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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땅사람이야기29 - 서로 따뜻하게 비벼대면서

새벽지기1 2022. 2. 11. 06:10

서로 따뜻하게 비벼대면서

 

이제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려나 봅니다. 하긴 초복에 이르렀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조용히 엎드려 지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요즘 심정이 참 복잡합니다. '배신의 정치' 운운 하면서 의원들이 뽑아놓은 여당 원내총무를 인격 말살하는 대통령이나, 대통령의 심기 경호를 하느라 기본적인 도의조차 저버리는 여당 동료 의원들이나, 강 건너 불구경하듯 나몰라라 하는 야당 의원들이나 다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적'이라는 단어가 무얼 함축하는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지만 적어도 진실한 삶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진실은 허위의 부정'이라는 수전 손택의 말이 떠오릅니다. "세계는 기본적으로 허위로 가득 차 있고, 진실은 언제나 허위를 '거부'할 때 빚어지는 것이죠." '아니오'라고 말할 수 없을 때 진실은 가뭇없이 스러집니다. 

 

대학 시절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을 읽으면서 가슴이 뛰던 기억이 납니다. 세상이 우리를 길들여 비주체적 삶을 살도록 강요할 때, 우리 삶을 납작하게 만들어 일차원적 인간으로 소외시키려 할 때 분연히 일어나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소망했습니다. 그것은 정치적 억압에 대한 저항만을 의미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알베르 카뮈의 <반항적 인간>을 읽으면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비장하고도 장엄하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기도 했습니다. 내게 예수는 반항적 인간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두 가지의 문제, 즉 악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러 이 세상에 왔는데, 이 두 가지 문제는 곧 반항하는 인간들의 문제인 것이다. 그의 해결책은 우선 악과 죽음을 스스로 떠맡는 것이었다…골고다의 밤이 인간의 역사에서 그토록 큰 중요성을 가지는 것은 오로지 그 암흑 속에서 신이 보란 듯이 자신의 전통적 특권을 버리고 절망까지를 포함한 죽음의 고뇌를 끝까지 살아내었기 때문이다."(알베르 카뮈, <반항하는 인간>, 김화영 옮김, 책세상, 2007년 12월 15일, p.64-5)

 

악과 죽음을 스스로 떠맡는 존재가 된다는 것, 신앙의 신비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카뮈는 "신이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그도 반드시 절망을 맛보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들은 그를 무신론적 사상가로 분류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는 신앙의 신비를 깊이 꿰뚫어본 사람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젊은 시절 카뮈는 제게 있어서 언제나 바라보아야 할 큰 산이었습니다. 치기 어렸던 그 시절 벗들과 신학 논쟁을 벌일 때면 카뮈를 전거 삼아 '득죄得罪'의 언사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젠 나이 탓일까요? 그 장하던 의기는 간 데 없고 비루한 일상만 남았습니다.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며 전화를 주셨을 때 사실 마음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원하시는 사안에 대해 조언을 해줄 만한 식견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청을 차마 뿌리칠 수 없었던 것은 외로움이 짙게 밴 그 음성 때문이었습니다. 차 한 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는데 이상한 연민의 마음이 제 속에 차 올랐습니다. 여낙낙하던 표정에 쓸쓸함이 배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40여 년 앞만 보고 달리다가 문득 멈추어 서서 돌아보니 속이 텅 비어 버린 것 같다 하셨지요? 견결(堅決)하던 젊은 날은 꿈처럼 멀어지고 고리삭은 중늙은이처럼 허탈한 웃음을 짓는 그 모습에 마음이 아렸습니다. 좀 더 많은 이들을 아우르고 싶어 당신이 평생 견지해왔던 입장에서 조금 후퇴를 하자 가까웠던 동지들부터 싸늘하게 등을 돌리더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위로의 말을 건넬 수도 없었고, 그들의 매정함을 탓할 수도 없었습니다. 조직을 꾸려가기 위해서 원칙을 포기하는 순간 그 조직의 토대는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제가 좀 무례하고 무책임하게 말했던 것 같습니다. '그냥 망하자' 하는 생각으로 일하면 안 되었느냐고, 우리를 부르신 분의 뜻대로 살다가 망한다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영광이 아니냐고. 말하고나니 낯이 뜨거웠습니다. 정작 자신은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부사리처럼 군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좀처럼 후련해지지 않았습니다. 뭔가 미진한 부분이 남아있었는데 다음 일정 때문에 대화는 더 이어질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만나자는 기약없는 인사를 나누고 허정허정 종로길을 걷다가 서점에 들러 시집 몇 권을 샀습니다. 시에 대한 취향도 나이에 따라 달라지는 모양입니다. 젊은 시인들의 시보다는 마치 힘을 다 빼고 쓰는 것 같은 나이 든 시인들의 곰삭은 시가 훨씬 더 마음에 와닿더군요. 마종기 시인의 '저녁 올레길'(<마흔 두 개의 초록>, 문학과지성사, 2015년 5월 26일)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함께 걸어주어 고마웠어.

덕분에 힘들이지 않고 정신없이 걸었지.

가끔은 어디 어느 방향인지도 잊은 채

당신과 길이 있어서 걸었던 건지. 오래전

남의 길이 되겠다고 한 나를 용서해줘.

누가 감히 사람의 인도자가 되겠다니!

 

"…오래전/남의 길이 되겠다고 한 나를 용서해줘"라는 대목을 읽다가 가만히 공모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더러 사람들이 나를 멘토로 삼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히곤 했습니다. 어차피 말씀 선포자로 내 인생에 복무하는 처지이니 말씀을 바로 선포하기 위해 애쓰는 것은 사실이지만, 세월이 가도 든든해지기는커녕 늘 흔들리고 있는 나를 누군가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물론 그것은 거룩한 부담입니다. 하지만 젊은 날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욱 더 '남의 길이 되겠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각자 저마다의 길을 성실하게 걷는 것 뿐이지요. 걷다가 우연인듯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잠시 함께 걷기도 하다가, 또 각자의 길로 가는 거지요. 어느 순간부터 "너희는 랍비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 "너희는 땅에서 아무도 너희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아라", "너희는 지도자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마23:8-10)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구구절절 제 마음을 울립니다. 마종기 시인의 시 한 대목을 더 나누고 싶습니다.

 

그래도 오너라, 속상하게 지나간 날들아,

어리석고 투명한 저녁이 비에 젖는다.

이런 날에는 서로 따뜻하게 비벼대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눈이 떠지고 피가 다시 돈다.

제발 꽃이 잠든 저녁처럼 침착하여라.

우리의 생은 어차피 변형된 기적의 연속들,

어느 해였지?

준비 없이 떠나는 숨 가쁜 봄날처럼.

  -'봄날의 심장' 부분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나는 소리에 동네가 들썩이는 날에도 시인은 피었다가 지는 꽃처럼 덧없는 인생을 처연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허망해 보이는 시간을 허망하다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오너라, 속상하게 지나간 날들아," 시간과의 화해입니다. 그 화해는 '어리석은 저녁'에라야 비로소 가능한 것일까요?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많은 젊은 날에는 시간과의 화해가 어려운 것일까요? 시인은 "이런 날에는 서로 따뜻하게 비벼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요. '당위'나 '강박'이 사라지면 서로가 측은히 여겨지는 법입니다. 서로 따뜻하게 비벼대면서 생에 깃드는 한기를 이겨내야지요. 시인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말합니다. "제발 꽃이 잠든 저녁처럼 침착하여라". 문광훈 선생님의 시를 읽다가 '침착함'을 뜻하는 독일어 단어를 재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가이스테스게겐바르트Geistewgegenwart'의 문자적 의미는 '정신의 현재'입니다.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것이지요. 지금에 오롯이 집중할 때 시인처럼 우리도 삶이 기적임을 알게 될까요?

 

무더운 여름, 너무 일에 몰두하지 마시고 천천히 그리고 침착하게 현재 속에 머무시면 좋겠습니다. 혼자 찬송가를 흥얼거려봅니다. "이 세상은 요란하나/내 마음은 늘 편하다." 부디 청안청락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