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4주, 2025년 5월 11일
“예수는 누군가?”
예수가 누구냐, 하는 질문은 복음서 전체를 관통합니다. 예수 출생 전승에는 동방에서 온 박사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마 2:2)으로 나신 이를 경배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재판받는 과정에는 빌라도 이야기가 나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마 27:11)라고 묻습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가 역사에 등장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요 10:22-30)도 이런 질문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솔로몬 행각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둘러쌓고 24절에서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아 대망이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이 질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대 민족은 그리스도, 즉 메시아를 늘 기다렸습니다. 기원전 6세기에 있었던 바벨론 유수 사건 이후에 그런 기다림이 더 절실했습니다. 그들은 그 이후로 이어지는 페르시아 제국과 로마 제국 등등, 주변의 강력한 제국에 의해서 늘 생존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살아계심과 권능을 믿었으나 그런 믿음만으로는 세상의 악에 대항할 수 없었습니다. 왜 이 세상은 이렇게 부조리한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나, 하나님이 전능하신 존재가 맞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실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게 곧 유대 민족의 메시아 대망입니다. 그런 믿음과 희망을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가 신탁으로 선포하고 기록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선지자는 사 9:6절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매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니라.” 예수를 둘러싼 유대인들이 던진 질문의 요지는 선지자들이 신탁으로 예고한 메시아가 당신인지 아닌지를 밝히라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갈망
고대 유대인들의 이런 영적인 절박감은 오늘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다가옵니다. 이 세상이 근본에서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보십시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은 수년째 이어지고, 이스라엘과 가자지구 하마스 정권과의 전쟁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며, 인도와 파키스탄도 일촉즉발의 위기에 놓였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장애인이 되고 삶이 망가졌습니다. 이런 국제간의 분쟁과 전쟁을 어떤 나라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합니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도 괜찮은가요?
우리나라도 거의 내전 상황처럼 돌아갑니다. 이 조그만 한반도의 남북 분단 상태가 80년간 이어졌습니다. 그냥 분단 상태가 아니라 서로를 주적으로 여깁니다. 우리 남한 사회에서 벌어지는 정치, 경제, 세대 간 갈등도 심해지면 심해졌지 줄어들지 않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자기와 가족과 자기 교회만 평안하면 아무렇지 않은 듯이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니까요. 메시아가 오시기를, 구원의 순간을, 이 세상이 근본에서 변화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행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죽었으면 몰라도, 살아있다면 말입니다. 한국교회는 자기 연민에 떨어져서 세상의 구원을 나 몰라라 외면하는 건 아닐까요?
국제 분쟁이나 사회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개인의 실존에서도 메시아 대망은 아주 시급합니다. 이는 곧 자기 구원에 관한 문제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은 구원에 가까이 가고 있습니까? 영혼의 풍요로움이 느껴지시나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여러분의 영혼을 가득 채우고 있나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사는 현대인들은 이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습니다. 각자도생의 원리 안에 갇혔기 때문입니다.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즐기라고 세상은 우리를 다그칩니다. 며칠 전에 요즘 젊은이들의 생각이 다음과 같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아기를 낳지 않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자기가 낳은 아이가 결국 세상의 노예로 전락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얼마나 정확한 말인지 모르겠으나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실존의 불안이 젊은이들을 사로잡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이런 사회 현상을 마주칠 때마다 그리스 신화에 ‘에리직톤’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에릭직톤은 아무리 먹어도 허기를 느끼는 저주를 받은 인물입니다. 먹느라고 재산도 탕진하고 외동딸도 팔아넘기고, 자기 몸까지 다 뜯어먹었습니다. 이빨만 남아서 딱딱거리다가 최후를 맞습니다. 온통 성장과 경쟁과 돈에만 목숨을 거는 듯이 살아가는 대한민국 사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신화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구원에 이를 수 있나요? 메시아를 갈망하고 있나요?
“내 양”
‘당신이 메시아인지 아닌지를 밝히라.’라는 질문을 받은 예수님의 대답이 25절부터 나옵니다. 그 대답은 바로 요한복음 공동체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25절과 26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직접 말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는 그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그걸 유대 민중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걸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들이 원하는 메시아 모습이, 즉 자기들의 기대치에 맞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에게 그리스도다운 놀라운 표적을 원했습니다. 마 12:38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본래 유대인은 표적을 찾는다고 바울도 고전 1:22절에서 짚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면 강력한 초능력으로 로마를 몰아내고 유대 민족이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게 해야만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에게는 엉뚱한 말로 들렸습니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꾸로 ‘내 양’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믿고 따릅니다. 이런 표현은 궁극적인 것에 대한 가르침을 이해하거나 믿는다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예를 서편제 소리를 배우는 학생이 있다고 합시다. 스승이 소리를 내면 한 대목씩 따라서 불러야 합니다. 학생은 그 소리를 따라서 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자기는 비슷하게 소리를 냈다고 생각하겠으나 선생이 볼 때는 아직 멀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따른다는 것은 말처럼 저절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냥 흉내를 낼 수는 있으나 제자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창을 배우다가 포기하는 학생들이 많듯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다가 포기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대충 그리스도인 흉내를 내면서 삽니다. 믿음의 연륜이 길어도, 목사나 선교사나 신학자로 살았어도 예수께서 ‘내 양’이라고 부른 그런 사람이 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소리를 배우는 사람이 모두 명창이 된다는 보장은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 양’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무엇으로 그걸 확인할 수 있을까요? 28절에서 예수께서는 ‘내 양’에게 영생(eternal life)을 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영생을 준다는 말씀은 구원받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 구원은 돈으로 사거나 인격이나 선행으로 보장받는 게 아닙니다.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의 생명을 손에 넣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28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빼앗을 자가 없는 그게 무엇인지 느껴지시나요? 가난하거나 건강하지 못하거나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자리에 있더라도 빼앗기지 않는 그 영생 말입니다. 영생이라는 말이 멀게 들리면 영혼의 평화로 바꿔보십시오. 현대인은 일분일초도 평화를 느끼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내 아버지”
‘내 양’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는 의미의 문장이 29절에서 다시 반복됩니다.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가 없느니라.'
앞에서 ‘내 양’이라는 표현이 나온 것처럼 여기서는 ‘내 아버지’(ὁ Πατήρ μου)라는 표현이 나왔습니다. 구약에도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이 나오기는 하나 ‘내 아버지’라는 표현은 찾기 힘듭니다. 예수와 하나님과의 특수한 관계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예수께서 ‘내 아버지’라고 부른 하나님은 만물보다 크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만물로 구성된 이 세상의 작동 방식으로 하나님을 규정하거나 처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부분의 합계 그 이상이라는 철학 개념과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그 어떤 세력도,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께 결속된 사람의 삶을 파멸시킬 수 없습니다.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라는 말씀과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라는 말씀의 깊이로 들어간 사람은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실패와 성공을 삶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여깁니다. 실패할까 노심초사합니다. 사업 실패, 정치 실패, 연애 실패, 가정 실패를 두려워합니다. 거꾸로 그런 것의 성공을 자랑거리로 여깁니다. 개인의 차이가 있으나 온갖 방법으로 성공을 거두려고 하고, 실패를 피하려고 합니다. 이런 노력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가능한 한 성공하면 좋습니다. 성공을 자기만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사회적으로 공헌하는 기회로 삼는다면 더 좋습니다. 그런데 다음의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공해도 사람은 여전히 불완전하고 불안하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으로 영생을 얻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돈이나 권력을, 즉 만물을 자기 손에 넣는다고 하더라도, 대통령이 되더라도 똑같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만물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의 모든 삶을 마지막 순간에 맞춰놓고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걸 제 삶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겁니다.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일희일비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성취해도 죽을 때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삶이 무의미해지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많은 걸 잃었어도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께 온전히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이 곧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지막 순간을 맞는다는 게 말처럼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소리꾼이 매일 소리 연습에 용맹정진하듯이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른 예수님의 제자로서 수행하듯이 사는 게 최선입니다.
하나님과 하나 됨
오늘 설교 본문 마지막 절인 30절에서 예수님은 엄청난 말씀을 당시 유대인들에게 선포하셨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오해를 살만합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과 하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31절에 따르면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서 예수를 치려고 했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들의 귀에 예수님의 이런 발언은 신성모독으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일반 사람들은 물론이고 유대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은 똑같이 이런 발언을 유일무이한 존재이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여기서 아버지와 하나라는 표현은 일종의 문학적 메타포입니다. 메타포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말은 실제로 하나님과 똑같다는 뜻이 아니라 만물보다 크신 하나님께 예수 당신이 온전히 받아들여졌다는 뜻입니다. 물에 소금이 녹아서 소금물이 되듯이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고,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갔다고 알려진 모세도 예수님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 수 없을 정도로 예수님은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그 사실을 요한복음 14장은 이렇게 전합니다. 도마가 예수께서 가시는 길을 알고 싶다고 말합니다. 궁극의 길이요, 삶의 길이요, 하나님께 이르는 길 말입니다. 예수께서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다른 제자인 빌립이 그 아버지를 속 시원하게 보여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합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제자들은 ‘내 아버지’와 하나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들도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 2: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고백으로 삽니다. 소리꾼은 누가 박수를 치든 않든 상관없이 소리에만 집중해서 살아가듯이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으신가요? 하나님의 참된 평화와 안식과 자유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고 싶으신가요? 그런 거룩한 갈망이 있으신가요? 제가 여러분에게 드릴 대답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만물보다 크신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신 예수께 더 가까이 가십시오.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하나님의 생명 충만한 세계가 여러분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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