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하늘과땅사람 62

하늘땅사람이야기38 - 타르튀프적 존재를 넘어

타르튀프적 존재를 넘어 안녕하세요? 백로가 지나서인지 조석 기운이 제법 시원합니다. 이맘 때면 병처럼 가을 들녘에 나가 그 황홀한 노란 빛 속에 머물고 싶어집니다. 이상하지요? 바람에 조용히 흔들리는 벼포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눈을 감으면 어떤 충만함이 느껴집니다. 종교체험과는 다른 묘한 느낌입니다. 바람과 햇빛과 달빛이 만들어낸 적요한 장관 앞에서 한껏 겸허해집니다. 어제는 초면이었지만 마치 오랜 지기를 만난 것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비교적 낯가림이 좀 있는 편인데, 처음부터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일 수 있었던 것은 너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언어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다소 지친 듯 보이긴 했지만 말 속에 담겨 있는 진실과 열정 또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도종환은 라는 시에서 "장군죽비로..

하늘땅사람이야기37 - 누구나 그 수심을 모른다

누구나 그 水深을 모른다 잘 계신지요? 세상사에 누구보다도 예민하신 분이기에 잘 계실 수 없음을 잘 알면서도 이런 상투적인 인사를 드리는군요. 파란 가을 하늘이 서러운 날들입니다. 신문에서 한 장의 사진을 본 후 제 마음은 그 언저리를 맴돌뿐 다른 곳으로 이행할 줄을 모릅니다. 무지근한 아픔에서 헤어나올 길이 없습니다. 속을 모르는 분들은 내 얼굴이 거칫하다며 잘 먹고 잘 쉬라고 걱정해주십니다. 내 얼굴이 어때서 그러냐고 엉너리쳐 보지만 마음의 어둠만은 숨길 수가 없는 모양입니다. 아일란 쿠르디, 세살박이 시리아 난민, 캐나다로 망명하고 싶었지만 결국 장벽처럼 버티고 선 푸른 바다에서 다섯살박이 형 굴립과 엄마 레함과 더불어 생을 마감함. 감청색 짧은 바지에 붉은 색 티셔츠를 입고 앙증맞은 운동화를 신고..

하늘땅사람이야기36 - 만남의 용기

평안하신지요? 엊그제 보름달 보셨어요? 어떤 모임에 가서 강연을 마치고 나오는데, 산 위에 걸린 달이 마치 세수라도 하고 나온 것 같이 청신한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슬프도록 깨끗한 달이었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들려주는 프란체스코의 일화가 떠올랐습니다. 아씨시의 거리를 배회하던 그는 허공 위로 두둥실 떠오른 보름달을 보았습니다. 온 세상이 마치 공중에 떠서 흘러가는 것 같았습니다. 유현하고 미묘하기 이를데 없는 절대의 세계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예기치 못한 기적과 마주친 것 같은 황홀감이 그의 가슴으로 흘러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그 기적을 즐기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로 달려가 종탑에 올라갔습니다. 그는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종을 울렸습니다. 깊은..

하늘땅사람이야기35 - 독사의 혀같이 징그러운 바람이여

독사의 혀 같이 징그러운 바람이여! 여름의 끝자락에 또 다시 큰 태풍이 다가오듯 마음이 심란합니다. 비무장지대 안에서 벌어진 목함 지뢰 폭발로 촉발된 군사적 위기가 자못 심각합니다. 한미연합훈련인 을지프리덤가디언(UFG) 훈련이 시작되기 전 우리 군은 오랫동안 중단했던 대북 심리전 방송을 재개했습니다. 그리고 포격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북한의 김정은은 준전시상태를 선포하고 22일까지 대북방송을 중단하지 않으면 전면전도 불사하겠다고 큰 소리를 치고 있고, 우리 정부는 '단호하게' 대처하겠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치킨 게임인 셈입니다. 그런데도 국민들은 늘 듣던 노래를 다시 듣는 것처럼 심드렁합니다. 분단상황 속에서 오래 살아온 탓인지 다소 불안하기는 하지만 설마 무슨 일이 있겠느냐고 애써 현실..

하늘땅사람이야기34 - 아름다운 영혼의 성좌

아름다운 영혼의 성좌 주님 안에서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황급히 올라오느라 인사조차 드리지 못하고 왔습니다. 결례를 한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는 한 이틀 에어컨 바람에 시달린 탓인지 간헐적으로 기침이 터져 나와 밤잠을 이루지 못하게 하네요. 잠을 이루지 못하니 생각이 많아집니다. 비몽사몽간에 써야 할 글을 머리 속에서 몇 번씩 썼다가 지우곤 했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그 찬란했던 생각의 편린들이 빛을 잃고 만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 생각의 단초를 놓치고 싶지 않아 조바심합니다. 인생을 꿈이라고 말한 이들이 있습니다. '탑상편'에 나오는 '조신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세달사라는 절에 살던 그는 절에 속한 장원(莊園) 관리를 위탁받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태수 김흔공의 딸의 자태에 반해 전전긍긍하지요. 그는 ..

하늘땅사람이야기33 - 회한과 희망 사이

평안을 빕니다. 무더위에 어떻게 지내세요? 정말 덥지요? 전에는 사무실이 너무 더워 일을 하기 어려우면 가끔은 카페를 찾기도 했는데, 요즘은 그저 부채질이나 하면서 더위를 견디고 있습니다. 냉방이 잘 된 카페에 한 시간 정도 앉아 있으면 몸에 한기가 들어서 컨디션이 나빠지곤 했습니다. 그런 기억 때문인지 차라리 더위에 맞서는게 낫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이제 입추와 처서 사이를 지나고 있으니 곧 더위도 한풀 꺾일 겁니다. 가끔은 시원한 계곡을 찾아가 탁족을 하면서 계곡을 스치는 바람과도 만나고, 새들의 노랫소리도 듣고, 물고기와 희롱도 하고, 한시 몇 편을 낭독하며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일상의 쳇바퀴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나도 어쩌면 그만큼 길들여진 것인지도 모르..

하늘땅사람이야기32 - 세속적 우상과의 싸움

세속적 우상과의 싸움 그동안 평안하셨는지요? 무더위가 절정입니다. 새벽에 일어나 앉아 있는데도 온 몸에 땀이 배어드는 것을 보니 삼복 더위라는 말이 빈말이 아님을 알겠습니다. 방충망에 붙어 있는 매미 울음소리가 처연합니다. 가뜩이나 무더운 날에 우리 마음에 불을 지르는 이들로 인해 더욱 견디기 어려운 날들입니다. 60대 중반의 아주머니 한 분은 정부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정부를 비판하느냐며 다짜고짜 세월호 유가족의 뺨을 때렸다지요? 그리고 '애들 운명이 그것뿐'이라는 막말까지 서슴치 않았다고 합니다. 강자와 자기를 철저히 합일화하는 이의 치기로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습니다. 대통령의 동생인 박근령 씨가 일본의 포털 사이트인 '니코니코'와의 대담에서 한 말을 접하고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

하늘땅사람이야기31 - 호모 비아토르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잘 지내고 있지요? 이제 떠나실 시간이 다가오네요. 이번에 머물게 되는 곳은 캐나다에 있는 후터라이트 공동체라고 하셨지요? 사실 그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후터라이트(Hutterite) 공동체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오스트리아의 재세례파 신자였던 야콥 후터(Jacob Hutter, 1500-1536)가 시작한 생활공동체더군요. 가톨릭에 속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탄압을 피해 모라비아로 피신하고, 30년 전쟁 후에는 중부 유럽 여러 도시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1874년에 미국으로 이주했고, 세계대전 때 양심적 병역 거부 문제로 미국 정부와 대립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주로 캐나다에 머물면서 사도행전 2장 43-47절에 언급되고 있는 생활 공동체를 현실 ..

하늘땅사람이야기30- 인간보다 이상한 존재는 없다

인간보다 이상한 존재는 없다 이상하지요? 초복이 지나면서 오히려 바람이 시원해졌습니다. 물론 며칠 못 가 여름이 본래의 성정을 회복해 우리를 고문하리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며칠 잘 지냈습니다. 내 방에 들어올 때 땀을 흘리고 있는 것을 보고 그 먼 길을 자전거로 왔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짧은 바지 아래 드러난 근육이 제법 볼만하더군요. 자전거를 못 탄 게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도 안 납니다. 목요일 밤이면 교우들과 어울려 한강변을 달리곤 했는데, 이젠 그런 호사마저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창고 한 구석에 처박힌 채 바람까지 다 빠진 자전거를 볼 때마다 묘한 자책감과 상실감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시간을 낼 수 없을 만큼 분주한 것은 물론 아닙니다. 다만 좀 게을러진 거지요. 거미줄에 매달린 채 버둥거리는 곤..

하늘땅사람이야기29 - 서로 따뜻하게 비벼대면서

서로 따뜻하게 비벼대면서 이제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려나 봅니다. 하긴 초복에 이르렀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조용히 엎드려 지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요즘 심정이 참 복잡합니다. '배신의 정치' 운운 하면서 의원들이 뽑아놓은 여당 원내총무를 인격 말살하는 대통령이나, 대통령의 심기 경호를 하느라 기본적인 도의조차 저버리는 여당 동료 의원들이나, 강 건너 불구경하듯 나몰라라 하는 야당 의원들이나 다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적'이라는 단어가 무얼 함축하는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지만 적어도 진실한 삶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진실은 허위의 부정'이라는 수전 손택의 말이 떠오릅니다. "세계는 기본적으로 허위로 가득 차 있고, 진실은 언제나 허위를 '거부'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