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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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막이 꽃동산 되길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소망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길 빕니다. 이번 주 목요일인 3월 20일은 춘분입니다. 춘분은 밤의 길이와 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입니다. 이후부터는 낮이 점점 길어지죠. 춘분부터가 진짜 봄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춘분이 다가오자 남도에서는 꽃소식이 속속 올라오고 있습니다. 광양 매화 마을에서는 매화가 이제 막 꽃이 피려 하고, 구례 산수유 마을에서는 산수유 노란 꽃이 피기 시작했고, 제주에서는 유채꽃이 만개했다고 합니다. 이제 한두 주가 지나면 서울 이곳저곳에서도 이 꽃 저 꽃이 피겠지요.
그런데 춘분을 맞아 꽃소식처럼 반가운 소식만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미세먼지와 황사와 같은 반갑지 않은 손님들도 찾아왔습니다. 지난 목요일 아침에 출근을 하는데 뿌연 먼지에 가려 매일 보이던 남산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남산에 있는 타워만 안 보인 것이 아니라 남산 자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잠깐 멈추어 서서 그 짙은 안개 같은 미세먼지와 황사를 바라보았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꼭 오늘 우리나라의 상황 같구나.’ 오늘 우리의 상황은 앞날이 불투명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모래가 끼인 듯 서걱거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의 앞날을 불투명하게 만들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서걱거리게 만들고 있는 것은 몽골과 중국의 사막에서 날아온 미세먼지와 황사가 아니지요. 우리 사이, 나와 너 사이에도 사막 같은 것이 있어서 거기서 날아온 것들이 우리의 앞날을 불투명하게 만들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서걱거리게 만들고 있습니다.
중고등부 시절에 자주 부르던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다 아실 것입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리라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내리라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가 되면은 사막이 꽃동산되리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들 함께 뒹구는
참 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이사야서 11장과 35장의 말씀을 가사로 만든 노래입니다. 남유다는 광야와 사막의 나라였습니다. 척박하고 황량하기 그지없는 땅이었습니다. 그래도 그곳에는 사람이 살만한 곳이 있어서,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살았습니다. 정작 남유다를 사람이 살기 힘든 사막으로 만든 것은 제국의 폭력과 유다 권력자들의 횡포였습니다. 주전 8세기 북이스라엘은 유다를 공격했고 유다는 앗시리아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앗시리아는 북이스라엘을 공격해 멸망시켰습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시리아는 유다에게 많은 조공을 요구했습니다. 그런 군사적 경제적 억압은 유다 사람들의 삶을 팍팍하게 만들었습니다. 또 그뿐 아니라 유다의 권력자들은 사람들을 쉽게 죽였고, 돈 있는 자는 돈으로 재판관을 매수해서 죄를 면했습니다. 고아와 과부로 대표되는 사회적 약자들은 전혀 돌봄을 받지 못했습니다. 나라 안팎으로 억압과 폭력과 죽음의 기운이 넘치던 시대, 어디를 봐도 생명의 기운 없이 죽음의 기운만 가득하여 사막과 같던 시대가 바로 그 시대였습니다. 이사야는 그런 사막 같은 유다에 생명의 샘이 넘쳐나기를, 그래서 유다가 모든 생명이 아름다운 꽃처럼 피어나는 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강자가 쏟아내는 억압과 폭력과 죽음의 기운이 넘쳐납니다. 사막 같은 우리 사회에도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샘물이 솟아나고 모든 생명과 사람이 저마다의 빛깔로 꽃처럼 아름답게 피어나길 소망합니다.
2. 태도의 기본값
예수님이 사시던 시대도 사막 같은 시대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곡물을 수확하면 로마에 수확량의 1/10을 바쳐야 했고, 소유 재산에 대한 재산세도 내야 했으며, 오늘의 주민세처럼 인두세도 바쳐야 했습니다. 정해진 세금도 적지 않았으나 언제나 세리는 그보다 많은 세금을 거두어 중간에서 착복했습니다. 그리고 로마는 온갖 노역현장에 유대인을 동원하였고, 로마의 병사들은 언제든지 유대인에게 짐을 들어나르는 일을 시킬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 중에는 로마에 대해 불만을 가진 자가 적지 않았고, 무리를 이루어 반란을 일으키는 자와 로마에 부역한 동족을 암살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유대민중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제사와 말씀을 통해 힘을 불어넣어주어야 했던 성전 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본분을 망각하고 로마에 빌붙어 부와 권력 유지에만 힘을 쓸 뿐이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로마뿐 아니라 성전에도 세금을 바쳐야 했고, 하나님께 제물을 바칠 때에는 제사장이 인증한 비싼 제물만 바쳐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루하루 더 가난해졌습니다.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는 빚을 져야 했고, 나중에 빚을 갚을 수 없을 때에는 속옷까지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폭력과 착취, 분노와 절망이 넘치던 사회가 예수님 당시의 사회였습니다.
오늘의 본문인 마태복음 5장 38절 이하의 말씀은 그런 배경 속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이 말씀은 율법에 나온 말씀입니다. 이는 고대법의 근간이 되는 함무라비 법에도 나오는 동태복수법이기도 합니다. 원시적인 법 같아 보이지만, 나름 평등의 정신을 담고 있는 법입니다. 사람 속에는 ‘네가 내게 5의 손해를 끼쳤으니 나는 너에게 10으로 돌려주리라’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특히 상대가 나보다 약자일 때는 더욱 그런 마음이 들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시며, 다음 네 가지의 경우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선 앞의 세 가지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대어라.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참 예수 믿기 힘듭니다.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 우리 인간 생리에 반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어려운 말씀을 해 주신 것일까요? 내 뺨을 칠 수 있는 사람, 내 물품을 저당 잡을 수 있는 사람, 나에게 무리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나보다 권력이 많은 사람일 확률이 높습니다. 유대사람들에게는 로마 사람이나 유대의 권력자들에 해당하겠지요. 세 가지 경우 속에는 강자의 폭력과 착취가 담겨 있습니다. 바로 그런 것들이 이 세상을 사막으로 만드는 힘입니다. 폭력과 착취가 있는 곳은 그곳이 어디든 사막이 됩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저항의 뜻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씩씩거리며, ‘한번 이쪽 뺨도 더 쳐보시지! 속옷까지 가져가다니, 가져갈 바에 겉옷까지 가져가라! 나에게 억지로 짐을 들게 하다니, 내가 십 리 백 리를 더 가주마!’ 저는 예수님이 그런 의도로 말씀하셨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만약에 로마 병사 앞에서 그렇게 성을 냈다가는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저에게는 예수님의 그 말씀이 이렇게 들립니다. ‘폭력과 착취를 겪는 이마다 분노와 복수심에 붙들려 상대에게 똑같이 되돌려주려 한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겠느냐. 누군가는 다른 길을 가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사막 같은 세상의 폭력과 착취를 용인하신 것이 아니며, 사막 같은 세상에 대해 절대로 분노하지 말라, 맞서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거룩한 분노도 있습니다. 불의와 부정의를 보았을 때는 떨쳐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우리는 분노에 삼키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모든 감정이 그러하든 분노의 감정 또한 신적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에게서 나온 감정이지만 우리가 그 감정에 지배를 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분노와 복수가 우리 태도의 기본값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태도의 기본값은 언제나 존중, 공감, 돌봄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네 번째 경우가 바로 그 말씀입니다.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 마태복음 25장에 나온, ‘주린 자에게는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는 마실 것을 주고, 헐벗은 자에게는 입을 것을 주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이지요.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고,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는 것은 인간의 도리이며 타자에 대한 기본적 태도- 존중과 공감과 돌봄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대하든 그런 마음으로 대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서로에게 사막이 아니라 숲이 되어 줄 수 있을 것 입니다.
3. 사막 속 숲이 되어
우리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마지막 순간, 제자에게 배신당하고 버림당하셨습니다. 성전의 제사장들과 로마의 군병들은 예수님을 모욕하고 폭행했습니다. 예수님은 오른뺨 왼뺨을 맞으셨고, 속옷까지 빼앗기셨으며, 무거운 짐인 십자가를 지고 먼 거리를 옮기셔야만 했습니다. 그런 배신과 버림받음과 모욕과 폭력은 예수님 내면에 절망을 가져다주었을지 모릅니다. 당신의 삶 전부를 쏟아 이루어낸 것이 결국 아무 의미가 없는 바보짓 같은 것이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에도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분노와 복수심으로 채우시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못 박는 사람들을 욕하기는커녕 그들의 죄에 대한 용서를 비셨고, 당신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의 구원을 위해 애쓰셨으며, 어머니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이에 대한 존중과 공감과 돌봄을 끝까지 잃지 않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사막 같은 세상을 숲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셨습니다.
황사의 진원지는 내몽골의 사막입니다. 내몽골에서 형성된 황사가 바람을 타고 우리나라까지 날아옵니다. 몽골은 초목이 무성하여 대대로 유목을 해오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몽골이 사막이 되고 있습니다. 이미 국토의 50%가 사막으로 변했고, 90%가 사막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합니다. 샘, 시내, 강, 호수가 말라가고 있습니다. 청파교회는 2009년 기독교환경운동연대와 함께 몽골에 나무심기를 시작했습니다. 매년 아르갈란트 지역에 나무를 심었습니다. 청파교회가 재정을 후원했고, 울란바토르 농과대학 학생들과 현지민들이 모종을 키우고, 나무를 심고, 관리했습니다. 처음 수년간은 사람의 무릎 높이까지만 자라고 더 이상 자라지 않아 걱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나자 사람 키만큼 훅 자랐습니다. 지금은 그보다 훨씬 더 컸다고 합니다. 1,000 그루, 2,000 그루를 심다가 여러 교회가 동참해서 현재는 30,000 그루 넘게 심었습니다. 사막에 숲이 생겼습니다. 그 숲의 이름은 ‘은총의 숲’입니다. 은총의 숲에는 여름이면 나무그늘 아래로 시원한 바람도 불고 새들의 노랫소리도 들린다고 합니다. 놀라운 변화입니다. 은총의 숲에 심은 나무 중에는 비슬나무도 있습니다. 비술나무라고도 부르는 느릅나무과의 수종입니다. 비슬나무는 수변지역에도 잘 자라지만 건조지역에서도 잘 자라는데 건조지역에서는 이파리의 면적을 줄이고 세포의 밀도를 높인다고 합니다. 빠르게 자라는데 힘을 쓰기보다는 내적으로 자신을 단단히 만들고 뿌리를 땅 속 깊게 뻗는데 힘을 씁니다. 비슬나무의 뿌리는 수 백 미터까지 뻗어가며, 모래 바람이 불어와 줄기가 모래에 묻혀도 깊은 뿌리의 힘으로 기어이 몸을 일으켜 꺾인 가지에서도 새싹을 틔운다고 합니다
꽃피는 봄이 왔지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사막 같이 황량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평온한 일상이 깨어졌고, 나와 너 사이에는 사막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사막은 날마다 사람들의 분노를 먹고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숲이 필요합니다. 누군가 사막의 한가운데 나무를 심고 숲을 만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방법을 일러주셨습니다. 그것은 분노와 복수심으로 우리를 채우지 않는 것입니다. 분노와 복수심이 우리 태도의 기본값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태도의 기본값은 존중과 공감과 돌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를 대하든 그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청파교회는 이름부터가 푸른언덕이라 사막 같은 세상 속에서 숲으로 살아가야할 존재론적 사명이 있습니다. 사막 같은 세상에 숲이 되어 살아갑시다. 때때로 사막의 열기에 눌려 지쳐 쓰러질 때면, 몽골 은총의 숲에 심겨진 비슬나무처럼 믿음의 뿌리를 더욱 깊게 깊게 하나님께 내려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다시 일어납시다. 날마다 사막 같은 이 세상 속에서 생명과 평화라는 주님의 숲을 넓혀가는 청파의 교우들과 이 시대 믿음의 백성들이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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