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39738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교훈(삼하18:19-33) / 리민수 목사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교훈(삼하18:19-33) 본문은 다윗이 전쟁이 승리의 보고로 인해 큰 기쁨을 얻지만, 압살롬의 죽음에 대한 보고를 받고 깊은 비탄에 빠지는 장면이다. 비록 압살롬이 자신에 대해 반인륜적인 반역 행위를 했다 할지라도 어쩔 수 없는 아들이었기에 아버지로서 아들이 죽음을 놓고 슬픔을 억제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보다 더 근본적으로 다윗이 슬픔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압살롬의 반역과 죽음이라는 비극이 자신의 범죄로 인한 대가라는 사실과, 그로 인해 운명 공동체인 이스라엘 내에 피비린내 나는 분열과 싸움이 있었다는 것에 대한 자책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윗의 자책은 곧 우리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큰 교훈이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히1:3) / 이금환 목사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브리서1:3) "이 모든 날 마지막" 때를 사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만유의 상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과 함께 모든 세계를 지으신 예수 그리스도(히1:2)는 우리를 위하여 엄청난 일을 행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나타내 주셨고,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을 친히 보여주셨으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 통치하심을 보여주셨으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모든 죄를 사하시며, 깨끗하게 하시는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높은..

어린양을 따르는 사람들(7)-빌라델비아 교회 (계 3:7~13) / 이재훈 목사

빌라델비아 교회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힘이 약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결코 약하지 않고, 귀하게 쓰임 받는 교회로 여기시며 칭찬하셨습니다. 빌라델비아는 7개 도시 중에서 가장 신흥 도시입니다. 주전 2세기 중반에 세워졌습니다. 사데에서 동쪽으로 약 48km 떨어진 곳에 위치했습니다. 여러 강과 산이 겹쳐져 비옥한 고원에 위치했습니다. 지리적으로 사데와 특성이 비슷했는데, 그중 하나가 지진이 많이 발생했습니다. 언제 지진이 일어날지 몰라 매우 불안정한 생활을 했습니다. 빌라델비아는 지리적으로 사데 교회와, 영적 상황은 서머나 교회와 비슷했습니다. 서머나 교회에 있었던 고난 중 하나가 유대인 공동체에 의해 가해진 핍박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로마 당국이 핍박하기 전에 유대인 회당이 먼저 핍박했습니다...

팔복(15)- 절대 생명 / 정용섭 목사

종말에 완성될 생명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완전하고 절대적인 생명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질문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답을 찾기도 힘들다. 우리가 지금 상대적인 생명 세계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절대적인 생명을 생각해낼 수가 없다. 기껏 해봐야 배고프지 않고, 병들지 않고, 싸움이 없고, 죽지 않는 생명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쉽게 생각하고 있는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면 생명이 완성될까?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배고프지 않으면 배부름도 모른다. 배부름을 모르면 행복도 모른다. 병들지 않으면 건강한 게 무엇인지도 알 수 없다. 죽지 않으면 살아있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의 상상력을 아무리 발휘해도 절대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 이는 곧 하나..

팔복(14) / 정용섭 목사

하늘나라를 기다린다는 말을 냉소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배부르게 먹고 존경받는 삶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 신자이면서도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조금 좋은 뜻으로 지금 여기서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게 최선이지 하늘나라가 오는 걸 기다리는 게 뭐 중요하냐는 주장들이다. 그래서 이런 기다림의 신앙을 무책임한 것으로, 비현실적인 것으로 여긴다. 과연 그런가?기독교가 말하는 기다림의 영성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막연한 내세를 기다리는 게 아니다. 기다린다는 말은 생명이 종말에 완성된다는 의미이다. 지금 우리의 생명은 완성된 게 아니다. 세상도 완성된 게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도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우리 자신의 생명과 세상을 보라. 모든 것이 유한하다...

팔복(13) / 정용섭 목사

하늘나라가 가난한 자의 것이라는 말은 나중에 죽어서 하늘나라에 간다는 뜻일까? 즉 내세 천국을 가리키나? 그러니 지금은 인생이 고달파도 참고 지내라는 말일까? 이렇게 되면 그야말로 복음이 ‘민중의 아편’이 되고 만다. 빈부격차의 문제도 그냥 내버려두어야 한다. 경제정의는 무의미한 구호에 머물고 만다. 이건 오해다.이 문장을 좀더 깊이 이해하려면 하늘나라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야 한다. 하늘(하나님) 나라는 질적으로 새로운 세상이다. 우리는 여기서 상대적인 것에 묶여서 산다. 다른 사람보다 좀더 돈이 많고 좀더 건강하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것으로 만족해한다. 요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체제는 이런 삶의 방식으로 더 강화하고 있다. 기독교인들도 하늘나라를 복지가 최상으로 보장된 세상으로 여긴..

팔복(12) / 정용섭 목사

가난한 자들이 왜 복 있는 자들인가? 본문이 답한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죽어서 천당에 간다는 말이구나, 하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런 생각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자신에게 삶의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의 것에 자신의 영혼을 걸어두지 않는다. 자신에게 능력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생명을 성취하려고 애를 쓴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을 세상의 것에 걸어둔다. 인생이 흘러가면서 이들의 영혼이 어떤 상태로 들어가는지를 보라. 세상의 것에 자기 영혼을 걸어두는 사람은 세상의 것이 잠정적이고 무상하다는 사실 앞에서 절망한다.아마 이런 말을 실감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부자들은 모두 재미있게 사는 것 같다고 여길 것이다. 사회..

팔복(11) / 정용섭 목사

누가복음의 ‘가난한 자’와 마태복음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다르게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같은 이들을 가리킨다. 가난은 삶의 능력을 약화시킨다. 팔복이 선포되던 2천 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고아, 과부, 종들은 가난한 자를 대표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나라를 잃고 다른 나라에 망명 온 이들이나 빌붙어 사는 이들도 가난한 자들이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삶의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노력해서 부자가 될 수 있는 길도 막혀 있었다. 그들은 세상의 완전한 변혁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심령이 가난한 자도 역시 자기에게 생명의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비록 경제적인 가난에서 벗어나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경제적인 능력이 자기를 구원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가난한 자다.여기서 삶의 능력이 자신에게 없..

팔복(10) / 정용섭 목사

마태복음 기자가 전하는 팔복의 첫 항목은 이렇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여기서 심령은 헬라어 프뉴마다. 프뉴마는 히브리어 루아흐와 비슷한 개념이다. 그것은 영, 내적인 생명, 바람, 숨이라는 뜻이다. 종교적인 깊이가 가장 깊었던 민족인 히브리인들과 철학적인 깊이가 가장 깊었던 민족인 헬라인들이 세상을 비슷하게 보았다는 증거다. 지금 우리는 그들의 생각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이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니고, 우리가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다 부분적으로만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대인들의 언어 세계를 공부해야 한다. 이를 통해서 부분적인 생각을 관통하는 진리에 열린 태도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프뉴마는 낱말풀이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것은 개념이다..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러 왔노라.(눅 5:27-39) / 신동식 목사

중풍병이 들린 환자를 치유한 후에 예수님은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의 집에서 벌어진 잔치에 참여합니다. 당시에 세리는 죄인으로 취급받았습니다. 로마 정부를 위하여 일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비방을 받았습니다.이러한 태도에 대하여 예수님은 아주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자신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케하러 왔다고 말씀합니다. 죄인을 부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회개케 함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고백처럼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도 복음이 되는 말씀입니다.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또 질문을 합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은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는데 당신의 제자는 먹고 마신다고 말합니다.예수님은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