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5주, 2025년 5월 18일
오늘 설교 본문인 시 148편은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납니다. 이런 문장 구조의 시가 전체 시편에 종종 나옵니다. 할렐루야는 찬양하라는 뜻의 ‘할렐루’와 여호와를 가리키는 야웨의 축약형 ‘야’의 결합니다. 시편에는 찬양 시만이 아니라 자기 운명을 버티기 힘들어서 탄원하는 시도 있습니다. 시 22:1절을 들어보십시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쏟아내신 절규가 바로 이 구절입니다. 너무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원수를 저주하는 내용도 나옵니다. 시 58:8절을 들어보십시오.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만삭되지 못하여 출생한 아이가 햇빛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 시편 마지막 단락인 146편부터 150편까지 할렐루야 찬양 시가 집중적으로 나옵니다.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이 하나님 신앙의 핵심이라는 뜻이겠지요. 이게 실제로 말이 되나요? 아무리 형편이 어렵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무조건 여호와를 찬양해야 하고, 여호와를 찬양하면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나요?
우리 주변에는 고단하게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 고단한 삶의 내용을 일일이 거론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정도입니다. 시한부 말기암 환자는 수술과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버텨내기 힘든 육체적 고통을 겪습니다. 심한 장애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습니다. 결혼 생활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부부관계가 힘든 이들도 있습니다. 황혼 이혼도 있다고 하니까요. 지금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 굶주림 등으로 고통당하는 아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성 소수자로 사는 이들은 늘 모욕감을 버텨내야 합니다. 이들을 위한 차별금지법을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개신교회의 대중집회 앞에서 그들이 느꼈을 절망감과 분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번 대선에 나온 유력 후보자들은 모두 차별금지법 제정을 각각의 이유로 반대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 법의 통과와 페미니즘 정책을 낸 후보는 원내에 들어가지도 못한 소수정당 후보뿐입니다. 정치라는 게 잘못이 없는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고 소외당하지 않게 하는 행위인데, 대한민국의 정치는 대중적인 표만 계산하는 방식으로 작동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 대한민국만이 아니라 그게 세계 전체의 현실이 그러니 어쩌냐, 하는 말들을 합니다. 차별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일단 권력을 잡아야 하는 거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부의 분배도 일단 전체 파이를 키워야 가능하다는 논리와 다를 게 없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악담을 퍼붓고 싶은 상황에서도 ‘할렐루야!’를 노래하는 저 시편 기자들의 생각이 무엇인지가 저는 무척 궁금합니다. 현실에서는 너무 동떨어진 노래로 들리니까요.
할렐루야!
‘할렐루야’라는 단어를 들으면 한국교회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경배와 찬양’ 유의 집회가 먼저 떠오릅니다. 전자 악기와 타악기가 그런 집회에서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합니다. 집회 리더는 하나님께 영광, 할렐루야 등등, 짤막하면서 강렬한 구호로 분위기를 부추깁니다. 제가 청년 시절 이런 식의 부흥회가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열렸습니다. 찬송가를 빠른 템포로 손뼉을 치면서 반복해서 부릅니다. 그 내용을 몰라도 이런 분위기에서는 감정이 고조될 수밖에 없습니다. 감정적 행동은 사람의 구성 요소이기에 하나님 경험이 강렬할 때 그런 행동이 나올 수는 있습니다. 삼하 6:12절 이하를 따르면 다윗은 법궤 행렬을 보고 춤을 추었습니다. 그의 아내이자 사울 왕의 딸인 미갈이 이 장면을 보고 다윗을 업신여겼다고 합니다. 격하게 감동하면 손뼉 치고 춤을 출 수 있으나 신자들의 감정을 의도적으로 열광에 빠지도록 유도하는 건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찬양은 찬양의 대상에게 영혼을 온전히 집중하는 행위입니다. 이렇게 비유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산악인이 에베레스트 등반에 나섰습니다. 그 등반 행위는 자기 목숨을 담보로 삼습니다. 그는 거친 호흡을 몰아쉬면서, 그리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체력을 끌어올리면서 정상을 향해서 한 걸음씩 발을 옮깁니다. 그 순간에 그는 에베레스트를 오른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에베레스트산이 자기를 받아주기를 기도하면서 자기 운명을 전적으로 산에 맡깁니다. 산과 자기가 일체가 되는 경험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정상에 올랐을 때 자기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뼈저리게 절감합니다. 그게 곧 ‘여호와를 찬양하라!’라는 뜻의 할렐루야가 가리키는 영적인 경험과 비슷합니다. 여호와 외에는 아무것도,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세력도 그에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인간적인 명예와 자존심과 오락과 즐거움과 욕망도 그에게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자신이 처한 어려운 상황이나 원수에게 당한 억울한 일도 사소한 것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걱정도 사라졌습니다. 자기에 대한 모든 염려가 사라졌습니다.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기쁨 충만의 경험입니다. 이를 아는 오늘 본문의 시인은 ‘할렐루야!’를 노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현대인은 여호와를 찬양하기보다는 자기를 찬양하는 것에서 삶의 의미와 만족감을 얻으려고 애씁니다. 할렐루‘야’가 아니라 할렐루‘나’를 노래합니다. 자기 삶을 건강하게 긍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기를 숭배하는 겁니다. 일종의 공주병, 왕자병이라 할 나르시시즘입니다. 이런 성향은 누구에게나 약간씩은 있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을 자기 뜻에 따르게 하려고 애씁니다. 연인들도 ‘밀당’을 합니다. 그걸 사랑이라고 본인들은 생각하겠으나 실제로는 집착에 가깝습니다. 사람이든지 재물이든지 취미든지, 그 어떤 것을 통해서도 사람의 내면이 채워지지 않으니까 더 강렬하게 집착합니다. 악순환입니다. 현대인이 옛날과 비교하면 모두 공주와 왕자처럼 좋은 환경에서 사는데도 별로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자기 찬양, 자기 사랑, 자기 연민, 자기 집착을 죄라고 부릅니다. 죄는 그럴듯하게 느껴지나 결국에는 우리의 삶을 파괴하기에 오늘 본문은 반복해서 자기 찬양이 아니라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외치는 겁니다.
만물의 찬양
본문에는 누가 찬양해야 하는지가 세 단락으로 나옵니다. 첫 단락은 1-6절입니다. 하늘과 높은 데 속한 것들이 거론됩니다. 천사들과 하늘의 군대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능력들입니다. 해, 달, 별도 여호와를 찬양해야 합니다. 고대 종교들은 해를 신으로 모시기도 했고, 달과 별을 신으로 모시기도 했습니다. 조로아스터교는 불을 섬기는 종교였습니다. 자연 현상이 매우 신비롭고 강력하기에 고대인들의 자연 숭배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것을 철저하게 상대화하는 구약 성경은 탈(脫)자연숭배 신앙이라고 봐도 됩니다.
4절에서 시인은 ‘하늘의 하늘’도 여호와를 찬양하고,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노래합니다. 당시 우주관을 배경으로 하는 표현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늘 위에 물이 있다고 생각했고, 하늘이 겹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의 손이 닿지 못하는 그런 세계마저 모두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겁니다. 5절이 말하듯이 우리에게 다 밝혀지지 않은 그것들까지 여호와께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아무리 엄청난 힘이 있는 듯이 보여도, 요즘으로 말하면 인공지능이 무시무시한 능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피조물이기에 창조주이신 여호와를 찬양해야 한다는 겁니다.
둘째 단락은 7-10절입니다. 첫 단락에서는 하늘과 높은 곳이 나왔는데 여기서는 땅 아래의 막강한 세력이 나옵니다. 용들과 바다와 불과 우박과 눈과 안개와 광풍이 나옵니다. 사람이 감당하기는 너무나 강력한 현상들입니다. 이런 세력은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시인에 의하면 그것들도 모두 하나님 찬양해야 합니다. 산들과 작은 산과 과수와 백향목, 그리고 짐승과 가축과 기는 것과 새들도 다 여호와를 찬양해야 합니다. 그것들도 역시 지음을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산도 시간이 지나면 평지가 되거나 바다 밑으로 가라앉습니다. 바다도 시간이 지나면 평지가 되고 산이 됩니다. 지구에 있는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현대 물리학은 지구의 나이가 45억 년이라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비하면 엄청나게 긴 세월이나 그 세월도 유한합니다. 그게 바로 피조 세계의 한계입니다. 시인은 바로 그 사실을 뚫어본 것입니다. 그런 피조물들은 모두 창조주이신 여호와를 찬양해야 합니다.
셋째 단락은 11-14절입니다. 여기에는 이제 사람이 나옵니다. 왕들과 백성들과 고관들과 재판관들, 그리고 총각과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이 언급됩니다. 누구도 예외없이 코로 숨 쉬는 모든 사람은 여호와를 찬양해야 합니다. 기고만장 잘난 듯이 고개를 쳐들어도 죽음의 순간에 그는 바닥으로 떨어져서 여호와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13절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
여호와의 이름이 ‘홀로’ 높다거나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에 뛰어나다는 말을 일상에서 실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왕과 고관대작과 재판관들의 이름이 높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래서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되어서 이름을 높이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이름을 연호합니다. 겉으로는 나라와 국민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권력과 명예를, 즉 자기 이름을 높이려는 게 아닐까요? 자신들의 업무가 실제로 나라와 국민을 위하는 것이라면 연봉을 크게 줄여도 받아들일 겁니다. 그들이 교사 수준의 연봉만 받는다면 나라 재정을 크게 줄일 수 있겠지요. 우리나라 정당들이 그런 정책을 왜 내지 않는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신들의 정치 활동이 자신들의 미사여구와는 달리 나라와 국민을 위하는 게 아니라는 증거 아닐까요?
‘홀로’ 높으신 여호와
여호와의 이름이 홀로 높다는 말은 하나님만이 생명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대통령이나 장관이나 판사가 생명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를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주인은, 그리고 세상 만물의 주인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실제로 그런가요? 실제 삶에서 우리는 세상 권력자들에 의해서 휘둘릴 때가 많기는 합니다. 대표적으로 지금 세계를 혼란하게 만드는 트럼프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일상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그들이 손을 대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그 어떤 권력자도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각각 다를 겁니다. 아주 일반적인 저의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금요일 오후에 비가 왔습니다. 영천에 나갈 일이 있어서 모종 가게에 들러, 두 주일 전에 모종을 심다가 아직 남은 텃밭에 심을 모종을 사 왔습니다. 처음에는 부슬비가 내리더니 조금 지나면서 빗방울이 굵어졌습니다. 밀짚모자를 쓰고 호미와 모종삽을 들고 애플 토마토와 방울토마토와 옥수수 모종을 남은 텃밭에 심었습니다. 이어서 배양토에서 자라는 해바라기와 백일홍과 양귀비와 한련화 등등의 싹도 꽃밭에 옮겨 심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라서 어스름이 조금 빨리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구름과 비와 어스름과 모종과 새싹과 흙과 새와 하나가 된 듯한 그 순간은 저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 세상은 저에게서 이런 평화를 빼앗지도 못하고 주지도 못합니다. 세상 권력은 이런 부분에서 무능력합니다. 오직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만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경험은 너무 평범하거나 시시해서, 그리고 너무 일반적이어서 별로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여기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우리 삶에서 무엇이 중한지 우리가 분간하면서 살고 있을까요? 왕과 고관과 재판장의 위세에 휘둘리는 걸 삶이라고 여기는 게 아닐까요?
저는 저의 일상에서 세상 권력과 명예가 빼앗지 못하는 경험을 최소한 백 가지는 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여러분도 다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서 훼손되기도 하니까 그만두겠습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빼앗기지 않는 어떤 순간만은 말씀드려야겠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분의 말씀과 그분에 관한 말씀을 듣고 깨닫는 순간입니다. 예를 들어서 요 1:14절 말씀이 저의 영혼을 가득 채우는 순간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해지는 그 순간은 세상의 그 어떤 권력도 빼앗지 못합니다. 영악하고 무도한 자본주의도 빼앗지 못합니다. 말씀의 깊이로 들어가는 순간에 그런 세력들은 시시해집니다. 그래서 수도승들은 ‘셀’이라 부르는 작은 방에서 단조롭게 살면서도 절정의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다는 말의 깊이를 경험하지는 못합니다. 서로 자기가 더 높다고, 그러니 내가 당신들을 지배해야 한다고 고함치는 세상에 파묻혀서 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찬양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의 선택받은 자들입니다. 이를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인 14절이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가 그의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그는 모든 성도 곧 그를 가까이하는 백성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 받을 이시로다 할렐루야!'
백성의 뿔을 높이셨다는 말은 여호와의 백성에게 힘과 영광을 주었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힘과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과 영광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고유한 존귀가 있습니다. 그는 세상의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부러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들과 똑같이 악한 방식으로 맞상대하지 않습니다. 선한 싸움만 할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일상의 삶을 기쁨 충만하게 살아갑니다. 부자로 건강하게 남이 부러워할 수준으로 고급스럽게 산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쁘게 사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않고 사랑받지 않아도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풍성한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능력입니다. 죽음과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성령 안’에서 궁극적인 희망을 노래하는 삶입니다.
그게 가능하냐고요? 뜬구름 잡는 소리 아니냐고요? 매일 조심스럽고 신경이 과민해지고 남과 비교하면서 사는 게 실제 인생이 아니냐고요? 한 번뿐인 인생인데, 권력을 잡고 큰소리치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요? 그런 잘난 맛에 살고 싶은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살라고 내버려두고, 참된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인 우리 그리스도인만이라도 오늘 시편 기자의 외침처럼 여호와를 찬양합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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