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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땅사람이야기30- 인간보다 이상한 존재는 없다

새벽지기1 2022. 2. 28. 07:22

인간보다 이상한 존재는 없다

 

이상하지요? 초복이 지나면서 오히려 바람이 시원해졌습니다. 물론 며칠 못 가 여름이 본래의 성정을 회복해 우리를 고문하리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며칠 잘 지냈습니다. 내 방에 들어올 때 땀을 흘리고 있는 것을 보고 그 먼 길을 자전거로 왔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짧은 바지 아래 드러난 근육이 제법 볼만하더군요. 자전거를 못 탄 게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도 안 납니다. 목요일 밤이면 교우들과 어울려 한강변을 달리곤 했는데, 이젠 그런 호사마저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창고 한 구석에 처박힌 채 바람까지 다 빠진 자전거를 볼 때마다 묘한 자책감과 상실감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시간을 낼 수 없을 만큼 분주한 것은 물론 아닙니다. 다만 좀 게을러진 거지요. 거미줄에 매달린 채 버둥거리는 곤충처럼 나는 현실의 거미줄에 걸린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시리아 난민 지원을 위한 평화의 철인 3종 경기>에 참가하는 우리교회 젊은이들을 대견해 하면서도 선뜻 그들을 따라 나서지 못합니다.

 

교인 수 20명 남짓한 교회에서 어쩌면 그리도 다양한 일들이 벌어지는지 모르겠다고 하셨지요? 이야기를 듣는 동안 '정말 그런 일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자기 속에 있는 욕망을 타자에게 투사한 후, 거기서 비롯된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는 일이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러나 막상 그 일에 직면하게 되면 누구나 당혹감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나름대로 그 일을 잘 처리하고도 나를 찾아왔던 것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면서 입은 내면의 상처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더군요. '잘 견디라'거나 '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등의 말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실 필요한 것은 충고가 아니라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마당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속사회>의 저자인 엄기호 선생은 '곁'과 '편'이라는 말로 우리 시대를 진단하더군요. 그는 '곁'은 말하는 자리가 아니라 듣는 자리에 가깝다고 말합니다. 

 

"곁에서 듣는 이야기는 고통 혹은 슬픔에 찬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이 이야기들은 논리정연하기보다는 오히려 비명과 한숨, 절규와 한탄이 뒤죽박죽 섞인 이야기들이다"(엄기호, <단속사회>, 창비, 2014년 3월 28일, p.6)

 

그는 곁에서 듣는 이는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아직 '말이 되지 못한 말'을 듣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말해진 것 그 너머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대화 상대자에 대한 깊은 애정이 필수적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애굽에 있는 당신의 백성들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합니다. 부르짖음 혹은 신음은 논리적으로 구조화되지 못한 말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말을 너무나 분명하게 알아들으셨습니다. 

 

다른 이를 모함하고 교회 안팎으로 나쁜 소문을 내고 다니는 사람을 용납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겁니다. 교회의 일치와 평안을 뒤흔드는 사람을 보면 화가 나기도 하고, 그에게 받은 모욕을 되돌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래도 마태복음 18장의 권고를 잘 따르셨더군요. 홀로 권고해도 따르지 않는다면 교회가 함께 그 문제를 풀어가야지요. 하지만 그분도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받은 상처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않은 가련한 사람일 터이니 함부로 정죄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를 마음으로 용납하고 공동체 속에 다시 받아들이는 문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준비도 되지 않은 채 그에게 손을 내밀면 서로 더 큰 상처를 입을 가능성이 큽니다. 오세영 시인은 '그릇'이라는 시에서 "깨진 그릇은/칼날이 된다./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날이 된다'고 노래했습니다. 그렇지요. 우리 입술을 순하게 받아주던 사기 그릇도 깨지면 칼날이 됩니다. 평소에 부드럽고 따뜻하게 사람을 대하던 사람도 어느 순간 깨진 그릇이 되어 다가오는 이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도무지 용납하기 어려운 이들도 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어느 대학 교수의 엽기적인 행각에 들끓고 있습니다. 그는 영상 디자인 분야의 최고 전문가라고 하더군요. 한 마디로 그는 잘 나가는 사람입니다. 제자들에게 일자리를 주선해주기도 하고, 교수가 되도록 힘을 써주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그가 자기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타자를 지배하는 달콤한 맛에 빠졌다는 데 있습니다. 타자에게 자기의 의지를 강제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유혹입니다. 일찍이 윤흥길은 소설 <완장>에서 이런 문제를 다뤘습니다. 그것이 완장이든 계급장이든 직급이든 사람들은 그것과 자기를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교수는 자기가 관여하는 단체에 제자를 취직시킨 후, 일을 잘하지 못한다 하여, 손해를 끼쳤다 하여, 맘에 들지 않는다 하여 그를 폭행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피해자는 그런 모욕과 폭력을 감수했습니다. 그 교수를 통해 자기 앞길이 열리기를 소망했기 때문입니다. 폭행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야구 방망이로 때리고, 손발을 묶은 상태에서 얼굴에 비닐 봉지를 씌운 후 호신용 스프레이를 뿌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인분을 먹이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을 보면서 더욱 화가 나는 것은 사무실의 다른 동료들도 그 가학적인 행위에 가담했다는 사실입니다. 주체의 몰각입니다. 

 

에릭 시걸의 소설 <드보라>에서 본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하더군요.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면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영혼 창고에서 영혼을 꺼내어 각 사람에게 넣어주신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영혼 창고가 비는 날이 옵니다. 그러면 세상에는 영혼이 없는 사람이 태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영혼 없는 사람, 그는 공감의 능력을 상실한 사람이 아닐까요?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상한 존재는 많지만, 인간보다 더 이상한 존재는 아무것도 없다." '이상한'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데이논deinon은 이상하다는 뜻 외에도 '무서운', '경이로운' 등의 의미로 쓰인다고 하네요. 이 단어를 '이상한'(unheimlich)으로 옮긴 하이데거는 이 단어를 "집과 같은, 즉 관습적이고 일상적이고 안전한 것으로부터 우리를 밖으로 내던지는" 것과 연결시켜 설명합니다(임철규, <그리스 비극>, 한길사, 2007년 10월 10일, p.324-325). 일상적인 세계, 상식의 세계, 예측 가능한 세계가 무너질 때 삶은 혼돈으로 변합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런 무난한 세계에 쉽게 싫증을 느낍니다. 일탈의 욕망은 그렇게 나타납니다. 이런 일탈의 욕망이 없다면 인간 세계는 지루함 때문에 지옥으로 변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욕망이 타자를 물화시키거나 그의 존엄을 훼손하기 시작할 때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종교는 그런 과도한 욕망을 경계하는 나팔소리여야 합니다. 종교가 분명한 소리를 내지 못할 때 세상 도처에서 괴물들이 나타납니다. 참담한 것은 문제의 그 교수가 사람들에게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보였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어떤 제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잘 활용하라고 격려하고, 어떤 제자에게는 '너를 위해 기도한다'고 말하는 자상한 스승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마성적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러한 불일치를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자기 성찰로 이어지지 않는 믿음의 고백이란 얼마나 허망한 것입니까? 나는 공감 능력의 확장이야말로 믿음이 깊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라 생각합니다. 공감을 협애하게 인간에게만 국한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이 초록별 지구에 터잡고 살아가는 모든 생명은 다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사랑을 요구하는 그 소리에 다 응답하지는 못해도 무정한 사람이 되지는 말아야 합니다. 

 

아주 가끔 이러한 외침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뜩해지기도 합니다. '잘 살아보세' 하는 노랫가락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우리가 부르는 생명의 노래를 삼켜버리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예레미야의 심정에 깊이 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의 <메시지>는 절망감에 사로잡힌 예레미야의 절규를 이렇게 옮겨놓았습니다. "하나님, 주님은 그저 신기루입니다.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오아시스이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렘15:18). 불경한 말이지요? 그래도 그는 정직합니다. 적어도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꾸짖으십니다.

 

"그 말을 거두어라. 그러면 내가 너를 다시 맞아들여, 내 앞에 우뚝 서게 하겠다. 말을 참되고 바르게 하여라. 천박한 푸념이 되지 않게 하여라. 그래야, 너는 나를 대변하여 말하는 자가 될 수 있다. 그들에게 맞추느라 말을 바꾸지 말고, 너의 말이 그들을 바꾸게 하여라."(렘15:19)

 

'천박한 푸념'을 늘어놓지 말라는 말에 나른하던 정신이 화들짝 깨어났습니다. "그들에게 맞추느라 말을 바꾸지 말고, 너의 말이 그들을 바꾸게 하여라." 이 말씀을 붙들고 오늘의 황량한 세계를 건너야 하겠습니다. 가끔은 울고 싶고, 달아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어떡하겠어요? 그 말을 하라고 부름 받았으니. 엄기호 선생의 말대로 '편'이 되어주진 못해도 어떤 경우에도 '곁'에 머무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게요. 언제 한번 자전거를 같이 타기로 해요. 단 너무 빨리 달리지 말고, 천천히. 평안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