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29 13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신32:9) / 이금환 목사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신명기32:9-10) 모세는 출애굽 이후에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하나 하나 헤아려보듯이 열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와를 믿는 백성, 여호와의 유산을 누릴 백성들에게 이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라 일컬어지는 믿음의 백성들, 그들을 집단으로 이끄셨지만, 그 안에는 각각의 사람을 개인적으로 황무지에서, 광야에서 만나주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지켜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이 지금도 그 때와 동일하게 믿음의 자녀들을 황무지 같은 세상에서, 광야를 통과하는 것 같은 삶에서 계속해서 만나주시고, 한 순간도 ..

대림절 단상(2) / 정용섭 목사

앞에서 재림을 모르면 느낌도 없다면서,마치 내가 뭔가 특별한 것을 알고 있기나 한 것처럼 말했다.내가 알아봐야 얼마나 알겠는가.시각장애인이 코끼리의 한 부분을 만진 것에 불과하다.그래도 그렇게 만진 사람들의 말들을 종합해서코끼리의 형상을 약간은 그릴 수 있지 않겠는가.그게 완벽한 그림을 아니겠지만 말이다. 우선 이렇게 질문하자.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얼 가리킬까?신약성서에는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신다는 말이 있다.승천 당시에도 구름을 탔다고 한다.설마 예수님이 실제로 구름을 타고,마치 외계인이 멋진 비행선을 타고 나타나듯이오실 거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그건 불가능한 일이다.하나님께 불가능한 일이 없으니 불가능하다기보다는신학적으로 바른 생각이 아니라고 말하는 게 좋겠다. 이유는 다음..

대림절 단상(1) / 정용섭 목사

요즘 우리는 대림절을 지나고 있다.이런 절기가 신자들에게 별로 감흥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발등에 떨어진 불이기 때문이다.먹고 사는 문제는 물론 중요하다.서로 골고루 나눠 먹고 사는 세상을 향한 노력은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그런 것을 등한히 여기고 하늘만 바라보라고 한다면‘종교는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여전히먹고 사는 문제 이전, 또는 그 이후를 말해야 한다.그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우선 먹고 사는 문제의 완전한 해결은 불가능하다.소유는 더 많은 소유를 자극할 뿐이지 만족시키지 못한다.그것을 우리는 21세기 한국사회에서 경험한다.또한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됐다고 해서우리의 삶이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다.현대인들이 동의..

실족 / 정용섭 목사

예수님은 당신이 메시아냐 하는 세례 요한의 질문을 받고이사야 선지자의 메시지와 비슷한 내용을 전한 뒤에‘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는 자는...’이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다.이런 말씀은 듣기에 따라서 쉽기도 하고, 또 어렵기도 하다.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를 실족하는 자라고 보면 쉽지만,실족하는 이유가 뭔지를 따지고 물으면 어렵다.쉬운 건 그만 두고 어려운 이유만 보자. 예수님으로 인해서 실족하는 가장 큰 이유는예수님에 대한 실망이다.복음서에는 예수님에게 호감을 갖고 찾아왔다가몇 마디 대화를 하다가 실망하고 물러간 이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그런 사람들이 제법 많았을 것이다.그들이 실망한 이유는 자신들이 원하는 대답을예수님에게서 찾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이런 이들을 ‘믿음 없는 자’라고 끊어 말하기는 어렵다.그..

세례 요한과 예수 / 정용섭 목사

내일 대림절 셋째 주일 설교의 성경 본문은마태복음 11:2-11절이다.거기에 세례 요한 이야기가 나온다.세례 요한은 기독교에서 그 위치가 미묘하다.복음서 기자들은 다 요한을 언급하는데 반해서서신에는 그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사도행전에는 요한의 제자들이 잠시 언급될 뿐이다. 세례 요한을 가장 자세하게 언급하는 복음서는 누가복음이다.공관복음서 중에서도 아주 유별나다.거기에는 요한의 출생 비밀도 나온다.예수의 출생 비밀에 버금갈 정도로 자세하게 나온다.더구나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친족 관계라고도 한다.다른 복음서에는 그런 말이 없다.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 받은 것이다.이건 역사적 사실로 추정된다.당시 나름으로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한 사람은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모..

헌금(12) / 정용섭 목사

헌금(12) 헌금을 주제로 하는 글이 너무 길었다.오늘로 마무리하자.재정의 사용처에 대한 이야기다.이것도 각각의 교회가 처한 형편에 따라서 다르니하나의 기준만을 절대화할 수 없다. 교회재정의 지출은 크게 세 가지다.1) 교역자 사례비2) 교회 운영 경비3) 교회 밖 지출세 가지가 아니라 크게 둘로 나누면교회 안과 교회 밖으로 구분할 수 있다.액수의 비중으로 보면세 가지로 구분하는 게 합리적이다. 내가 볼 때 세 항목의 비율은 다음이 원만하다.사례비- 30%교회 운영 경비- 30%교회 밖 지출- 40%이렇게 재정을 운용하기가 쉽지 않다.예컨대 1억 원의 경상비로 돌아가는 교회라고 한다면사례비를 연봉 3천만 원으로 해야 한다.이런 정도의 연봉은 대학교 졸업 신입사원 초봉이다.만약 교역자가 둘이 있는 교회라고..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눅 16:14-31) / 신동식 목사

영생을 준비하는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입니다. 먼 미래가 아니라 당장의 즐거움을 위하여 사는 자들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자라는 예수님의 평가는 많은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욕망을 채우기위한 악세라리에 불과합니다.예수님은 바리새인을 향하여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고 떠들지만 하나님은 마음을 아신다고 말씀합니다. 사람 앞에서 높아지는 자는 낮아집니다. 교만은 패망의 앞잡이입니다. 돈을 다스리지않고 사랑하는 자들은 일만 악을 만들어 낼 준비가 되어있습니다.예수님은 바리새인을 향하여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합니다. 율법은 복음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이제 율법은 복음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율법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더욱..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계2: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계2:16)  버가모교회를 아시고 칭찬하시는 주님.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순교를 당하는 상황에서도 신앙의 정절을 지켰다 하십니다.  또한 발람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랐다 책망하십니다. 탐심으로 우상을 숭배하고 세속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삶의 모순입니다.  내 안에 화석화된 신앙이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위선적 영성과 함께 세속에 물들어있습니다. 성령의 검 곧 진리의 말씀 앞에 서야겠습니다.

절망하지 말자 이것이 끝이 아니다. / 봉민근

그 화려했던 바로의 궁을 떠난 모세는 얼마나 외로웠을까?형의 낯을 피해 고향을 떠나 광야에서 노숙하던 야곱의 마음은 얼마나 두려웠을까?형들에 의해 노예가 되어버린 요셉의 애통함을 그 누가 알 수 있을까?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거지가 되어버린 욥의 심정을 우리는 모른다. 인생은 지내 놓고 난 다음에 논해야 하는 것이다.지금은 그 누구도 자신의 미래를 모르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다.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만이 나를 알고 나의 미래를 아신다.사울의 낯을 피해 동굴에서 지내던 다윗은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났다.얼마나 억울했으면 그 수많은 탄원시를 하나님께 올려 드렸을까?그렇지만 그들의 인생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주님과 함께 걸어온 인생이 헛되지 않음을 그들은 알았을 것이다.삶이란 영적인 전투다...

완전히, 영원히, 그리고 언제나! (히 7:20-28) / 김영봉 목사

해설:레위 지파 중에 아론의 자손들은 율법에 의해 자동적으로 제사장이 되었다. 반면, 하나님은 시편 110편에서, 멜기세덱 계열의 영원한 제사장을 세우겠다고, 맹세로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지키셨다(20-21절). 그로 인해 예수님은 “더 좋은 언약을 보증하시는 분”(22절)이 되셨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는데, 그 언약이 이스라엘의 불성실로 인해 깨졌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장차 “새 언약”(렘 31:31)을 맺으실 것이라고 예언하셨는데, 이사야를 통해 주신 예언에서는 그것을 “영원한 언약”(사 55:3; 61:8)이라고 부르셨다. 옛 언약은 조건적인 것이어서 결국 깨어졌지만, 새 언약은 무조건적인 것이어서 영원하다.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옛 언약을 따라 섬기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