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하늘과땅사람

하늘땅사람이야기32 - 세속적 우상과의 싸움

새벽지기1 2022. 4. 13. 07:22

세속적 우상과의 싸움

 

그동안 평안하셨는지요?

무더위가 절정입니다. 새벽에 일어나 앉아 있는데도 온 몸에 땀이 배어드는 것을 보니 삼복 더위라는 말이 빈말이 아님을 알겠습니다. 방충망에 붙어 있는 매미 울음소리가 처연합니다. 가뜩이나 무더운 날에 우리 마음에 불을 지르는 이들로 인해 더욱 견디기 어려운 날들입니다. 60대 중반의 아주머니 한 분은 정부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정부를 비판하느냐며 다짜고짜 세월호 유가족의 뺨을 때렸다지요? 그리고 '애들 운명이 그것뿐'이라는 막말까지 서슴치 않았다고 합니다. 강자와 자기를 철저히 합일화하는 이의 치기로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습니다. 대통령의 동생인 박근령 씨가 일본의 포털 사이트인 '니코니코'와의 대담에서 한 말을 접하고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사과를 거듭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했더군요. 또 일본 정치인들의 신사참배를 트집잡는 것은 내정간섭이라며 "나쁜 사람이니까 묘소에 찾아가지 않는 것이 오히려 패륜"이라고까지 말했다지요? 이것은 한 개인의 돌출된 발언이라기보다는 뉴라이트적 역사관을 가진 이들의 생각을 대변한 것이라고 평한 이도 있던데, 이게 사실이라면 참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기사를 대하는 순간 평화노래꾼인 홍순관 형의 노랫소리가 떠올랐습니다. '대지의 눈물'이라는 주제로 아흔 번의 '정신대 공연'을 마친 후에야 비로소 지을 수 있었다는 노래 말입니다. 

 

음~ 바람이 불어 옛날은 갔는데도

기억 속에 보이는 그 분홍 저고리

눈물은 노래를 막아 부르지 못하여도

하늘의 그 손길 야윈 손잡아

바구니 옆에 끼고 나물 캐다

그만 시간을 잃어버리셨죠

다시 찾아 드릴께요 어머니

열네 살 소녀 그 어린 꿈들

이 땅에 흐르는 대지의 눈물이여

다시는 그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

눈물은 노래를 막아 부르지 못하여도

하늘의 그 손길 야윈 손 잡아

 

"바구니 옆에 끼고 나물 캐다 그만~" 하는 대목에서 마치 꽃모가지가 툭 떨어지듯 내려앉는 가객의 음성은 그 단절의 쓰라림을 고스란히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그 아픈 마음, 아니 아프다는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그 처절한 시간을 떠올리며 노래꾼은 조용히 눈물을 흘립니다. 열네 살 어린 꿈, 그들이 잃어버린 그 시간을 어떻게 다시 찾아줄 수 있을까요? 하늘의 손이 되어 그들의 손을 잡아주고, 그 수치를 잊지 않고,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일일 겁니다. 그런데 세상은 자꾸 그런 시간의 기억을 떠나보내자고 말합니다. 부끄럽고 남루한 역사의 기억을 재빨리 처리해버린 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쑥하게 살고 싶은 것이 강자들의 마음일 겁니다. 친일파의 후손들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그들의 호의에 기대 살려는 마음 자체가 오류임을 재삼재사 깨닫게 됩니다. 

 

선생님은 고야와 렘브란트 같은 화가들의 위대함은 회화사의 영역 바깥에 놓여 있던 민중들의 소박하면서도 비루한 삶을 그림 속으로 끌어들인 데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추하고 기괴해 보이기까지 하는 세계를 관통하지 않은 아름다움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류 세계에 속한 이들의 눈에는 포착되지 않는 사람들, 마치 투명인간처럼 취급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빼놓고는 역사를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미학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신학이 강자들의 역사 이면에 있는 약자들의 이야기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도 그리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남미의 해방신학, 북미의 흑인신학, 여성신학, 민중신학은 주류 세계에서 배제된 채 역사의 변방에 머물던 이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다시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은 폭력과 배제, 모욕과 박해, 고난과 슬픔을 일상적으로 겪으며 살던 이들에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도 반제국주의적 담론으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토라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출애굽기는 피라미드로 상징되는 억압의 체제 맨 밑단에서 비인간적인 삶을 강요당하던 이들을 찾아오시는 하나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선생님은 우리가 신적인 것의 차원을 말하는 것은 삶 자체의 정상화를 위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삶의 정상화란 곧 삶의 인간화라고 말씀하셨지요? 옳습니다. 초월의 지평을 도외시하고는 도무지 난마처럼 얽혀있는 세상사를 풀 길이 없습니다. 욕망이라는 쇠항아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사는 이들은 다른 이들의 아픔에 공감할 수 없는 법입니다. '저 너머'의 눈으로 삶과 현실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아주 조금씩 자아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됩니다. 초월은 나의 나 됨을 우리라는 더 큰 지평 속에서 재정의하도록 해줍니다. 바로 이것이 삶의 인간화의 길이 아닌지요? 기존 질서에 의문부호를 붙이는 동시에 자기 삶을 늘 초월의 지평과 연결시킬 수 있어야 우리는 지난한 투쟁 속에서도 고갈되지 않을 수 있을 겁니다. 예수의 삶의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는 사람을 편견 없이 대한 사랑의 인간이었지만, 그 스스로는 사랑받지 못했다. 밑바닥 사람들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 자체로 기성사회에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의 메아리 없던 사랑은 그 자체로 억압의 연속성에 균열을 내는 일이고, 편견의 지배와 단절하는 일이었다." (문광훈, <가면들의 병기창>, 한길사, 2014년 9월 30일, p.504)

 

밑바닥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곧 기성사회에 대한 도전으로 치환되는 것은 그제나 이제나 마찬가지입니다. 브라질 출신의 대주교였던 돔 헬더 까마라(1909-1999)도 같은 뜻의 말을 했습니다.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그들은 나를 성자라 부른다. 그러나 내가 왜 가난한 이들이 굶주리는지 물으면, 그들은 나를 빨갱이라고 부른다."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은 타자화하거나 물화시키는 데 익숙합니다. 물화된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공간을 떠나지 말아야 하고, 가진 자들의 호의를 기다려야 한다고 교육받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위험한 인물로 분류됩니다. 예수는 그런 '당연의 세계'에 균열을 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십자가형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에게 신분이나 계급, 지위나 재산은 금지해야 할 우상과도 같았고, 사랑과 너그러움과 자유는 우상 너머에 자리하는 실천적 덕목이었다. 사랑과 진실은 계급이나 지위, 신분과 권력같은 세속적 우상을 넘어서지 못하면 도달될 수 없다. 완전한 객관성은 부정성 속에서 우상 없이 오직 영적 진실을 염두에 두는 가운데 얻을 수 있다."(앞의 책, p.505)

 

누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한국 교회는 정반대의 길로 달려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신분, 계급, 지위, 재산을 열정적으로 추구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가 한사코 뿌리쳤던 우상을 교회는 온 힘을 다해 붙잡으려 합니다. 어느 교단에서 목회자 연금으로 조성한 기금을 신용불량으로 은행권에서 대출을 받을 수 없는 회사에 고액의 이자를 받고 빌려주었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습니다. 꿩 잡는 게 매라는 건가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불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치장하는 일이 교계에서 종종 벌어집니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총선이 다가오자 기독교 정당을 만들어 정계에 진출하겠다는 의욕을 보이는 사람들이 결집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라는 이름을 전유함으로 그들은 개신교회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세속적 우상'이라 말씀하셨던 것을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부인하고, 진리의 이름으로 진리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평화의 이름으로 불화를 빚어내는 이들이 어찌 이리도 많습니까?

 

세속적 우상과의 싸움은 길고도 긴 싸움이 될 것입니다. 문학인은 문학인의 언어로, 예술가는 예술적 표현으로, 인문학자는 인문학자의 개념으로, 종교인의 종교인의 진정성으로 싸워야 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8:32) 하신 이 말씀에 붙들려 달려가야 하겠습니다. 이땅의 어느 한 켠에 억압의 연속성에 균열을 내고, 편견의 지배를 단절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는 분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든든한지요? 외로운 세상, 좋은 길벗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더위 속에서도 청안청락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