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3주, 2024년 9월 15일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고 재미있게 살기를 원하나 모두가 그렇게 살지는 못합니다. 노력과 운이 닿아서 자기가 원하는 행복과 재미를 찾은 사람도 있고, 그런 삶과는 거리가 먼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 행복이고 재미인지를 확신하지 못하면서 무조건 그걸 손에 넣는 일에만 몰두한다는 사실입니다. 대충은 압니다. 미국에 사는 사람과 방글라데시에 사는 사람 중에서 어느 쪽이 더 행복한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중류층 이상에 속한 사람들이 빈민층에 속한 사람들보다는 더 행복하고 재미있게 삽니다. 이를 조금 더 단순하게 설명하면 경제와 건강에서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며 사는 게 행복한 삶의 모범 답안입니다. 이게 근사한 답은 되지만, 정답은 아닙니다. 남부러울 거 없는 삶에는 자기도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견디기 힘든 권태가 개입할 여지도 큽니다. 권태가 어느 정도 극복되었다고 해도 나름 화려한 인생이 순식간에 끝나버린다는 사실에 앞에서 절망합니다. 지금 당장은 다른 일에 쫓겨서 권태와 절망을 실감하지 못할 수 있으나 곧 그런 사태 안으로 휩쓸리게 될 겁니다. 누구도 예외 없이!
우리 인생살이에서 행복과 재미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삶에는 행복과 재미보다 더 중요한 어떤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얼까요? 삶의 궁극적인 의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행복과 재미와는 반대되는 상황에 놓인 사람에게도 주어집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고난과 슬픔과 외로움을 직면할 줄 아는 사람에게만 삶의 궁극적인 의미 안으로 들어갈 기회가 주어집니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예수님의 공생애를 생각해보십시오. 싯다르타가 왜 왕자의 신분을 포기했는지를, 왜 아시시의 프란체스코가 아버지의 큰 유산을 포기하고 탁발수도회를 시작했는지를, 왜 수많은 출가 수도자들이 일반적인 행복한 삶의 자리를 박차고 나왔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모두 예수나 싯다르타나 출가 수도자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구차한 일들이 수없이 벌어지는 일상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 일상에서 행복과 재미를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일상을 사는 우리에게 최선은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스스로 고난의 삶을 살아내면서 그 안으로 들어갔던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에게 놓인 삶의 허상을 조금씩 벗겨내고 그 깊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꾸준하게 그런 길을 수행하듯이 살면 삶의 궁극적인 의미가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사람들이 천금처럼 여기는 시간을 내서 예배를 드리고, 성경 말씀을 읽고, 성경과 그리스도교 2천 년 전통이 말하는 삶의 궁극적인 의미에 귀를 기울이는 겁니다. 마르바 던이 예배를 가리켜서 「거룩한 시간 ‘낭비’」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벨론 유수
오늘 설교 본문은 BC 6세기 유대의 바벨론 유수 상황을 역사적 배경으로 합니다. 선민으로 자처하던 유대 백성들이 지리멸렬 쫄딱 망한 사건입니다. 비슷한 일을 AD 70년에 다시 겪습니다. 그리고 20세기 독일 나치에 의해 유대인 6백만 명이 죽는 홀로코스트가 벌어졌습니다. 전 세계사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고난을 받은 민족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첫 재앙인 바벨론 유수 사건으로 인해서 유대인의 하나님 신앙이 한 단계 깊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두십시오. 고난이 그들에게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성찰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그들은 두 가지 질문을 제기했습니다. 하나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맞나,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할 능력이 있나, 하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의 안전을 책임지지 않는 신이 어디 있으며, 바벨론 제국의 폭력을 막아내지 못하는 신이 어떻게 전능하단 말이냐, 하는 문제 제기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익명의 선지자(편의상 이사야로 부름)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린 게 아니라 유대 백성이 죄악을 행했기에 이런 절망스러운 일이 벌어졌다.(1절) 둘째, 하나님의 능력은 변함없이 절대적이다.(2-3절) 이런 말로 바벨론에 강제로 끌려온 유대 백성들의 불만이 모두 해결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일본 강점기에 자의나 타의로 일본에 건너간 교포들이 모욕과 조롱과 누명을 썼듯이, 바벨론에 억지로 잡혀 와서 소수 민족 디아스포라로 살던 그들은 지쳐갔습니다. 이사야는 그들을 위로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사 50:4-5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학자(제자)의 귀를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요즘 식으로 신학 공부가 깊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는 우선 6절에서 자기가 처한 실존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바벨론 제국을 비판하다가 체포된 이사야 선지자가 바벨론 당국에 의해서 심문받고 고문당하는 장면입니다. 그가 이런 운명에 처하게 된 데에는 동족 유대인의 고발도 한몫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투쟁하던 이들을 일본 사법 당국에 밀고한 조선 사람이 있었듯이 말입니다. 이사야는 결박당한 채 등에 몽둥이찜질을 당했고, 수염이 뽑혔으며, 심한 모욕적 언사를 들었었고, 곁에 선 사람들의 침 세례도 받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사야를 동정하기도 했고, 또 어떤 이들은 잘못했으니까 벌을 받는 게 마땅하지, 했을 겁니다. 선지자는 무자비한 고문을 일절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몸을 그대로 맡겼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불의한 권력 앞에서는 뭔가 저항하는 게 마땅해 보이는데 말입니다.
디이트리히 본회퍼 목사가 히틀러 정권을 타도하려는 단체에 가입해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에서 지내는 동안에 쓴 편지가 나중에 책으로 묶여 나왔습니다. 제목이 「저항과 복종」입니다. 본회퍼는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몇 달 전에 교도소에서 사형당했기에 그의 동료 신학자인 베트게가 책을 편집했습니다. 그 제목에 본회퍼의 신학 사상이 잘 녹아 있습니다. 이 세상의 악한 세력에는 저항하고, 하나님께 복종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 저항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무저항으로 버텨내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건 어렵습니다.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무조건 저항하는 게 능사는 아닙니다. 바울 같은 이는 로마의 지방 정권에 복종하라고(롬 13:1 이하) 충고했습니다. 무질서보다는 악한 질서가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낫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본문에서 모욕당하면서도 전혀 저항하지 않았던 이사야도 같은 생각이었을까요?
이사야의 깊은 생각을 제가 다 알지 못합니다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의 발언에 따르면 훨씬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떤 모욕적인 상황에 떨어지더라도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부끄러워하지도 않습니다. 고문 자체는 두려운 일이지만 그것으로 자기의 영혼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보통 사람은 흉내 내기 힘듭니다. 우리는 고문당하고 모욕당하는 게 아니라 약간만 기분 나쁜 일을 당해도 참지 못합니다. 약간의 손해도 분해합니다. 그래서 누가 자기를 건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자기를 단단하게 무장시킨 채 살아갑니다. 이사야가 억울하다고, 자기를 더는 괴롭히지 말라고, 인격적으로 대해달라고, 하나님이 당신들을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고함치지 않은 이유를 8, 9a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당시 사람들이 이런 말을 들었으면 이사야가 ‘고문에 시달려서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냐?’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한여름 에어컨과 선풍기도 없이 부채 하나만 들고 쪽방에서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지내는 독거노인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인정하셔서 부러울 게 하나도 없다고, 자기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외치는 형국이니까요.
저는 본문이 이사야 개인의 운명만이 아니라 당시 유대 민족의 운명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유대 민족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잃고 가나안에서 멀고 먼 바벨론까지 강제로 끌려왔습니다.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상당히 많은 사람이 줄을 지어서 이동하는 그 장면이 그려지실 겁니다. 나중에 문제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유대의 지도급 인사들을 대부분 끌고 온 겁니다. 유대인들을 바벨론에서 온갖 수모를 당했습니다. 어떤 유대인과 바벨론 사람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면 유대인이 거의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빨리 포기하고 바벨론 사회에 적응하려는 사람들도 있었고, 아니면 현실을 완전히 비관한 채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포기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이사야는 그들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의롭다는 사실을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장하셨다고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도우시니까 아무도 우리를 무시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이게 말이 될까요? 요즘 말로 ‘정신 승리’에 불과한가요?
의로움
우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신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유대인들은 모두에게 모욕당하고 무시당하는 신세입니다. 요즘 말로 ‘루저’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그들을 옳다고 인정하신다니, 말이 되나요? 하나님이 무슨 기준으로 그들을 의롭다고 하시는 건가요? 뭔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게 그들에게 있어야 하겠지요.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도덕적으로 더 뛰어나거나 머리가 더 좋다거나 행실이 더 바른 건 없습니다. 그들의 특별한 점은 단 한 가지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정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인정하심으로 인해서 이사야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전혀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내 생각을 논박할 수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서라.’라고 담대하게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에 집중해서 산다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은 선하시고 사랑이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시기에 우리의 삶에는 그 선하심과 사랑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바벨론에 끌려와서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는 유대민족들에게도 이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고문당하는 이사야도 그 사실을 알았기에 주눅 들지 않고 자신감 넘치는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이게 실제로 말이 되나요?
어떤 왕국에서 왕자의 아내를 공개 모집하였습니다. 일주일 동안 콘테스트가 벌어집니다. 전국에서 많은 처녀가 왕궁에 모였습니다. 가문이 좋은 집 여성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미모도 뛰어났고, 학벌도 최상입니다. 그들은 서로 자기가 어떤 집안 출신이며 교양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자랑하기에 바쁩니다. 그중에 가장 수준이 처지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평민 출신이고 학벌도 높지 않으며 가장 중요한 미모도 그렇게 빛나지는 못했습니다. 거기 모인 여성들은 모두 이 여성을 오지 못할 곳에 온 것처럼 노골적으로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성은 이미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특별한 인연으로 왕자와 미래를 약속했기에 무시당하는 상황 가운데서도 전혀 기가 죽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왕자와 미래를 비밀스럽게 약속한 것처럼 바벨론 유수 시대의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실제로 느낄 줄 아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걸 느끼는 게 쉽지 않습니다. 대개는 자신들이 처한 처량한 신세만 보고 삽니다. 그래서 설교 앞부분에서 말씀드렸듯이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거나 하나님은 바벨론 제국을 제압할 능력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역사 과정에서 반복해서 하나님 신앙을 포기하고 가나안 지역의 농경신 바알에게 기울어졌습니다. 그게 이해가 갑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치우쳐서 사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당장 배부르고, 재미있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가난하고 외로운 삶을 당당히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생명이 있고, 의로움이 있고, 안식이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유대 민족은 잠깐 귀를 기울이는 듯하다가 다시 다른 데로 마음을 돌렸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바벨론에 끌려온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사야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말씀을 선포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고 말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사야의 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태는 예수께서 산헤드린 공회 재판정에서 당한 모욕을 이렇게 전합니다.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밷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마 26:67) 예수께서 빌라도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벌어진 장면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27:30) 예수께서는 종교 법정과 정치 법정에서 똑같이 모욕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저주스러운 운명에 떨어졌습니다. 우리의 운명이 아무리 비참하더라도 이보다 더 어렵지는 않겠지요.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에게 벌어질 수도 있는 저주스러운 운명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가장 저주스러운 운명은 죄와 죽음입니다. 그들은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완전한 평화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정확하게 뚫어본 바울은 롬 8:31-34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발췌해서 읽을 테니까 귀담아들어 보십시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이런 말씀이 너무 종교적인 표현이라서 멀리 느껴지는 분들이 계신가요? 이 말씀은 아주 실질적인 겁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언젠가 죽습니다. 생명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겁니다. 슬퍼하는 유가족도 죽는 사람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혼자서 그 순간을 돌파해야 합니다. 그런 결정적인 순간이 오기 전에도 우리는 아무리 돈이 많고 건강해도 유형무형으로 삶의 위기를 겪습니다. 그 순간에 십자가에 처형당했으나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있는 자’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믿는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받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의로움의 원천은, 즉 생명의 원천은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의 운명으로 증명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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