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용섭목사

생명의 길 (신 4:1-2, 6-9)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9. 5. 03:45

창조절 1, 2024년 9월 1

 

 

모압 광야에서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가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은 성경 본문을 쓴 사람과 그걸 받아볼 사람이 처한 상황입니다. 성경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종교 천재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말씀을 받아쓴 글도 아닙니다. 모든 성경 텍스트는 구체적인 역사를 배경으로 합니다. 오늘날 설교자들이 21세기 대한민국이라는 구체적인 역사를 배경으로 설교하듯이 말입니다. 그걸 성서학자들은 삶의 자리’(Sitz im Leben)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설교의 본문으로 읽은 신명기는 기원전 13세기 고대 이스라엘이 처한 삶의 자리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들은 애굽을 떠나서 일종의 난민처럼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목민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터를 잡고 살겠다는 야무진 꿈이 있었습니다. 애굽의 고센에서 가나안까지는 장정 걸음으로 한 달이면 충분합니다. 40년을 광야에서 배회하리라는 미리 알았다면 애굽을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광야에서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기적도 많았으나 이런저런 일로 죽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출애굽 당시에 스무 살 이상 되는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대다수가 광야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성경은 말하지만 실제로는 광야에서의 삶이 그만큼 고달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출애굽 이후 40년쯤에 이들은 사해 동편 모압 평지까지 왔습니다. 요단강만 건너면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입니다. 여기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끌고 온 모세는 백성들에게 마지막으로 연설했습니다. 그 내용이 신명기입니다.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연설 후에 죽습니다. 그 장면을 신 34:4-6절이 이렇게 전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고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가나안에는 이미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듣보잡 이스라엘 백성들을 쌍수 들어서 환영할 까닭이 없습니다. 성경은 가나안 땅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허락하신 약속의 땅이라고 말하나 원주민들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주장입니다. 이스라엘은 그곳에서 십중팔구 원주민들과 크고 작은 영토 분쟁을 겪게 될 것입니다. 강제로 가나안 원주민을 몰아내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그건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정의로운 일도 아닙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가나안 원주민과 함께 사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것도 사실은 쉽지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고 가나안 문명에 동화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시골 청년이 서울에 가서 순수성을 잃듯이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가나안 원주민들과 더불어 살면서도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요? 모세의 그런 고민이 신명기에 담겨 있습니다. 답은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4:1-2절을 그대로 읽어보겠습니다. 모세의 안타까운 마음을 염두에 두고 들어보십시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모세는 백성들에게 군사력을 키우라거나 아들딸 자식을 많이 낳고 돈 많이 벌어서 이름을 떨쳐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가감하지 말라고 강조한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는 율법입니다. 율법은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법전입니다. 바빌로니아 제국에 함무라비 법전이 있듯이 이스라엘에는 율법이 있었습니다. 율법은 십계명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구체적인 시행 규칙도 나옵니다. 예를 들어서 여자 포로를 아내로 삼는 규정’( 21:10 이하)도 있고 이혼과 재혼’( 24:1 이하)에 관한 규정도 나옵니다. 출애굽기와 레위기와 민수기에도 비슷한 규정들이 나옵니다. 먹어도 되는 짐승과 먹지 못하는 짐승에 대한 구분도 있습니다. 여성들의 달거리 문제도 나오고, 소가 남의 농사를 망쳤을 때 보상하는 기준도 나옵니다. 심지어 성폭력에 관한 규정도 있습니다. 그 전체를 가리켜서 율법이라고 합니다. 그 내용의 정당성이나 실효성 여부는 둘째 치고 고대 이스라엘은 일찍부터 법치주의가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법치의 길

 

모세는 왜 이렇게 율법주의를, 즉 법치주의를 강조한 것일까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면 너희가 살 것이라.’라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게 바로 생명의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법치주의는 권력자의 자의적 판단이나 기분에 따른 통치 행위를 막아줍니다. 그리고 어떤 사건을 처리하는 데에 일관성을 유지하게 해줍니다. 오늘 본문 8절은 이런 법치의 장점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실제로 그렇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일부 제국 외에 법치 국가는 거의 없습니다. 더구나 모세의 이름으로 선포된 규례와 법도는 공의로웠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법 집행이 정의로웠다는 뜻입니다. 법 집행이 정의로우면 공동체가 하나 될 수 있지만, 법 집행이 사사롭게 일어나면 공동체는 분열됩니다.

저는 고대 이스라엘의 규례와 법도가 얼마나 정의로웠는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보는 관점에서 따라서 다르겠지요. 다만 분명한 사실은 모든 규례와 법도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어떤 왕조나 가문을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규례와 법도를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당시 근동의 그 어떤 나라의 법전보다 이스라엘의 율법은 모세가 말했듯이 공의로웠습니다. 예를 들어 율법에는 가난한 자와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돌봐야 한다는 규정이 종종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소수민족으로, 광야에서 나그네로 살았기에 정처 없이 떠도는 사람들과 난민들을 돌보라는 겁니다. 십계명에 나오는 안식일 규정만 해도 그렇습니다.  5:14 절만 인용하겠습니다.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고대 사회에서 노예와 종들까지 일주일에 하루 쉬게 하는 민족은 없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에 최소한 일주일에 하루만큼은 노동으로 해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율법에 명시한 것입니다. 이런 규정은 지주나 기업가들이 싫어했겠지요. 노동력을 최대한 끌어올려서 생산성을 높이는 경제 논리에 역행하는 규정이니까요. 하나님의 명령을 법에 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모세는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 일체를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게 될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의 명령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그래야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원주민들과 어울려서 살면서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을 수 있으며, 그래야만 그들의 삶이 보장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한계

 

당시에 가나안 땅에는 이미 철()기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상당히 고급스러운 문명입니다. 애굽과 메소포타미아를 잇는 중심 도로에 접한 지역이기에 문명이 발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명이 발전하려면 물질적인 토대도 필요합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신은 농경을 책임지는 바알입니다. 바알은 풍요와 다산을 특징으로 합니다. 요즘 식으로 말해서 바알은 자본주의 신입니다. 반면에 광야에서 유목민으로 살았던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풍요가 아니라 최소한의 생존 조건으로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광야에서 주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살았는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일용할 양식만으로도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믿었습니다.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완전히 다른 문화를 만납니다. 먹을거리가 상대적으로 차고 넘칩니다. 축제도 많습니다. 광야에서 허기만 면하던 이스라엘 사람들과 달리 가나안 사람들은 영양가 높은 음식을 먹었기에 신체도 크고 피부도 탄력이 있었고, 따라서 성적인 매력도 유대인에 비해서 두드러졌습니다. 농촌에서 겨우 먹고살 정도로 힘들게 농사를 짓거나 소를 키우는 청년과 도시에서 높은 연봉을 받으면서 피트니스와 피부 관리를 받는 청년을 비교해보십시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틀림없이 그들의 바알 숭배 문화에 휩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못 했다면 영적인 지도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신당부하는 겁니다. 규례와 법도를 가감하지 말고 지키라고 말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실패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선지자들이 거듭해서 하나님의 법도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쳤으나, 그것도 잠시뿐입니다. 믿음 좋은 다윗 왕과 추진력이 있었던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해서 겉모양으로는 하나님 신앙이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왕들에 대한 구약성경의 평가를 보십시오. 몇몇을 빼고는 모든 왕이 하나님의 뜻에서 멀었습니다. 왕이 하나님의 뜻에서 멀었다는 것은 곧 백성들도 똑같았다는 뜻입니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를 경고했고,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했습니다.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 너희에게 심판이 있나니 너희가 미스바에 대하여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 친 그물이 됨이라.”( 5:1) 결국 고대 이스라엘 민족은 기원전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패망했습니다. 규례와 법도를 지키면 살게 될 것이라던 가나안 땅에서의 실험은 완전한 실패로 끝났습니다.

 

왜 실패한 것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규례와 법도를 지킬 능력이 없고 의지도 없었기 때문일까요? 시대적 상황이 어쩔 수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규례와 법도라 불리는 율법의 한계가 핵심 이유입니다. 법치주의는 다른 동물의 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 사회의 고유한 문화이자 정신입니다. 그런데 이 만능은 아닙니다. ‘법대로 합시다.’라는 구호를 외칠 수는 있으나 인간 사회에서 법의 가치를 구현하기는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닙니다. 얼마 전 설교에서 법 전문가인 판사의 어두운 실존에 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는 걸 이해해주십시오. 똑똑하고 정의감에 불타는 판사는 피의자에게 10년 형을 선고했습니다. 피의자 가족은 그 일로 삶의 희망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판사의 정의로운 판결로 오히려 다른 한편에서는 불의한 일이 벌어진 겁니다. 법적인 연좌제는 사라졌으나 실제적인 연좌제는 없앨 수가 없습니다. 이 사실을 정확하게 뚫어볼 줄 아는 판사라면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자기의 법 행위로 인해서 벌어질 불행을 당하는 운명에 대해서 속죄하는 마음이 있겠지요. 모세가 선포한 율법도 이와 비슷합니다. 좋게 봐서 법은 필요악입니다. 그게 종교법이든, 정치법이든, 경제 논리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율법 너머

 

기원전 587년 바벨론 유수로 인해서 율법 중심주의가 실패로 끝나긴 했으나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그 규례와 법도를 붙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초기 그리스도교 당시에도 성전과 율법이 유대교를 견인하는 두 기둥이었습니다.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뒤로는 더 강력하게 율법 중심의 종교가 되었습니다만, 근본에서는 성전이나 율법이나 작동 원리가 같습니다.

 

그들이 여전히 율법 종교에 머물렀던 이유는 요즘 우리의 자본주의 체제처럼 율법 질서가 한편으로 그들에게 어떤 정신적 안정감을 주며, 다른 한편으로 그 질서 안에서 경쟁과 욕망이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스라엘의 종교 엘리트라 할 수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어려서부터 모세가 명령한 율법을 철저하게 공부하고 지켰습니다. 일종의 종교적 스펙을 압도적으로 쌓은 겁니다. 오늘날 가장 잘 나가는 직업군에 속한 사람들처럼 자부심을 느낄만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큰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이니까 보상받을만합니다. 문제는 그들 전문가 집단이 율법의 근본정신과 가치를 곧게 세우기보다는 자신의 종교적 업적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삼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 셋째 말씀’( 7:1-8)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아무리 종교적으로 세련된 사람이 되어도 생명의 길을 간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당시 바리새파 사람으로 살았더라도 비슷했을 겁니다.

 

가장 일상적인 밥 먹는 행위를 생각해보십시오. 밥을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맛있게 먹는 일이 중요하기는 하나 그것으로 구원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우리 일상에서 다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에 비해서 조금 더 여유롭게 살고, 품위 있게 살 수는 있겠습니다만 참된 자유를 얻지는 못합니다. ‘럭셔리하게 산다고 해서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똑같이 생각하시겠지만 저는 럭셔리하게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자기 욕망과 죽음과 허무로 인해서 자신의 실존을 얼마나 힘들어하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건 속임수이거나 자기 최면입니다.

 

우리 인생이 다 그런데 어쩌라고’, 하고 말씀하고 싶으신가요? 여기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도마가 예수께 생명의 길을 알려달라고 말하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전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4:6) 놀라운 선포입니다. 로마 제국이 완벽하게 지배했던 바로 그 시절, 정확하게는 기원후 90-100 어간에 소수의 그리스도인은 생살여탈권을 한 손에 쥔 로마 제국의 황제가 아니라 그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했으나 다시 살아있는 자로 제자들에게 현현한 예수 그리스도만을 생명의 길로 받아들였습니다. 율법을 넘어, 경제와 정치 문법을 넘어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길을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길을 함께 가는 영적인 도반들입니다. 가는 데까지 가봅시다. 나머지는 그분께 일임하고 말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