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후 14주, 2024년 8월 25일
예수를 등지는 제자들
오늘 설교 본문인 요 6:60절에 따르면 제자 중 여럿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라고 수군댔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의 생각을 조금 더 풀어서 정확하게 설명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설명을 듣고도 결국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본래 예수님의 가르침이 새롭고 감동적이며, 그를 통해서 놀라운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랬던 그들이 제자로서의 삶을 포기했다는 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무슨 일이 당시에 일어난 것일까요?
그들을 믿음이 부족하다든가 인격적으로 어딘가 크게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보면 곤란합니다. 나름대로 진정성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 리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런 종교적 진정성만으로는 제자로서의 길을 흔들림 없이 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에 적지 않았습니다.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재물이 많은 사람’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0:17)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도 싹싹하게 잘했습니다. 다만 그가 부자였기에 재물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라는 말씀 앞에서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떠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종교적 감수성만으로는 예수의 제자로 살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잠시는 예수 곁에 머물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에는 등집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제자들이 예수님을 불편하게 여기게 된 근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상황을 정확하게 알려면 오늘 설교 본문이 포함된 요 6장 전체를 살펴야 합니다. 소위 ‘오병이어’ 사건이 벌어진 다음에 예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서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6:35) 그러자 거기 모였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42절) 그들은 예수의 주장이 언어도단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예수님의 설교가 계속 이어지고, 52절에서 유대인들은 다시 서로 옥신각신 다투면서 이렇게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이런 논란을 옆에서 지켜보던 제자들도 예수님 말씀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겠지요. ‘예수 선생이 저런 방식으로 설교하면 누가 알아듣겠나. 자기를 믿으면 영원히 산다는 게 말이 되나? 너무 일방적이야.’ 앞에서 짚은 대로 제자 중 일부가 결국 예수를 떠났습니다.
그들의 결정이 이해는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뭔가 세상을 바꿔보려던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개혁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유대의 독립을 꿈꾸던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여기는지를 물었을 때 제자들은 마 16:14절에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라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당시 사람들은 여기서 열거된 위대한 선지자가 다시 나타나서 세상을 바꿔주기를 기대했습니다. 예수가 바로 그런 선지자일지 모른다고 기대한 겁니다. 예수께는 그런 선지자가 갖춰야 할 능력이 분명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요 6:15절에 따르면 오병이어 사건 뒤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사람들이 모여서 힘이 생기면 세상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보겠다. 더 나아가서 로마 제국까지 몰아내겠다. 여러분을 부자로 만들어 주겠다. 지상천국을 세워보겠다.’ 하고 사람들을 선동하는 게 아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를 내가 마지막에 살릴 것이다.’(54절)라고 알쏭달쏭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당장 인생살이가 고달픈데 ‘마지막’에 살린다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예수에게 희망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일반 유대인만이 아니라 안타깝게 제자들도 떠났습니다. 요한복음이 기록된 때가 1세기 후반이니까 당시 교회의 위태로운 상황이 본문에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시몬 베드로의 대답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자네들도 이제는 나에게 실망하고 떠나려는가.’(요 6:67) 하고 물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68-69절입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알고 알았사옵나이다.'
이 구절은 앞에서 언급한 마 16:13절 이하와 연결됩니다.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등등이라는 대답을 들은 뒤에 다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여기느냐.’라고 물으셨고, 제자의 대표 격으로 베드로가 나서서 유명한 말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기대하던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와는 질적으로 다른 분이라는 뜻입니다. 만약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위대한 선지자, 사회 개혁가, 나라를 구할 정치 지도자, 타의 추종을 불허할 도덕 선생, 천지개벽 사상가로 받아들였다면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 영웅들과 완전히 차원이 다른 메시아로 믿었고 선포했습니다. 그 신앙을 오늘 요한복음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상황이 그렇게 녹록지 않습니다. 본문 61절에서 ‘너희에게도 이 말이 걸림돌이 되느냐.’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많은 제자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신앙고백에 걸려서 넘어졌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포기했습니다. 그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겁니다. 우리는 그들과 다른가요? 달라야겠지요. 그러나 어쩌면 떠날 용기가 없어서 그냥 엉거주춤 머물러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그리스도교 신앙을 오해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여전히 만나와 오병이어 기적에 솔깃해하고, 기복주의 신앙에 머뭅니다. 예수를 통해서 얻는 심리적 안정감에 만족하고, 더 노골적으로는 죽은 다음의 운명에 보험을 든다는 심정일지도 모릅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가 나가는 교회의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사실, 성가대의 찬양이 수준 높다는 사실, 사회봉사를 열심히 한다거나 세계 선교와 교회 개혁에 모범적이기에 그 교회를 다니겠지요. 다 좋은 일들이고 필요한 일들입니다. 그러나 엄중하게 말하면, 이런 생각으로만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떠나지 않는다는 건 아직 예수님의 말씀을 직면하지 못했거나,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이런 점에서 요즘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차라리 잘된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몬 베드로는 역시 달랐습니다. 시몬 베드로만은 아닙니다. 실존 자체가 위태로웠던 1세기 말 요한 공동체에 남아있던 교인들 모두를 대표해서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말입니다. 요한복음이 전하는 이 신앙고백을 여러분은 실제로 알고 믿으시는지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 누구에게로 갈 수 있겠냐고 말할 수 있으신가요? 이런 신앙이 말로만이 아니라 삶의 내용으로 점점 더 깊이 자리하고 있나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주께 있다.’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영원한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께 가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영원한 생명이라는 이 간략한 문장이 무슨 뜻인지를 오늘 우리는 좀 더 깊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여기서 예수의 제자와 제자인 척하는 사람이 구분됩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 중에서 다른 내용은 자세하게 몰라도 되지만 이 대목만은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예수를 영원한 생명의 말씀으로 인식하고 경험하지 못한다면 화려한 교회당과 수천, 수만 명의 교인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신천지에 나타나는 그 열광적인 종교 현상과 다를 게 무엇이겠습니까. 제가 아는 한도 안에서 설명해보겠습니다.
‘영원한 생명’에서 우선 영원하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숫자를 먼저 생각해보십시오. 가장 큰 숫자는 개념으로만 있을 뿐이지 실제로는 없습니다. 가장 큰 숫자에 다시 1을 더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알고 경험하는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고 일시적입니다. 무한하지 않고 유한합니다. 하루살이에 비하면 사람이 사는 시간은 영원에 가깝기는 하나 영원하지 않습니다. 지구의 나이는 45억 년 내외입니다. 매우 긴 시간이기는 하나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빅뱅 이후 우주의 시간인 138억 년은 상상할 수 없이 긴 시간이기는 하나 영원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일까요? 우주여행을 주제로 하는 SF영화를 보신 분들이 계시겠지요.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떠났다가 일 년 만에 돌아왔더니 그사이에 지구는 5천 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들리기는 하나 우주 물리학에서 보면 가능하다고 합니다. 빛의 속도로 날아가는 우주선을 타면 시간이 흐르지 않고, 더 빠른 우주선을 타면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일상적인 방식으로 설명해볼까요? 지금 우리는 똑같은 공간과 시간 안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어떤 교인은 예배가 지루해서 시간이 너무 천천히 흐른다고 느낄지 모르며, 어떤 교인은 반대로 느끼겠지요. 똑같은 분량의 시간인데도 사람에 따라서 시간의 속도가 다르게 느껴집니다. 그런 건 느낌일 뿐이지 실제로는 똑같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여기 카페에 두 사람이 각각 앉아 있습니다. 한 사람은 자기에게 사기를 친 사람을 불러내어 앙갚음하려고 분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중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연인을 기다리면서 세계 단편 소설집을 한 시간 동안 읽는 중입니다. 시곗바늘로는 똑같은 한 시간이나 질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시간입니다.
시간의 질적인 변화
성경이 말하는 영원은 시간의 무한 연장(endless)이 아니라 시간의 질적인 변화(eternal)입니다. 연대기적인 시간(chronos)이 아니라 의미 충만한 시간(kairos)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온다는 성경의 표현이 이를 가리킵니다. 구원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을 알파와 오메가라고 표현했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의 단조로운 흐름으로만 세상을 경험하면서 살면 성경이 말하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영원한 생명’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미’ 왔으나 ‘아직’ 기다려야 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이해할 수 없으며,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의 신비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냥 시곗바늘의 중압감에 떨어져서 초조해하거나 ‘나 몰라라.’ 합니다. 자기 인생의 마지막이 곧 온다는 사실로 인해서 불안해하거나 ‘나만 죽나 모두 죽으니까 상관없어.’ 하는 식으로 넘어갑니다. 세상이 말하는 기준에서 자기를 성취하려고 매달리거나 모든 게 의미가 없다는 허무주의에 떨어집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영원한 생명을 얻었는지가 확실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죽은 다음에 천국에 가서 영원히 행복하게 산다는 말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영원하다는 게 시간의 무한 연장이 아니라 질적으로 변하는 것이라고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은 생명이 질적으로 변하는 사건입니다. 그걸 교회에서는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종말론적 생명의 선취 사건인 부활 말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말씀’은 부활한 분의 말씀이고 그분의 운명이고 그분의 약속입니다. 이처럼 부활하신 분이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기에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라고, 즉 하나님이라고 믿었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은 이 대목에서 예수의 부활을 증명해봐, 하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물리학적이고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직접 증명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런 증명은 앞에서 언급한 크로노스의 시각입니다. 부활은 진심으로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생명 경험처럼 예수를 진실하게 믿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궁극적인 희망이고 기다림이고 사랑입니다. 이 세상의 질서인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제자들은 이 사실을 예수의 구체적인 실존 역사에서 경험했습니다. 유대의 종교법과 로마의 실정법은 예수를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죽어야 할 죄인으로 선고했습니다. 예수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았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로 십자가에서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절규하면서 죽었습니다. 제자들도 모두 흩어졌습니다. 그것으로 예수의 운명은 끝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 후에 예수는 제자들에게 ‘살아있는 자’로 나타났습니다. 제자들 스스로 당혹스러운 현상이었습니다. 자기들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었으나 죽었던 자가 그들의 삶에 ‘살아있는 분’으로 나타나셨다는 사실만은 분명했습니다. 그 경험이 ‘장사 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라는 문장으로 사도신경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제자들은 다시 모이기 시작했고, 죄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으로 인해서 죄와 죽음이 극복되었다는 제자들의 믿음은 다음의 사실을 가리킵니다. 유대교의 종교법과 로마의 정치법은 사람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고상한 종교와 민주적인 정치라고 하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제공하지는 못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민주화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사람은 종교의 자유와 정치의 자유를 만끽합니다. 그렇게 만끽하는 정도로 세상이 정말 좋아졌습니까? 정말 인간다워졌습니까? 필리핀 여성분들을 가사도우미로 데려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수준의 월급을 주면 안 된다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새로운 인간으로 변하고 있나요? 거리가 멉니다. 죄와 죽음의 질서가 우리 개인과 사회를 지배하고 있기에 삶의 포즈는 세련미를 갖추었을지 몰라도 삶의 내용은 전혀 달라지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질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경험했고 약속으로 받았기에 더는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겠다는 욕망에 떨어지지 않게 되었으며, 자기 소멸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났습니다. 우리의 삶을 옥죄는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궁극적인 차원에서 예수와 함께 자유로운 영혼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기뻐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이 전해준 시몬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여러분과 함께 다시 읽고 싶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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