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하늘과땅사람 62

하늘땅사람이야기28 - 냉이꽃 피어있는 담이었구나

잘 지내고 계신지요? 소서小暑가 코 앞이이서 한낮에는 조금 덥지만 그래도 시원한 바람이 있으니 고마운 초여름입니다. 맑은 바람에 취하고 배부를 수 있다면 잠시간 누리는 낙으로 족한 것 아니냐는 옛 사람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얼마 전까지 교회 포도나무 아래에서 다른 화초들의 등쌀을 꿋꿋이 견디어내며 예쁜 꽃을 피어내던 매발톱꽃이 이제 마침내 화려한 꽃시절을 마감했습니다. 어느 날 외부에 다녀왔더니 옥매 열매는 사무실 식구들이 다 따먹었더군요. 대추나무에 하나 둘 열매가 달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는 기쁨이 큽니다. 무엇보다 제 마음을 환하게 해주던 것이 해바라기였습니다. 쑥쑥 키가 커지더니 어느 날 노란빛 고운 꽃을 피어 올렸습니다. 한 송이 두 송이 날마다 해바라기의 개화를 지켜보고 바라보는 것이 분주한 가..

하늘땅사람이야기27 - 무거운 삶 가볍게 살기

무거운 삶 가볍게 살기 잘 지내고 계시지요? 이제 장마철이 되어서인지 대기가 축축한 게 후텁지근해요.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 있다 보면 눈꺼풀은 무거워지고 몸은 나른해져요. 그럴 때면 밖으로 나가 마당가에 심겨진 여러 식물들과 눈맞춤을 하지요. 요즘은 나리꽃과 백합화가 한창입니다. 키 작은 옥매(玉梅)나무에는 오종종 붉은 열매가 매달려 있습니다. 올해는 유난히 포도도 많이 맺혔습니다. 초가을이 되어 보라색으로 익어갈 것을 생각만 해도 흐뭇해집니다. 매실은 따지 않고 두었더니 하나 둘씩 저절로 떨어지더군요. 가을에 알밤을 줍듯 화초 사이에서 매실을 줍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매실을 손에 쥐어보기도 하고 냄새도 맡아보고 그 오묘한 빛깔과 모양에 눈길을 주다가 가만히 베어물기도 합니다. 새콤달콤한 맛이 입안에 퍼..

하늘땅사람이야기26 - 13인의 아해가 거리로 질주하오

평안하신지요? 사위가 어둠에 묻혀 고요한 이 이른 새벽 시간이 참 좋습니다. 창가에 서서 잠들어 있는 도시를 바라보았습니다. 오늘 하루도 두루 평안하기를 빌고 또 빌었습니다. 서재로 돌아와 십자가 아래에 촛불을 밝혀 놓고 물 위에 아로마 향 서너 방울을 떨어뜨렸습니다. 호흡을 가지런히 하고 그 향기가 몸과 마음에 스며들도록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서없이 떠오르는 얼굴들을 마주하며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빌었습니다. 이 시간이 내게는 가장 깊은 소통의 시간입니다. 한 두어 달 얼굴이 보이지 않아 궁금하던 차였습니다. 참 이상하지요,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르고 '어떻게 지내나?' 싶은 생각이 들 무렵이면 마치 거짓말처럼 그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선생님도 그랬습니다. 선생님은 지방에 머무느라 교회..

하늘땅사람이야기25 - 둘이서 함께 걷는 길

둘이서 함께 걷는 길 잘 지내시지요? 이제 결혼식이 몇 시간 남지 않았군요. 가슴 시리면서도 아름다웠던 그 사귐의 시간을 조금은 알고 있기에 두 분의 맺어짐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축복하고 싶습니다. 유대인 철학자인 마틴 부버는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 속에는 인생길에서 우리가 만난 수많은 이들의 흔적이 배어 있습니다. 길가에 서 있는 나무의 상처와 옹이는 나이테와 더불어 그 나무가 견뎌온 세월을 보여줍니다. 그건 우리의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몸과 마음에는 각자가 거쳐온 시간의 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의 만남이 있습니다. 하나는 주어진 만남입니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관계가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그러하고 형제자..

하늘땅사람이야기24- 어느 장인의 작업실

안녕하세요? 벌써 절기는 망종에 접어들었습니다. 분주한 일정에 따라 이곳저곳 다니다 보니 벌써 초여름의 문턱을 넘고 있네요. 보리 추수는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부지런한 농부들이 내다 심은 벼포기가 제법 자리를 잡은 듯 보이더군요. 바람이 불면 제법 흔들흔들 춤도 추면서 한 계절을 넉넉히 살아내는 거겠지요. 도시에 살고 있지만 제 몸 속 깊은 곳에 새겨진 계절의 리듬을 잊지 않으려고 서재 뒤편 손이 닿는 곳에 를 두고 지냅니다. 달이 바뀔 때마다 그 계절의 노래를 찾아 소리내어 읽습니다. 그럴 때면 떠나온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 물결처럼 번져오기도 합니다. 내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가 대대로 살아온 삶의 방식을 떠올리면 괜히 가슴이 울컥해지기도 합니다. 나이가 드는 증거일까요? 오월이라 중하(仲夏)되..

하늘땅사람이야기23- 링반더룽의 상황 속에서

평안하신지요? 새벽에 일어나 창밖을 내다봅니다. 아직 붉이 밝혀진 집들이 별로 없네요. 혼곤한 잠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가여운 생각이 듭니다. 낮 동안 도시의 번잡과 악다구니 속에서 사느라 지친 몸과 마음이 얼마나 회복될 수 있을까요? 저 멀리 반 너머 가려진 북한산 자락 너머로 희뿌윰한 빛이 스며들고 있습니다. 허리를 곧추 세우고 앉아 몸과 마음을 거두어보려 하지만 마음은 종작없이 떠돌 뿐입니다. '아, 고단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터져나온 신음소리입니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도 문득문득 멈추어 선다지요? 너무 빨리 달리면 영혼이 따라올 수 없기 때문이랍니다. 웃어 넘길 수도 있지만 이 말이 요즘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을 보면 제 삶의 속도가 너무 빠른 것 같습니다. 해..

하늘땅사람이야기22- 마주 잡을 손 한나

평안하신지요? 계절은 벌써 소만 절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만물의 생장함이 두루 신비로운 나날입니다. 교회 어르신들을 모시고 하루 나들이를 다녀왔습니다. 가만가만 나누시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차창 밖 풍경에 자꾸만 시선을 빼앗겼습니다. 아카시아 꽃과 더불어 바람에 뒤채는 나뭇잎들이 은빛 물결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잘 구획된 농지에 이앙기를 이용해 모를 심는 농부들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쓸쓸한 풍경이었습니다. 논에는 기계를 조작하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내기를 할 때면 덩달아 흥분상태가 되어 눈두렁 여기저기를 종작없이 뛰어다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다가 어른들이 못줄 잡는 일을 맡겨주면 제법 일꾼 흉내를 내기도 했습니다. 품앗이하러 온 마을 어른들이 허리를 굽히고 열을 ..

하늘땅사람이야기21- 옹송그리며 쓰는 반성문

옹송그리며 쓰는 반성문 평안하신지요? 집에서 사무실로 나오다 보니 숙대 뒤뜰에 있는 산딸나무가 희고 정갈한 꽃을 피워냈더군요. 몇 해 전에 고려대학교에 계신 어느 교수님이 네 갈래로 피어나는 꽃잎이 십자가를 닮았다며 교회 마당에 심어보라 일러주던 꽃이기에 반가움이 더 컸습니다. 이집저집 담장을 흘낏거리며 걸었습니다. 탐스럽게 핀 장미꽃들이 싱그러웠습니다. 문득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했던 릴케가 떠올랐고, 곧 마음 속에서 이미 상투어로 변해버린 그 문장을 떨치려고 고개를 가로 저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루 살로메가 떠올랐고, 그 매혹적인 여인을 향한 릴케의 연정이 되짚어졌습니다. "내 눈빛을 꺼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아 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

하늘땅사람이야기20- 바라보아야 할 별 하나

안녕하세요? 어제 만남은 참 반갑고 유익하고 흐뭇했습니다. 사실 그 며칠 전, 알지 못하는 분으로부터 온 메일, 그것도 '커피 한 잔 내려달라'는 제목을 달고 온 메일을 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쳤습니다. 제법 따뜻하고 친밀한 인사말로 시작되는 메일이 대개는 광고인 경우가 많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메일을 열었습니다. 어쩌면 '이번에도 금방 삭제 버튼을 눌러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메일을 읽은 동안 글을 쓰신 분이 참 겸손하신 분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강박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널음새가 절로 드러났던 까닭입니다. 글에도 그 사람의 존재가 오롯이 드러나는 법이지요. 무작스런 말본새와 태도로 남의 속을 건드리는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요? 그..

하늘땅사람이야기19 - 이디오테스

이디오테스(idiotes) 평안하신지요? 가장 빛나는 계절인 봄을 우리는 늘 고통의 기억과 더불어 지내게 됩니다. 접동새 우는 4월에는 채 피어보지도 못한 채 스러져간 세월호 참사자들이 떠오르고, 5월이면 1980년 광주에서 죽어간 넋들을 떠올리게 되고, 6월에는 이 한반도를 피로 물들인 전쟁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뜬금없이 유치환의 '깃발'이 떠오릅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해 흔드는/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아마도 저 광장과 길가에서 나부끼고 있는 노란 리본과 배너 때문일 것입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는 형용 모순의 표현 때문에 어떤 절절한 아픔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옵니다. 언제쯤 되면 우리는 이 봄을 한껏 경축할 수 있을까요? 노루처럼, 사슴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