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용섭목사 687

십계명 ‘너머’(막 10:17-22) / 정용섭목사

창조절 7주, 2024년 10월 13일  영생에 관한 질문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한 선생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사람은 자기가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를 말하지 않고 처음부터 다짜고짜 질문했습니다. 무례해 보입니다. 실제로는 인사를 했으나 성경을 기록한 사람이 그런 내용은 필요 없으니까 생략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주로 바리새인들처럼 꼬투리를 잡으려고 예수께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오늘 본문에 나온 이 사람처럼 정말 진리를 알고 싶어서 질문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질문한 ‘영생’(eternal life)은 신약성경의 핵심 주제입니다.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보도하는 요 3장은 이 영생에 관해서 여러 번 언급했습니다. “..

모든 사람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히 1:1-4, 2:5-10) / 정용섭목사

창조절 6주, 2024년 10월 6일  대부분 교회당에는 십자가상이 달려 있습니다. 건물 첨탑에도 세워져 있고, 예배당 강단 벽에도 달려 있습니다. 로마가톨릭과 정교회와 성공회 예배실에는 십자고상이 있습니다.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십계명을 문자적으로 실천하는 유대교의 회당과 이슬람교의 모스크에는 십자가는 물론 없고 하나님을 상징하는 그 무엇도 없습니다. 불교 신자들이 예불을 드리는 대웅전에는 염화미소의 부처상이 가운데 자리합니다. 그곳을 찾는 사람들을 자비롭게 맞아주는 느낌입니다. 십자가는 단두대나 교수형 밧줄처럼 로마 제국의 사형 집행 기구였기에 그것을 종교적 상징으로 사용한다는 건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그래서 초창기에는 십자가나 십자고상을 예배당에 설치하지 않다가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로 자리를 잡..

지옥 이야기막 9:38-48,

창조절 5주, 2024년 9월 29일 게엔나 예수님의 공생애를 담은 복음서에는 예상외로 읽기에 불편한 내용이 간혹 나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의 후반부인 막 9:42절 이하 말씀이 그렇습니다. 43절과 45절과 47절에 각각 ‘지옥’이 언급됩니다. 48절은 지옥을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곳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여러분은 지옥이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지옥 표상은 한편으로 사랑과 긍휼을 하나님의 근본 속성으로 보는 성경의 가르침에 배치되고, 다른 한편으로 정말 반인륜적인 범죄자들이 지옥에 가지 않으면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옥 여부에 관한 저의 생각은 설교 마지막 대목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이전이라도 설교 과정에서 간접적으로나마 대답이 주어질지 ..

하늘의 지혜 (약 3:13-18) / 정용섭목사

창조절 4주, 2024년 9월 22일  야고보서는 종종 구설에 올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고, 믿음보다는 행함에 무게를 두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약 2:17절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행함보다는 믿음에 무게를 두는 그리스도교 복음의 전통에서 볼 때 야고보서의 주장은 복음의 본질이 아니라 변죽을 울리는 문서처럼 어딘가 불편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초기 교회에서 야고보서는 오랫동안 성경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심지어 마틴 루터도 야고보서를 ‘지푸라기’라고 평가절하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처한 상황에서 읽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족하지 않습니다. 야고보서를 기록한 사람은 바울의 가르침을 극단적으로 몰고 간 어떤 그리스도인들을 바른 신앙..

의로움의 원천 (사 50:4-9a) / 정용섭목사

창조절 3주, 2024년 9월 15일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고 재미있게 살기를 원하나 모두가 그렇게 살지는 못합니다. 노력과 운이 닿아서 자기가 원하는 행복과 재미를 찾은 사람도 있고, 그런 삶과는 거리가 먼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 행복이고 재미인지를 확신하지 못하면서 무조건 그걸 손에 넣는 일에만 몰두한다는 사실입니다. 대충은 압니다. 미국에 사는 사람과 방글라데시에 사는 사람 중에서 어느 쪽이 더 행복한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중류층 이상에 속한 사람들이 빈민층에 속한 사람들보다는 더 행복하고 재미있게 삽니다. 이를 조금 더 단순하게 설명하면 경제와 건강에서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며 사는 게 행복한 삶의 모범 답안입니다. 이게 근사한 답은 되지만, 정답은 아닙..

무엇이 ‘놀라운 일’인가?(막 7:31-37) / 정용섭목사

창조절 2주, 2024년 9월 8일  예수님의 공생애는 주로 갈릴리 호수 인근과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합니다. 가끔은 갈릴리 호수의 북쪽인 이방인 지역도 나옵니다. 오늘 설교 본문 막 7:31절에는 갈릴리 호수 북쪽에 속하는 지명 세 곳이 나옵니다. 두로, 시돈, 데가볼리입니다. 그곳은 물론 유대인들이 낮춰보는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입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그런 이방인들과 접촉하는 걸 별로 내켜 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은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의 생각을 뒤집는 사건이 두로에서 벌어졌습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어떤 여자가 예수를 찾아와서 발아래 엎드려서 딸을 고쳐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이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녀의..

생명의 길 (신 4:1-2, 6-9) / 정용섭목사

창조절 1주, 2024년 9월 1일  모압 광야에서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가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은 성경 본문을 쓴 사람과 그걸 받아볼 사람이 처한 상황입니다. 성경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종교 천재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말씀을 받아쓴 글도 아닙니다. 모든 성경 텍스트는 구체적인 역사를 배경으로 합니다. 오늘날 설교자들이 21세기 대한민국이라는 구체적인 역사를 배경으로 설교하듯이 말입니다. 그걸 성서학자들은 ‘삶의 자리’(Sitz im Leben)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설교의 본문으로 읽은 신명기는 기원전 13세기 고대 이스라엘이 처한 삶의 자리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들은 애굽을 떠나서 일종의 난민처럼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목민으로 살았습니다. 그..

영원한 생명의 말씀 (요 6:60-69) / 정용섭목사

성령강림 후 14주, 2024년 8월 25일  예수를 등지는 제자들 오늘 설교 본문인 요 6:60절에 따르면 제자 중 여럿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라고 수군댔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의 생각을 조금 더 풀어서 정확하게 설명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설명을 듣고도 결국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본래 예수님의 가르침이 새롭고 감동적이며, 그를 통해서 놀라운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랬던 그들이 제자로서의 삶을 포기했다는 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무슨 일이 당시에 일어난 것일까요? 그들을 믿음이 부족하다든가 인격적으로 어딘가 크게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보면 곤란합니다. 나름..

성령 충만의 길 (엡 5:15-20) / 정용섭목사

성령강림 후 13주, 2024년 8월 18일  지금의 튀르키예 서남부 지역에 있는 에베소(에페수스)의 역사는 기원전 10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당시에는 로마의 대표적 직할 도시로 인구가 자그마치 20만 명가량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 제국의 침략과 지진 등의 이유로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되었습니다. 다만 2만5천 명을 수용하는 원형 경기장을 비롯한 그리스와 로마 건축물 및 유물은 어느 고대 도시 못지않게 많습니다. 바울의 에베소 선교 활동은 행 19장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2년에 걸쳐서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에서 매일 설교했다고 합니다. 아데미 신전 모형을 만들어 팔던 상인들이 에베소 시민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협박했습니다. 군중들은 군중 집회에서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영혼의 깊이 (시 130:1-8) / 정용섭목사

성령강림후 12주, 2024년 8월 11일  오늘 설교 본문 시편 130편에서 1절만 읽어도 그것을 쓴 그 시인의 영혼이 얼마나 절박한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우선 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사람은 누구나 절망적인 상황에 놓이면 부르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부르짖는 모습을 가끔 영상으로는 볼 수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의 무차별 군사 공격을 받아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넋을 놓고 부르짖습니다. 거꾸로 작년 10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정권 하마스의 게릴라 공격을 받았을 때 죽은 이들의 가족도 부르짖었습니다. 10년 전 세월호 침몰에서 보았듯이 어처구니없는 죽음 앞에서 가족들은 부르짖습니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그 상황을 헤쳐나갈 수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