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좋으면 그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그 열매도 나쁘다.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악한데, 어떻게 선한 것을 말할 수 있겠느냐?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선한 사람은 선한 것을 쌓아 두었다가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것을 쌓아두었다가 악한 것을 낸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은 심판 날에 자기가 말한 온갖 쓸데없는 말을 해명해야 할 것이다. 너는 네가 한 말로, 무죄 선고를 받기도 하고, 유죄 선고를 받기도 할 것이다."
-------
1. 죽음을 쏟아내는 우리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소망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수요일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성회수요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일을 당하였을 때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깊이 참회할 때, 옷을 찢고 머리 위에 재를 뒤집어쓰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독교에서는 그 의식을 받아들여,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을 시작하며 죄를 회개하는 의미로 이마 위에 재로 십자가를 긋거나 머리 위에 재를 뿌렸습니다. 우리교회도 지난 성회수요일예배 때 재의 예식을 진행했습니다. 집례자가 예배 참석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머리 위에 재를 뿌려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사순절은 하나님께 우리의 잘못과 유한함을 겸손히 고백하는 시간입니다. 우리에게 ‘잘못’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우리가 흙과 먼지와 재에서 와서 잠시 인간으로 살다가 다시 흙과 먼지와 재가 되어 하나님께로 돌아갈 인생임을 깨닫지 못해서 우리는 바른 길에서 벗어나 자꾸만 그릇된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번 사순절이 우리의 잘못과 유한함을 하나님께 진실하게 고백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내일모레인 3월 11일은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난 지 14년이 되는 날입니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후쿠시마에서는 쓰나미가 일어나 2만 명 이상이 죽고, 여러 마을이 거대하고 검은 물결에 휩쓸려 사라졌으며, 해변에 지은 핵발전소가 파괴되면서 방사능이 유출되었습니다. 아직 사고 핵발전소에는 핵연료가 880톤이 남아 있고 계속 방사능이 유출되고 있습니다. 사고 후 여러 차례 수거를 시도했지만 지난 14년 동안 수거한 핵연료는 0.7g이 전부입니다. 원자로에서는 방사능에 오염된 냉각수가 지금도 매일 130톤씩 나오고 있습니다. 그 오염수는 보관 탱크에 저장합니다. 그동안 저장되었던 오염수는 2023년부터 처리과정을 거쳐 바다로 방류하고 있습니다. 오염수 처리과정과 방류의 안전성에 대해서는 아직도 이견이 많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처리과정을 전혀 거치지 않은 오염수가 유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고발생 당시 고열로 원자로가 녹아내렸고 그때 생긴 균열로 냉각수가 계속 지하로 유출되고 있으며, 그 오염수는 지하수를 따라 바다로 그대로 흘러들어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후쿠시마 핵발전소를 운영하던 도쿄전력은 사과했지만 일본정부는 정확한 실태조사도 하지 않고 이웃나라에게 사과도 하지 않았습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원자로, 일부가 녹아내린 채 계속해서 죽음의 방사능을 밖으로, 바다로, 바다의 생물들과 사람들에게 쏟아내고 있는 원자로.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결국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죽음의 기운을 끝없이 쏟아내고 있는 원자로. 그 원자로가 저에게는 오늘 우리 인간의 모습처럼 느껴졌습니다. 지금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 끝없이 쏟아내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인간은 인간중심주의를 내세우며 자연을 파괴하고 이용하며 뭇 생명을 끝없이 죽음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또 각 나라는 자국중심주의를 내세우며 이웃나라를 침략하고 무역전쟁을 벌이며 다른 나라 사람들을 계속 죽음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또 각 나라의 권력자들은 권력을 앞세우며 자기와 생각을 달리하는 국민들을 무시하며 그들의 인간적 권리를 계속해서 짓밟고 있습니다. 또한 종교는 신의 이름을 내걸고 자기를 신격화하며 자기와 입장이 다른 사람들을 끝없이 신의 이름으로 저주하며 정죄하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와 사회 곳곳에서는 방사능만큼 치명적인 죽음의 기운이 끝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2. 악한 바리새인
마태복음 12장에는 예수님께서 귀신 들려 눈이 멀고 말을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치유의 사건은 분명 기적이었고 하나님이 역사하신 생명의 역사였습니다.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 고칠 수 없던 장애를 가지고 있던 이가 누군가에 의해 나음을 입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놀라고, 나음을 입은 이에게는 축하를 해주고, 고쳐준 이를 향해서는 칭송을 하는 것이 마땅한 반응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나음을 입은 사람에게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그를 고쳐주신 예수님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귀신의 두목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쫓아냈다.’ 이는 ‘그 치유의 사건은 예수가 일으킨 일이 아니라 귀신이 한 일로, 예수는 귀신의 하수인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칭송하기는커녕 귀신의 하수인이라고 모욕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모욕한 것은 그 한 번이 아니었습니다. 9장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며 그를 향해 ‘너의 죄가 용서받았다’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서는 ‘저 예수가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또 9장에서, 예수님께서 눈 먼 두 사람과 말 못하는 한 사람을 고치셨을 때도 ‘저가 귀신 두목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쫓아낸다’라고 모욕했습니다. 그리고 11장에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격의 없이 지내시는 모습을 보고는 ‘저는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라며 정죄했습니다. 그리고 12장 전반부에서는, 안식일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갈 때 제자들이 배가 고파 밀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보고는 이렇게 따졌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소.’ 이 말은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 법을 어겼소’라는 말인데, 율법에 따르면 안식일 법을 어긴 자는 죽여야 하는 자였습니다. 바리새인들 마음속에 이제 예수의 일행들을 죽여 제거하고픈 마음까지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바리새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무가 좋으면 그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그 열매도 나쁘다.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 뼈가 있는 말씀입니다. ‘나는 치유라는 좋은 열매를 맺었다. 그러니 내가 어찌 나쁜 나무이겠는가? 너희들이 맺은 열매는 무엇이냐? 너희야말로 나쁜 열매를 맺은 나쁜 나무가 아니냐?’ 라는 말입니다. 다음 구절에는 예수님께서 보다 더 강하게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악한데, 어떻게 선한 것을 말할 수 있겠느냐?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독사의 자식과 악인이라고 존재를 규정하셨습니다. 이는 다소 폭력적인 표현인데 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까지 이야기하신 걸까요? 한두 번 잘못된 말을 하거나 잘못된 행동을 하면 그것은 실수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매번 반복된다면 그것은 실수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가 됩니다.
3. 선한 사람은 선한 것을 내고
예수님의 말씀은 이어집니다. “선한 사람은 선한 것을 쌓아 두었다가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것을 쌓아두었다가 악한 것을 낸다.” 예수님께서 보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마음속에 악을 쌓고 살아 존재자체가 악인이 되었고, 악인이 된 그들을 통해 세상에 나오는 것이라고는 악한 말과 악한 행동밖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정말 입만 벌리면 다른 이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죽음의 말만 할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말’을 강조하셨습니다. 인간의 삶은 관계로 이루어져 있고 관계는 말로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심판 날에 자기가 말한 온갖 쓸데없는 말을 해명해야 할 것이다. 너는 네가 한 말로, 무죄 선고를 받기도 하고, 유죄 선고를 받기도 할 것이다.” 여기서 쓸데없는 말이란 부적절한 말을 의미합니다. 큰일 났습니다. 심판 날에 우리가 한 온갖 말을 해명해야 한답니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바리새인들은 결코 자기들이 자기 안에 악을 쌓으며 산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과 선을 자기 안에 쌓는다고 생각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 그대로 마음에 가득 찬 것이 밖으로 나옵니다. 그들을 통해 나온 것을 사람들을 살리는 생명의 말이 아니라 사람들을 죽이는 죽음의 말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 안에 쌓인 것은 선이 아니라 악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난 화요일인 3월 4일, 일본 후쿠시마에서 핵발전소 오염수 방류 저지 운동을 벌이는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제주도를 방문해 제주 해녀들과 만났습니다. 일본 시민단체분들이 제주 해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것이 만남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큐에는 바다를 평생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온 해녀들의 이야기와 죽어가는 제주 바다의 모습과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며 해녀들이 시위하는 모습이 담겼습니다. 일본 시민단체분들은 그 다큐를 보면서 제주 해녀들이 바다가 오염되어 억울해하고 후쿠시마에서 방류된 오염수에 대한 분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일본분들은 제주 해녀 할머니들께 오염수 방류로 해녀들의 삶의 터전인 바다를 더럽혀 죄송하고 방류를 막지 못해 미안하다며 사과하셨습니다. 제주 해녀 할머니들은 오염수 방류 후 해산물 수확량은 1/10로 줄고 푸르던 바다는 하얀 죽음의 바다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일본정부가 사과해야 하는데 이렇게 일본분들이 와서 사과하시니 고맙다고 하셨습니다. 일본 시민단체와 제주 해녀분들을 모임을 마치며 이대로 헤어져서는 안 된다며 다시 만나자 약속했고, 오염수 방류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하자 다짐했습니다. 일본 시민단체분들과 제주 해녀 할머니들이 나누는 말과 그 말 속에 담긴 마음이 고맙고 귀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의 아픔과 고통을 헤아리는 마음과 그 마음을 담아 전하는 진심어린 사과와 그 사과를 기꺼이 받아주는 마음. 오늘 우리가 잃어버리고 사는 귀한 것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주는 말과 마음이었습니다. 그런 말이 선한 말이며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선한 존재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서두에 말씀드렸던 것과 같이 방사능과 같이 치명적인 죽음의 말과 죽음의 기운들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세계와 사회 곳곳에서 죽음의 말과 죽음의 기운들이 쏟아져 나와 뭇 생명과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악과 죽음을 쌓고 악과 죽음의 존재가 되어 악과 죽음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 또한 악하고 죽음의 기운 가득한 세상에서 사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나는 사람들마다 선과 생명의 기운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당신 안에 선과 생명이 가득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악하고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세상에서 어떻게 당신 안에 선과 생명을 채우며 사실 수 있었던 것일까요? 기도. 우리의 존재와 마음을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연결하는 것, 그래서 세상의 기운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운을 받는 것이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그 기도가 당신의 습관이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 또한 기도를 습관화해야 하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악과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이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선과 생명으로 우리를 채울 수 있게 되고, 예수님처럼 그것을 사람들과 뭇 생명에게 전하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순절, 우리의 마음을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연결하여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우리 존재를 가득 채워 하나님이 주신 것을 생명을 전하며 사는 선한 사람이 될 수 있길 소망합니다. 그 귀한 일을 기쁘게 감당하는 청파 교우들과 이 시대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좋은 말씀 > 김재홍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음에서 생명으로 (눅 9:28~36) / 김재홍 목사 (0) | 2025.03.03 |
---|---|
하나님의 북소리 (암 7:10~17) / 김재홍 목사 (1) | 2025.02.24 |
말문을 열어 바깥으로(행 2:1-8) / 김형욱 목사 (1) | 2025.02.17 |
복 있는 사람 (시편 1편) / 김재홍 목사 (0) | 2025.02.13 |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 8:5~13) / 김재홍 목사 (0) | 2025.0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