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7주, 2025년 6월 1일
요한복음 17장은 복음서 중에서 가장 특이한 형식과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께 바친 기도입니다. 공관복음서에는 예수께서 하나님께 기도하셨다는 짤막한 보도가 나오기는 하나 요한복음 17장처럼 긴 내용의 기도문은 없습니다. 이 대목에 나오는 모든 문장이 문자적으로 일일이 예수께서 기도한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공동체의 신앙 고백이 겹친 것이라고 보는 게 맞습니다. 말하자면 요 17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하게 경험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이고 기도이며, 진술이고 찬양입니다. 지난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대목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깊이와 신비와 진수를 맛보았습니다. 우리 함께 그 안으로 들어가 보실까요?
아버지와 하나 됨
오늘 본문은 요 17장 중에서 후반부인 20-26절입니다. 20절은 이 기도문이 제자들만이 아니라 후대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당연합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공생애가 끝나고 최소한 두 세대가 흐른 뒤에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직계 제자들은 모두 죽었고, 그 제자들의 제자들, 그리고 그 제자들의 제자들이 교회를 끌어가고 있었습니다. 대를 잇는 신앙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집니다. 이 예수님의 기도는 지금 함께 예배하는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먼저 21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과 하나님의 ‘상호내주’를 가리킵니다. 관념적이어서 손에 잡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여기 아기와 엄마가 있습니다. 엄마는 아기와 자기가 하나라고 여깁니다. 아기 역시 직접 표현은 못해도 엄마와 똑같이 엄마가 자기와 하나라고 느낍니다. 엄마와 아기 사이에는 그 어떤 이해타산 같은 게 끼어들지 못합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그렇게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엄마와 아기가 하나라고 할 때 이것은 물리적인 차원이 아니라 두 사람의 관계성을 가리키듯이 예수님의 저 발언도 물리적인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가리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완벽하게 하나로 결속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더 노골적으로는 하나님의 외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근거로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라고, 즉 예수님이 하나님과 본질이 같다고 인식하고 믿을 수 있었을까요?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요? 우리는 예수께서 당신 자신의 정체성을 무엇이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릅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를 제자들에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마 16:13). 오늘 본문에 따르면 예수께서 하나님과 하나라는 말씀의 근거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경험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사랑하셨다는 말씀이 오늘 본문에서 반복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24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23절에서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라는 말이 나오고, 26절에도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은 온통 하나님의 사랑에 직결됩니다.
너무 당연한 거 아니냐, 다른 유대교 지도자들도 모두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서 가르치지 않았느냐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맞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의 사랑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겁니다. 거칠게 말해서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만을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겁니다. 그들이 본 하나님의 사랑은 제한적이지만 예수님이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은 제한적이지 않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합니다. 세리와 죄인도 사랑합니다. 탕자도 사랑하는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어 모두를 사랑한다고 예수님은 생각했고,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햇빛이 착한 사람에만 비추지 않고 못된 사람에게도 비추듯이(마 5:45), 비가 착한 사람의 밭에만 내리지 않고 못된 사람의 밭에도 내리듯이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이 세운 기준으로 제한하려는 세력에 강력히 저항하셨습니다.
제한 없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제한하는 세력은 지금도 위세를 떨칩니다. 그 세력은 우리의 무의식까지 사로잡을 정도로 강력합니다. 겉으로 흉악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흉악한 모습을 취하는 세력은 쉽게 구별되기에 크게 위험하지 않습니다. 쓰레기와 똥은 우리가 저절로 피하기 마련인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제한하는 세력은 매우 세련된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요즘 표현으로 “있어 보이게” 작동합니다. 가장 간단한 예를 든다면, 연봉 1억 원은 벌어야 행복할 수 있는 거야, 하는 속삭임과 비슷합니다. 우리 시대에 아무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속삭임입니다. 그런 속삭임은 속삭임으로 끝나지 않고 오늘날 거대한 함성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를 학벌사회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서울대학교를 나와서 사회 지도층 인사가 된 사람의 눈에 고졸 공장 노동자는 하찮게 보이는 겁니다.
이미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그런 현상은 지금도 여전할 겁니다. 괜찮게 사는 서울 어느 동네에 장애인 복지 시설을 짓겠다는 지방정부의 계획이 주민들의 사생결단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 그 주민들 개개인이 비인격적이어서 그런 게 아니라 집값이 내려갈까, 하는 걱정에서 그런 탐욕적이고 난폭한 집단행동이 나온 겁니다. 이는 곧 장애인 이웃을 배척하고 타자화하는 행동입니다. 지금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이외의 다른 나라를 타자화하는 중입니다. 최근에는 하버드대학교에 다니는 외국인 유학생들을 추방하는 정책을 펼치는 중입니다. 하버드대학교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공격을 반대하는 일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트럼프 집단이 볼 때 미국의 뜻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나라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미국이 독점하려는 겁니다.
그런 방식으로 그들이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로 충분하게 누릴 수 있을까요? 세리와 죄인을 배척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었을까요? 동성애자들을 타자화하고 배척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들 잣대로 제한하는 대한민국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걸까요? 저는 그분들 당사자가 아니라서 이 질문에 직접 대답할 자신은 없습니다. 대신 오늘 저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제한적이지 않고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얼마나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지에 대한 대답을 찾고 싶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일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기대서 매 순간을 행복하게 살아가는지를 묻자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제한적이지 않다는 말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주 실질적인 사실을 가리킵니다. 먼저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가장 예민한 문제인 집을 예로 들어봅시다. 서울에서 고급 아파트가 밀집한 지역이 정확히 어딘지 모르겠으나 한강 전망이 보이는 넓은 아파트에 어느 가족이 이사를 했다고 봅시다. 처음 잠시는 우쭐한 느낌이 들지 모르나 얼마 가지 않아 금방 시들해집니다. 그것 자체로는 기쁨이 유지되지 않습니다. 수백억 원 이상 되는 교회당을 소유한 교인들이 그 교회당만으로 신앙이 깊어지는 게 아니듯이 말입니다. 거꾸로 여기 연립주택에 전세나 월세 사는 가족이 있다고 합시다. 불편하고 불안하기는 하나 거기서도 그는 자유롭게 독서 삼매경에 빠질 수 있고, 창문을 통해서 하늘을 보거나 가로수를 보거나 이웃집 불빛을 볼 수 있습니다. 가족을 위해서 밥을 지을 수 있고, 함께 차를 마시고 과일을 먹으면서 대화할 수 있습니다. 작은 집에도 1억 5천만 킬로미터 거리에서 달려온 햇살이 비칩니다. 그 햇살이 황홀하게 경험됩니다. 무슨 말인가요? 우리를 생명 충만하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이 설정한 조건에 제한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 조건에만 목숨을 거는 사람에게는 이런 말이 들리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로 경험하고 있을까요?
요정 나라
요즘 저는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허구의 철학」과 체스터턴의 「이단」이라는 책을 읽는 중입니다. 가브리엘은 1980년 생 독일 철학자이고, 체스터턴은 1874년에 출생하여 60대 초반에 죽은 영국 문필가입니다. 두 사람을 통해서 저는 자본주의와 자연과학 실증주의에서 벗어나는 시야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얻게 되었습니다. 체스터턴은 「이단」 55쪽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몇몇 문장을 발췌하겠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쌩쌩 달리면서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것은 더없이 신나는 일인데, 그럴 땐 아라비아가 모래 회오리로 느껴지고 중국은 잠깐 스치는 논밭으로 보일 것이다. … 우리에게 이해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관광객이나 조사원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순수한 신실함과 시인의 크나큰 참을성을 지니고 이를 대해야 한다. … 자기 텃밭에 서 있는 동안 요정 나라의 문이 열리는 사람이야말로 원대한 생각을 지닌 사람이다.” 작은 텃밭에 불과한 쪽방에 사는 사람이라도 ‘요정 나라의 문’을 열고 들어갈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온 세상에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느껴지지 않는 분들은 일주일만 굶어보세요. 밥이 얼마나 맛있는지 제대로 알게 겁니다. 양쪽 눈에 안대를 대고 일주일만 살아보십시오. 본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감격할 겁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 앞에서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삶의 의미를 제대로 경험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돈이 많은 이들, 더 건강한 이들, 인생에서 즐길 거리가 많은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감할 수 없다는 뜻일까요? 끊어서 대답하기가 어렵기는 한데, 일단은 실감하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그들은 대체로 인생 성공을 숭배하는 시대정신에 길들기 쉽기 때문입니다. 어떤 부자가 예수께 왔다가 재물을 포기하라는 말을 듣고 실망해서 떠났다는 이야기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려움 없이 넉넉하게 사는 이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는 노력을 훨씬 더 많이 기울여야 합니다. 재산만이 아니라 생명조차도 자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더 뚫어봐야 하고, 그런 소유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가능한 참된 행복을 얻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더 정확하게 직시해야만 합니다. 그런 영적인 시야가 확보된다면 그는 자기의 재산과 자기 자신에게 완전히 예속되는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겠지요. 이런 문제를 대충 처세술이나 교양 정도로 여기는 분들이 있다면 이제부터라도 더 진지하게 대하십시오. 늙었거나 젊었거나 우리에게는 시간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는 게 아니니까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
24절이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사실을 전합니다. 창세 전부터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다는 사실이 곧 예수님의 영광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영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대통령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영광의 토대인 셈입니다. 여기 말하는 영광은 행복의 극치입니다. 자유와 평화의 극치입니다. 그런 영광스러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나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제한 없는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깊이 들어가십시오.
그렇게 살고 싶으나 그게 잘 안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제한하고 왜곡하는, 그래서 우리 영혼의 눈을 멀게 하는 세상의 세력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거꾸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기에 세상의 악한, 다른 한편으로 매우 달콤한 세력을 두려워하거나 그 속삭임에 솔깃해하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를 단번에 해결할 방법을 저는 모릅니다. 평생 교회 안에서 설교자로 산 저도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만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입니다. 그분이야말로 하나님과 하나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간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인 26절이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그 어떤 세력에게도 제한받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경험하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데에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비밀이자 신비입니다. 어느 정도 바른 생각을 하는 세상 사람들이 인생살이에서 최선이라고 제시하는 길은 일반적으로 휴머니즘(humanism)과 내추럴리즘(naturalism)의 실현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입니다. 휴머니즘과 내추럴리즘은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지만, 십자가와 부활에 이르는 예수님의 운명은 어떤 상황에서도, 즉 죽음 앞에서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타나니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능력에 사로잡힌 사람은 마치 땅속에 묻힌 보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일상을 살아갑니다. 남이 인정하든 않든 상관없이, 자기가 처한 삶의 조건에 지배당하지 않고 삶을 기쁨 충만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마 5장의 ‘팔복’이 말하는 행복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온전히 영혼의 촉수를 기울이면서 우리 함께 동지적 마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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