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용섭목사

종의 영 vs 자녀의 영 (롬 8:14-17) / 정용섭 목사

새벽지기1 2025. 6. 12. 04:30

성령강림절, 2025년 6월 8

 

 

오늘 설교 본문이 포함된 롬 8장은 아주 강력한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1절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정죄함이 없다는 말(no condemnation)은 그 누구에게도, 그 어떤 세력에게도 책잡힐 일 없이 당당하다는 뜻입니다. 이런 성경의 진술이 옳은가요? 세속 권력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오늘날에도 현실성이 있을까요? 일상은 여지없이 무너지는데도 죽어 천국에 간다는 생각에 도취하여 교회 생활에만 매달리는 이단 종파의 신도들에게서 보듯이 자기 망상은 아닐까요? 대표적인 이단의 하나였던 다미선교회는 세계 종말인 1992 1028일 자기 교파에 속한 사람들만 하늘로 휴거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 날짜에 세계 종말과 휴거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난센스가 일어납니다.

 

죄와 죽음의 법

 

 8:2절에서 바울은 정죄함이 없다는 말이 가리키는 사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두 가지 법이 대립합니다. 하나는 생명을 주는 성령의 법(νόμος)이고, 다른 하나는 죄와 죽음의 법입니다. 죄와 죽음의 법은 이 세상의 작동 원리를 가리킵니다. 그게 무엇인지는 우리가 일상에서 늘 생생하게 경험하고 있어서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겁니다. 한 가지만 예로 들겠습니다. 대한민국의 교육열은 세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어릴 때부터 성적순으로 평가됩니다. ‘7세 고시반이 운영되고 있을 정도입니다. 사회 1% 상류층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강박이 이런 일을 마다하지 않게 합니다. 우리와 우리의 자녀와 사회 공동체를 죽이는 규범입니다.

 

죄와 죽음의 법이라는 바울의 발언은 구체적으로 당시 율법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율법은 역사적으로 모세에게 기원합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비롯한 여러 가지 율법을 완성했습니다.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창세기와 출애굽기와 레위기와 민수기와 신명기를 모세 오경으로 부릅니다. 줄여서 토라라고도 합니다. 이게 유대교를 이끌어가는 법(νόμος)입니다. 이 율법에는 인류사적으로 탁월한 내용이 많습니다. 그 영향력은 지금도 상당합니다. 율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실천하는 집단이 유대 사회에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입니다. 요즘도 판사 같은 법조인들이 전문가 집단으로 사회에서 인정받듯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도 당시에는 그런 계층에 속했습니다.

 

바울도 본래 율법 전문가 집단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는 그 누구보다 더 열정적으로 율법을 연구하고 철저하게 율법적으로 살았습니다. 루틴으로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십일조를 드렸고, 솔선하여 구제하고 사회봉사도 했습니다. 요즘도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불이익을 받으면서까지 사회 정의를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난한 나라에 가서 평생 의료 봉사에 헌신하는 의사들도 있고, 형편이 어려운 외국인 노동자를 위해서 희생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들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칭찬받고 존경받아 마땅합니다. 바울은 율법 중심의 유대교에 대한 열정이 유별나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데에 앞장설 정도였습니다. 부활의 예수를 경험한 뒤로 바울은 그 율법적인 삶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달았습니다.  3: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자기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시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가리켜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즉 위선자라고 일갈하셨습니다.  18:9-14절에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라는 제목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 비유에서 바리새인은 자기의 율법적인 자랑거리를(11, 12) 열거하는 방식으로 기도했고, 세리는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은 가능하지 않은 자기 의로움에 집착했기에 자책감에 떨어지거나,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다 보니 위선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죄와 죽음의 법이라고 말한 겁니다.

 

그런 율법적인 삶에서 뛰쳐나와야 마땅하나 그게 잘 안 됩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가 가리키듯이 동굴 안에서의 메커니즘에 모두가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듯 세상 원리에 익숙한 삶을 육신에 사로잡혀서 사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6절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에 갇힌 사람은 영의 생각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삶의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영의 생각이 중요하기에 바울은 롬 8장에서 반복해서 영을 강조합니다. 그중에서 9절만 읽어보겠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프뉴마

 

성경이 말하는 영()이 무엇일까요? 구약 언어인 히브리어로 루아흐라 하고, 신약 언어인 그리스어로 프뉴마라고 하는 단어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 , 바람, 숨 등등입니다. 영어 mind spirit이 이에 해당합니다. 독일어 성경은 프뉴마를 Geist로 번역했습니다. 헤겔의 대표작인 Phänomenologie des Geistes(정신 현상학)에 나오는 단어 가이스트가 그것입니다. 헤겔의 이 책이 신학계에서 나왔다면 영 현상학이라고 번역해야겠지요.

 

영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은 곧 정신은 무엇이냐, 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 인간에게만 영이, 즉 정신이 있습니다. 다른 동물들도 나름으로 인지 능력이 있긴 합니다. 친구인지 적인지를 느끼고 분간합니다. 싸워야 할 순간인지 도망쳐야 할 순간인지도 압니다. 그들 나름으로 기쁨과 슬픔도 느낍니다. 그러나 동물들은 개념적인 세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똑똑한 침팬지라고 하더라도 대한민국의 수도가 서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대통령을 국민의 투표로 뽑는다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죽었다가 깨도 양자역학 개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언어의 깊이를 모르기에 그들에게는 번역가나 통역사가 없습니다. 그들은 시를 짓거나 소설을 쓰지 못합니다. 사람만이 자기의식이 있고, 세상을 대상으로 인식하며, 시간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나눠서 생각할 줄 알며, 자기의 죽음도 예상하면서 예술과 문화를 꽃피울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초월적인 하나님을 인식하고 믿고 신뢰할 줄 압니다. 이렇게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정신적 특성을 가리켜서 영이라고 합니다. 영적인 존재이기에 사람은 영의 원천인 하나님의 영에 이끌림을 받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14)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거룩한 영만 있는 게 아닙니다. 악하고 찌질한 영도 있습니다. 히틀러 시대의 나치즘에서 보듯이 악한 시대정신(Zeitgeist)이 있는 겁니다. 바울은 이를 가리켜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지 못하면 하나님에게 심판을 받지 않을까, 내 인생이 실패하면 어쩌지, 대한민국의 경제가 발전하지 못하면 어쩌나,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하는 걱정과 두려움과 불안을 초래하는 영이 곧 종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종의 영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바울은 선언합니다. 15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종은 주인의 눈치를 살핍니다. 주인을 두려워합니다. 성실하지 못하고 꾀를 피우는 종은 더 두려워하겠으나, 나름 성실한 종들도 그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주인에게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부담감에 눌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양자, 즉 주인의 자녀가 된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우리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사람이 아니라 은혜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법에 예속된 사람이 아니라 은혜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의무감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사랑의 능력으로 합니다. 점수 올리는 일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사랑에 초점을 맞춥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경험하는 사람이기에 이게 가능합니다. 아이들이 엄마, 하고 부르거나, 아빠, 하고 부를 때 어떤 느낌인지 상상해 보십시오. 그 어떤 잡념이나 걱정이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친밀감이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에 아이와 엄마는, 그리고 아이와 아빠는 하나가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렇습니다. 이럴 때 세상이 제공하지 못하고 빼앗지도 못하는 영혼의 평화를 선물로 얻습니다.

 

성령공동체

 

오늘은 2025년도 성령강림절입니다. 교회력에 따른 오늘의 첫째 말씀은 행 2:1-21절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 대한 보도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의 다락방에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모였을 때 특별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온 집에 가득했고, 불길이 거기 모인 사람들 위에 떨어졌습니다.  2:4절은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라고 합니다. 인간 언어를 초월하여 어떤 영적 엑스터시에 돌입했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도다.”라고( 2:13) 조롱했습니다. 자기들도 알지 못한 채 진리를 말한 겁니다. 성령의 사람은 성령에 취한 사람입니다. 영의 이끌림을 받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조롱은 오늘날도 이어집니다. 그들이 볼 때 그리스도인의 생각과 행동은 이상하기 때문입니다. 공부하기, 스펙 쌓기, 놀러 다니기, ‘알바하기 등등, 일분일초가 모자라는 인생살이에 매 주일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는 게, 그리고 한푼이라도 자기나 가족을 위해서 쓰거나 세이브하는 게 절대 선()인 자본주의 체제에서 별로 투자 개념에도 맞지 않은 헌금을 한다는 게 그들의 눈에는 이성적이지 않고 합리적이지 않아 보인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을 조롱하는 세상 사람들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일까요? 그들이 정말 똑똑하게 사는 걸까요? 다른 건 접어두고 현대인의 영혼을 지배하는 최첨단 기술인 인공지능만 생각해 봅시다. 현대인은 점점 더 생각하기를 포기한 채, ‘마마보이가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듯이 모든 판단을 인공지능에 맡기게 될지 모릅니다. 이런 경향이 정치에도 나타나고 종교에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선동하는 정치인의 말에 휘둘립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유명 목사들의 말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맞장구치는 그리스도인들도 많습니다. 결국 앞으로 구글이나 챗지피티 회사가 세상을 자기들 뜻대로 주무르게 되겠지요.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생각이란 무엇인가(Der Sinn des Denkens)에서 인공지능의 문제점을 이렇게 짚습니다. 두 군데만 인용하겠습니다. “디지털화의 희생자가 되어 희망 없는 정보 중독자나 기술 좀비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기술적 도구들을 탈마법화하고 그것들이 전능하다는 믿음을 떨쳐내야 한다.”(16). “알다시피 인공인공지능(가브리엘은 사람의 지능이 인공지능이고, 현대의 인공지능은 인공지능인 인간이 만든 것이기에 인공인공지능이라고 부른다.)은 주로 군사적 목적으로 개발되었으며 지금은 인간 사회에 대한 지구적 감시망으로 기능한다.  디지털 혁명은 거대한 전쟁 기계다.”(471). 장고 끝에 악수 둔다는 바둑 격언처럼 스스로 합리적이고 똑똑하다고 여기는 현대인은 결국 최첨단의 기술을 통해서 자신을 파괴하게 될지 모릅니다. 개인들도 영혼이 병드는 길로 정신없이 뛰어드는지 모릅니다. 그게 곧 바울이 말하는 의 영을 받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녀의 영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자녀의 영을 받은 우리가 두고두고 기억하면서 되새겨야 할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바울은 16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

 

바울은 성령(Πνεμα)이라는 단어의 첫 스펠링을 대문자로 썼고, 우리의 영(πνεύμα)은 소문자로 썼습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고, 하나님의 영이며,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우리의 영은 성령의 인도를 받습니다. 이런 관계가 무슨 뜻인지는 예술가들과 시인들이 잘 압니다. 작곡하는 사람은 자기들이 작곡하는 게 아니라 소리가 자기에게 온다고 생각하고, 시인들은 시가 자기에게 온다고 여깁니다. 소리의 영과 언어의 영이 그 사람들의 영혼에 공명이 되면 수준 높은 음악이 탄생하고, 수준 높은 시나 소설이 탄생합니다. 하나님의 영,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이라 불리는 성령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이미 앞에서 대답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삶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 몸을 죽이지만 영혼에는 손을 대지 못하는 세상 권력을( 10:28) 겁내지 않습니다. 옆에 어머니와 아버지만 있어도 아주 즐겁고 행복하게 지내는 아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17절이 말하듯이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습니다. 힘에 벅찬 운명도 받아들입니다. 미래의 영광을 알기에 현재의 고난도 견딥니다. 우리는 지금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을까요?

 

이런 그리스도교 신앙의 깊이와 신비를 모르는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서 정신 승리에 불과하다고 무시할지 모릅니다. 로마 제국의 지성인들도 당시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그렇게 무시했습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사회 현상입니다. 그런 이들은 그렇게 살라고 내버려둘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을 경험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후예입니다. 우리 모두 종의 영이 아니라 자녀의 영을 받은 사람으로서 안심하고, 크고 작은 고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하면서, 부담스러운 짐이 아니라 은혜로운 축제로서의 일상을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