘여호와가 말씀하셨다.’라는 표현이 종종 나옵니다. 그래서 그들의 선포 행위를 신탁(神託)이라고 합니다. 선지자들도 인간적..

구원의 능력인 하나님의 사랑 (롬 5:1-5) / 정용섭 목사

성령강림 후 1주 (삼위일체 주일), 2025년 6월 15일 이신칭의 바울은 롬 4장에서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서 짚었습니다. 소위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입니다. 그는 이어지는 5장에서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의 삶에 관해서 말합니다. 1절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는 말을 일상적인 이야기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여기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나가는 배우가 있다고 합시다. 그가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영화는 늘 ‘대박’을 터뜨리기에 그 사람의 출연료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습니다. 비중이 낮은 조..

종의 영 vs 자녀의 영 (롬 8:14-17) / 정용섭 목사

성령강림절, 2025년 6월 8일 오늘 설교 본문이 포함된 롬 8장은 아주 강력한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1절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 정죄함이 없다는 말(no condemnation)은 그 누구에게도, 그 어떤 세력에게도 책잡힐 일 없이 당당하다는 뜻입니다. 이런 성경의 진술이 옳은가요? 세속 권력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오늘날에도 현실성이 있을까요? 일상은 여지없이 무너지는데도 죽어 천국에 간다는 생각에 도취하여 교회 생활에만 매달리는 이단 종파의 신도들에게서 보듯이 자기 망상은 아닐까요? 대표적인 이단의 하나였던 다미선교회는 세계 종말인 1992년 10월28일 자기 교파에 속한 사람들만 하늘로 ‘휴거’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 날짜에 세..

예수께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 (요 17:20-26) / 정용섭 목사

부활절 7주, 2025년 6월 1일 요한복음 17장은 복음서 중에서 가장 특이한 형식과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께 바친 기도입니다. 공관복음서에는 예수께서 하나님께 기도하셨다는 짤막한 보도가 나오기는 하나 요한복음 17장처럼 긴 내용의 기도문은 없습니다. 이 대목에 나오는 모든 문장이 문자적으로 일일이 예수께서 기도한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공동체의 신앙 고백이 겹친 것이라고 보는 게 맞습니다. 말하자면 요 17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하게 경험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이고 기도이며, 진술이고 찬양입니다. 지난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대목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깊이와 신비와 진수를 맛보았습니다. 우리 함께 그 안으로 들어가 보실까요? 아버지와 ..

바울의 거룩한 비전 (행 16:9-15) / 정용섭 목사

부활절 6주, 2025년 5월 25일 우리는 오늘 대략 2천 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겠습니다. 장소는 에게해(海)를 사이에 둔 지금의 튀르키예와 그리스입니다. 트로이 목마로 유명한 트로이 전쟁(기원전 12-13세기) 이야기가 바로 그 지역을 배경으로 합니다. 서아시아 아나톨리아 반도에 있는 고대 도시 트로이 왕자가 그리스 스파르타 왕의 아내를 빼앗은 일이 빌미가 되어서 벌어진 전쟁입니다. 대략 기원전 8세기에 살았던 그리스의 대문호 호메로스는 그 전쟁을 배경으로 「일리아스」와「오디세이아」라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일리아스」는 전쟁 10년 중에서 마지막 50일에 벌어진 이야기이고, 「오디세이아」는 전쟁에서 승리한 오디세우스가 자기 나라로 귀환하면서 겪은 파노라마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 작품들은 지금..

여호와를 찬양하라 ‘할렐루야’!(시 148:1-14) / 정용섭 목사

부활절 5주, 2025년 5월 18일 오늘 설교 본문인 시 148편은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납니다. 이런 문장 구조의 시가 전체 시편에 종종 나옵니다. 할렐루야는 찬양하라는 뜻의 ‘할렐루’와 여호와를 가리키는 야웨의 축약형 ‘야’의 결합니다. 시편에는 찬양 시만이 아니라 자기 운명을 버티기 힘들어서 탄원하는 시도 있습니다. 시 22:1절을 들어보십시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쏟아내신 절규가 바로 이 구절입니다. 너무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원수를 저주하는 내용도 나옵니다. 시 58:8절을 들어보십시오.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만삭되지 못하여 출생..

예수의 아버지 (요 10:22-30) / 정용섭 목사

부활절 4주, 2025년 5월 11일 “예수는 누군가?” 예수가 누구냐, 하는 질문은 복음서 전체를 관통합니다. 예수 출생 전승에는 동방에서 온 박사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마 2:2)으로 나신 이를 경배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재판받는 과정에는 빌라도 이야기가 나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마 27:11)라고 묻습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가 역사에 등장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요 10:22-30)도 이런 질문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솔로몬 행각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둘러쌓고 24절에서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

예수 '따름'이 답이다! (요 21:15-19) / 정용섭 목사

부활절 3주, 2025년 5월 4일 교황 이야기 지난 2025년 4월21일에 세상을 뜬 프란치스코 교황은 로마가톨릭교회의 266대 교황입니다. 로마가톨릭은 베드로를 제1대 교황이라고 내세웁니다. 베드로가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교황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았으니까 1대 교황 운운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그렇게 해석한다는 뜻이겠지요. 역사적으로 본다면 베드로보다는 예수의 동생인 야고보가 최초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에서 실질적인 지도자 역할을 감당했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어쨌든지 제가 보기에 베드로가 1대 교황이라는 로마가톨릭의 해석은 두 군데 성경 구절에 근거합니다. 하나는 마 16:16절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