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02 12

발람의 가르침을 따른 교회(계2:12-17) / 정병선 목사

버가모교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오늘 한국교회에 반면교사가 되는 교회입니다. 버가모는 매우 이교적인 도시였습니다.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는 성채 위에 가로가 약 37미터, 세로가 약 34미터나 되는 거대한 제우스 신전이 세워져 있을 만큼 여러 신을 숭배하는 도시였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사탄의 위’가 있는 곳이라고 했는데, 제우스 신전이 바로 ‘사탄의 위’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암튼 이 도시는 경제적으로 번창하는 도시이면서 황제 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아시아에서 최초로 로마 황제에게 바치는 성전을 건축한 황제 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당연히 모든 시민은 황제 숭배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여러 신전의 제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지목을 받을 만큼 도시 전체가 이교적이고 황제..

기독교에 대한 공부 / 정용섭 목사

나는 10대 중반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더 어릴 때는 교회에 나가는 동네 친구를 따라서성탄절 즈음에 몇번 나간 정도다.본격적으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뒤로는이런저런 상황에 의해서 꾸준하게 교회 생활을 했다.신학교를 나오고 전업 설교자로 살고 있지만 기독교 자체에 대해서 실제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성격상 그냥 교회 조직에 성실했을 뿐이다.그런 성실성이 나쁜 거는 아니지만그것으로 충분한 거는 아니다.그런 거로는 늘 구경꾼에 머물 뿐이다.구경꾼은 호기심에 의해서만 움직인다.그런 호기심으로는 기독교 영성의 중심으로 들어올 수가 없다.청소년 시절, 젊은 목사 시절의 내가구경꾼에 불과했다는 말은기독교 자체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는 뜻이다.겉으로야 그렇지 않지만 실제로는 그랬다.이제 나는 ..

낙뢰 후유증 / 정용섭 목사

낙뢰 후유증 지난 8월6일 오후 4시쯤영천 전 지역을 강타한 낙뢰로 인해서나는 일주일 동안 참 불편하게 지내다가이제야 어느 정도 복구되었다.그걸 일일이 설명하려면한 시간을 이야기해야 하니까그만 두는 게 좋겠다.앞으로 낙뢰 비슷한 게 떨어질 기미가 보이면무조건 하고 모든 선은 빼놓을 작정이다.조금 귀찮아 설마 했다가이번에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오늘 인터넷 회사 현장 기사가우리 집에 다녀갔다.내가 끙끙대면서 혼자 해결해보려다가 못한 걸그분은 그냥 5분 만에 해결해버렸다.나도 인터넷 선이 어느 경로로집안 구석구석을 뻗쳐 있는지 대충 안다.문제는 어떤 기기의 개념을 몰랐다는 데에 있다.나는 공유기와 허브의 차이를 몰랐다.그게 그건 줄 알았다.생긴 게 비슷했다.인터넷 원선이 들어가고나머지 나오는 몇 가닥 선..

설교를 준비하며... / 정용섭 목사

설교를 준비하며... 내일은 교회력으로 성령강림절후 제12주다.설교 본문은 눅 12:35-40절로 잡았다.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올 때하인들이 깨어 있어야만 한다.인자가 언제 올지 모르니제자들도 늘 준비하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본문에서 해결되어야 할 문제는 다음의 세 가지다.1) 초기 기독교는 무엇을 근거로 인자와 예수를 동일시했나.2) 인자 개념은 무엇인가?3) 준비는 무엇을 가리키나?더 줄이면,예수 재림 신앙은 무엇인가?더 노골적으로 질문하면,예수는 왜 아직까지 재림하지 않았나?또는,예수는 정말 재림할 것인가?질문이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이런 질문을 바탕에 두지 않으면저 텍스트를 해석할 수 없다. 다시 강조하지만,성서텍스트 자체가 해석사건이다.그게 하늘에서 ..

믿음과 인격 / 정용섭 목사

믿음과 인격 교회 다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인격은차이가 날까?이런 문제를 일반화해서 말하기는 힘들다.무엇을 인격으로 보느냐도 간단한 게 아니다.이런저런 까다로운 요소들은 다 접어두고전체적인 방향만 말한다면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인격적으로 나을 것이 없다.대한민국 사회 안에서만 볼 때,아마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일 텐데,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인격적으로 더 우월하지 않다. 벌써 아주 오래전 이야기다.감리교신학대학교의 어떤 교수가아래와 같은 질문을 설문으로 돌렸다.경제 윤리에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안 다니는 사람보다 더 나은가 하는 질문이다.이것은 기독교인의 윤리관에 대한 질문이다.별로 차이가 없다는 대답이 나왔다.물론 이 설문은 비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그들이 볼 때 기독교인들도..

냉담 신자 / 정용섭 목사

냉담 신자 특별한 이유 없이 오랫동안 성당에 나오지 않는 신자들을성당에서는 냉담자, 또는 냉담신자라고 한다.신앙이 식었다는 뜻이다.그렇다고 그들이 신앙을 완전히 포기한 것도 아니다.냉담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결국은 신앙을 완전히 놓치게 될 것이다.개신교회에서는 냉담신자를 어떻게 부르는지아직 의견이 모아진 게 없다.그냥 교회를 쉬는 신자,시험에 들린 분이라고 한다.그 의미는 가톨릭의 냉담신자와 비슷하다. 왜 냉담신자가 되는가?그 이유는 각 사람의 숫자만큼 여러 가지이다.그들이 신앙을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굳이 교회에 나올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거기에는 천성이 게으른 사람도 있을 것이다.목사의 설교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있지 않겠는가.개인적으로 큰 어려움이 있어서교회에 나올 정신적인 여..

"훈계에 착심하며 지식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잠언23:12) / 이금환 목사

"훈계에 착심하며 지식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잠언23:12)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보다 성경이 많은 시대는 없었습니다. 질 좋은 종이, 질 좋은 인쇄, 질 좋은 표지, 수십 가지의 성경, 같은 언어라도 셀 수 없이 많은 번역, 수천 가지의 언어로의 번역, 또 마음만 먹으면 수 많은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고, 내로라하는 성경 선생님들의 가르침도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우리의 중심에서와 우리의 삶의 가운데에서는 말씀의 갈증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갑니다.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는 말씀은 참말이며, 아모스의 시대 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향한 말씀인..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눅 8:1-15) / 신동식 목사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 사역은 계속됩니다. 예수님은 12제자와 함께 사역을 합니다. 그런데 이들을 돕는 지체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일곱 귀신들림에서 치유 받은 막달라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인 요안나와 수산나 그리고 다른 여인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소유로 섬겼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발적 섬김으로 건설됩니다.하나님 나라 복음 사역에 제자들과 여인들의 이름이 기록되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파격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정신입니다. 바울은 이 모습을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강조합니다(갈 3:28).예수님은 사역의 주체들에게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칩니다.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증거될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세상이 왜 이처럼 비참한가?

세상이 왜 이처럼 비참한가?      글쓴이/봉민근[1]아 땅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먹을 것이 없어 헐벗고 굶어 죽는 사람들이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주님은 먹을 것 입을 것을 염려하지 말라하셨는데 인류는 의식주 문제로 심각한 고통을 받고 있다.왜 그럴까?하나님의 말씀이 틀린 것은 아닐까?지구에서 생산되는 식량이 1년에 200억 인구가 먹고도 남을 정도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문제는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들의 탐욕 때문이다.한쪽에서는 식량이 남아서 동물 사료나 심지어 바다에 가져다 버리기까지 한다.잘 사는 나라는 흥청망청 음식물 쓰레기가 넘쳐나지만 또 한쪽에서는 쓰레기통을 뒤져가며 살아가고 있다.나눌 줄 모르는 사랑 없는 사람들의 욕심 때문에 지구는 몸살을 앓고 있다.한쪽에선 죽어..

나와 복음을 위하여 (막 10:23-31) / 김영봉 목사

해설: 그 사람이 떠나가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재산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23절)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적잖이 놀란다(24절). 그들의 생각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은, 한 술 더 떠서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25절)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과장법을 섞은 비유로서, “가능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 말씀에 제자들은 더욱 놀라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26절) 하고 묻는다. 당시 유대교 가르침에 의하면, 부는 의로운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따라서 부자가 구원 받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더 말할 것 없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다. 하나님께는 그렇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