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창우목사 106

[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특별한 때를 위한 강화(5) 회개 / 회개 통해 죄를 더욱 멀리 볼수록, 하나님께 기쁨 된다

[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특별한 때를 위한 강화(5) 회개 회개 통해 죄를 더욱 멀리 볼수록, 하나님께 기쁨 된다 회개는 조바심과 구별되어야 한다. 지난 시간에 후회와 회개는 11시에 일어난다고 말한 바 있다. 11시에 일어나지 않는 회개는 참다운 회개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 얼마나 진지한 회개가 부족한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아마 회개라 부르는 것이 회개라기보다 조바심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조바심은 아무리 오랫동안 분노한다 해도, 그래서 그 마음이 아무리 어두워진다 해도, 결코 회개가 될 수 없다. 그 슬픔이 아무리 엉엉 울며 대소동을 벌인다 해도, 회개의 슬픔이 될 수 없다. 그 눈물은 비가 없는 구름처럼, 잠깐의 소낙비처럼 유익한 결실이 부족하다. 반면, 사람이 더 무거운 죄를 지었지만 개과천선..

[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특별한 때를 위한 강화(5) 11시 / 회개와 후회는 사람 속 영원에 속해 있다

[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특별한 때를 위한 강화(5) 11시 회개와 후회는 사람 속 영원에 속해 있다 두 명의 안내자는 사람을 일찍 그리고 늦게 부른다. 나그네가 길을 걸을 때 그가 올바른 길을 걷는지 확인하기 위해 앞과 뒤를 돌아보듯, 나그네 그리스도인은 진리의 길을 걷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앞과 뒤를 돌아보아야 한다. 바로 그것이 후회와 회개다. 후회는 일찍 뒤에서 부르고 회개는 앞에서 늦게 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후회가 사람을 부를 때, 후회는 언제나 늦다. 죄의 고백 가운데 하나님을 구함으로써 다시 길을 찾는 부름은 언제나 11시다(마 20:6). 당신이 젊었든 늙었든, 많이 범죄했든 조금 범죄했든, 법을 많이 위반했든 많은 일을 방치했든, 죄책감은 이 모든 것들을 ..

[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특별한 때를 위한 강화(4) 후회의 때 / 인생에 있어 ‘후회’는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특별한 때를 위한 강화(4) 후회의 때 인생에 있어 ‘후회’는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인생에서 후회는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우리는 가끔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혹은 후회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한다(고후 7:8)”고 말한다. 사람은 인생을 살다 보면 후회할 일이 생긴다. 후회는 과거와 현재와의 관계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전도서는 ‘허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후회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특별한 때를 위한 강화(3) 영원의 때 / 회개하기에 지나치게 늦은 때도, 지나치게 이른 때도 없다

[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특별한 때를 위한 강화(3) 영원의 때 회개하기에 지나치게 늦은 때도, 지나치게 이른 때도 없다 우리는 지난 시간 전도서 3장에 나오는 ‘때’에 대하여 살핀 바 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다(전 3:1). 하지만 허무한 인생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전도서 저자는 솔로몬으로 알려져 있다. 전도자는 1장부터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선포한다.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누려본 자의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인생의 ‘허무’를 말하려는 것인가? 이것을 다 늙은 ‘노인의 지혜’로 읽는다면, 그렇다. 하지만 성서는 노인의 지혜가 아니라, 영원의 지혜다. 따라서 노인이 말한 것처럼 읽을 수 없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가 다시 온다. ..

[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특별한 때를 위한 강화(2) 영원의 지혜 /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영원의 지혜만이 덕을 세운다

[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특별한 때를 위한 강화(2) 영원의 지혜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영원의 지혜만이 덕을 세운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고 솔로몬은 말한다(전 3:1). 이것은 경험이 과거에 대하여, 지나간 일에 대하여 말하는 방식이다. 삶을 다 살고 그의 삶을 구원했던 노인이 과거를 기억하며 사색할 때, 노인의 지혜가 성숙했을 때, 노인이 말하는 방식이다. 노인에게 일과 소모적인 노력의 시기는 지나갔다. 노인에게 춤을 추던 젊은 시기도 지나갔다. 노인에게는 연애하던 시기도 지나갔다. 삶은 더 이상 노인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노인 역시 삶에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기대하는 중에 판단을 바꿀 수 없다. 그는 결정하는 중에 자신의 판단을 바꿀 수 없다. 후회하는 중에 그의 판단..

키에르케고어의 <다양한 정신에서의 건덕적 강화>에 대하여

키에르케고어에게 1846년과 1847년은 중요한 해이다. 일반적으로 키에르케고어의 작품을 전기와 후기로 나눈다면, 1846년까지는 전기에 해당되고 1847년 이후로는 후기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원래 계획은 1846년 2월 27일에 출판된 와 함께 저작활동을 중단하고, 그 후에는 시골의 작은 교회에서 목사로서 활동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코르사르(Corsair) 사건이 터진다. 풍자 주간지인 ‘코르사르’의 한 편집인이 그의 저작 의 내용을 비판하자, 키에르케고어가 이에 대한 반박문을 쓰면서 싸움은 본격화되었다. 이 주간지는 키에르케고어를 ‘절뚝거리며 다니는 코펜하겐의 소크라테스’라고 비판했다. 이 공격 결과, 그는 다시 한 번 인생의 대지진을 경험한다. 그는 더 이상 거리에 지나다니지 않았고, 지..

[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고난의 복음(37) 고난의 의미 / 하나님께 버림받는 유일한 분!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고난

[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고난의 복음(37) 고난의 의미 하나님께 버림받는 유일한 분!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고난 오늘은 키에르케고어의 소개의 마지막 시간이다. 그 동안 소개한 글은 1847년에 출판된 에 실린 글 중에서 제3부에 해당되는 내용을 편집하여 제공했다. 은 총 7편의 강화가 실려 있고, 이 강화들의 공통된 주제가 있다면 ‘고난’이다. 키에르케고어의 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말한 고난의 의미를 명확히 파악해야 한다. 따라서 이런 이해를 돕기 위해 고난에 대해 깊이 사유했던 사람들의 고난의 의미와 차이점을 비교 분석하고자 한다. 먼저 고난 혹은 고통에 대해서 깊이 있게 고민했던 사람 중에 하나가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포이어바흐이다. 그는 에서 “기독교의 최고의 명령은 고난당하는 것..

[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고난의 복음 (36) 관점 / ‘십자가의 승리’, 너무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있지 않나요?

[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고난의 복음 (36) 관점 ‘십자가의 승리’, 너무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있지 않나요? 십자가 승리? 우리는 이것을 너무 당연한 듯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이 부분에 대해 말하자면, 이 단어를 수도 없이 듣다 보니 감정이 마취된 상태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십자가가 어떻게 승리일 수 있는가? 인간적인 이해로 따지자면 십자가는 승리가 아니다. 오히려 파멸이요, 굴욕이다. 이것을 생각해 보라. 두 명의 강도들 사이에 주님이 십자가에 달린다. 한 마디로, 세상에서 범죄자 취급을 당하신 것이다. 하지만 이 분이 누구인가? 세상 만물의 주인이고, 세상의 모든 재물을 소유하고 있는 분 아닌가? 이 분이 자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음을 선포해야 하는 것, 이것을 생각해 보라. 우리..

[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고난의 복음(35) 승리 / 초대교회 사도들의 ‘승리’, 무엇이 달랐나

[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고난의 복음(35) 승리 대교회 사도들의 ‘승리’, 무엇이 달랐나 승리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누군가 겨루어서 이기는 것이다. 운동 경기가 대표적인 예이다. 사회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누군가 싸워 이겨야만 한다. 패배는 수치요, 굴욕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사회 불의와 싸워 이겨야 한다. 이때, 불굴의 의지로 불의와 맞서 싸워 이길 때, 이것이 승리다. 하지만 이런 승리에 대한 관점으로는 우리가 나눌 사도들의 모범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세상에서 이미 파멸된 자들이었고, 망신을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기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갔다(행 5:41).” 아마 이들..

[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고난의 복음 (34) 뒤집기 / 고난당하고 있지만 승리하는, 고난의 날에 승리하는 법

[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고난의 복음 (34) 뒤집기 고난당하고 있지만 승리하는, 고난의 날에 승리하는 법 우리의 세계가 얼마나 역행하고 있는지, 한국의 기독교 세계가 얼마나 혼탁한지 우리는 경험한다. 위폐를 감별하기 위해서는 진폐를 제대로 알아야 하듯, 이런 혼탁한 시대를 제대로 해석하고 읽어내기 위해 나는 적어도 초대교회 당시로 돌아가기를 추천한다. 지난 시간에 이어 다음 본문 말씀을 상기시켜보자. “그때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을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겼기 때문에 기뻐하며 공회 앞을 떠났다(행 5:41).” 기독교의 진리를 접한다 해도, 요즘은 씁쓸하기만 하다. 왜냐하면 세상은 여전히 진리보다 비진리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고, 심지어 교회에서조차 비진리가 더 힘이 강해 보이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