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재홍목사

화덕과 눈물 (단 3:19~25) / 김재홍 목사

새벽지기1 2025. 4. 11. 06:18

그러자 느부갓네살 왕은 잔뜩 화가 나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보고 얼굴빛이 달라져, 화덕을 보통 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겁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그의 군대에서 힘센 군인 몇 사람에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묶어서 불타는 화덕 속에 던져 넣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들을, 바지와 속옷 등 옷을 입고 관을 쓴 채로 묶어서, 불타는 화덕 속에 던졌다. 왕의 명령이 그만큼 급하였다. 화덕은 매우 뜨거웠으므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들도 그 불꽃에 타서 죽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세 사람은 묶인 채로, 맹렬히 타는 화덕 속으로 떨어졌다. 그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서 급히 일어나, 모사들에게 물었다. "우리가 묶어서 화덕 불 속에 던진 사람은, 셋이 아니더냐?"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였다. "그러합니다, 임금님." 왕이 말을 이었다. "보아라, 내가 보기에는 네 사람이다. 모두 결박이 풀린 채로 화덕 안에서 걷고 있고, 그들에게 아무런 상처도 없다! 더욱이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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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점점 뜨거워지는 지구와 인간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산불의 피해가 너무 큽니다. 역대 가장 큰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천 년 고찰이 하룻밤 사이에 재로 변했고, 수 천 마리의 가축이 있던 축사는 거대한 무덤으로 변했습니다. 피해 면적은 약 45,000ha를 넘었고, 사망자는 30명이나 됩니다. 내륙인 의성에서 발생한 불이 동해 영덕까지 번졌습니다. 어느 분이 산불 현황 위성사진을 보내주셨습니다. 산불이 난 지역이 빨간 점으로 표시되었는데 의성에서 영덕까지는 많은 점이 붉은 덩어리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은 거대한 짐승이 큰 칼에 찔려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천만 다행으로 목요일에 내린 가랑비 덕분에 경북의 불은 거의 진화가 되었다고 합니다. 의성, 산청, 울주 산불 모두 한 개인의 작은 실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묘지를 정리하다가, 예초기를 돌리다가, 용접을 하다가 난 불이 45,000ha 의 산림을 잿더미로 만들고, 30명의 생명을 앗아간 것입니다. 그분들은 좀 더 조심하고 좀 더 주의했어야 합니다. 아무리 큰 산불을 내도 고의성이 없으면 벌금과 형량은 극히 작다고 합니다. 산불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법이 새롭게 마련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산불을 낸 사람들에 대해 화가 나다가, ‘나는 우리는 산불에 전혀 책임이 없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이웃나라 일본에서도 대형 산불이 발생했고, 그뿐 아니라 미국 태국 칠레 등 세계 곳곳에서 대형 산불이 발생했습니다. 지구의 평균기온이 올라가면서 산이 건조해졌고, 그래서 대형 산불 발생빈도가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의성 산불이 나기 하루 전인 3월 21일은 세계 빙하의 날이었습니다. UN은 빙하가 지구온난화로 빠르게 사라져가는 현실을 알리기 위해 세계 빙하의 날을 정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극지방의 빙하는 유례없이 많은 양이 녹아내렸습니다. 남극에는 스웨이츠 빙하가 있는데, ‘지구 종말의 날 빙하’라고 불립니다. 그 빙하가 녹으면 지구는 종말을 맞이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스웨이츠 빙하가 아주 빠르게 녹고 있습니다. 1년에 2킬로미터씩 녹고 있습니다. 빙하가 녹으며 발생하는 문제는 해수면이 상승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태양으로부터 지구 지표면에 전해지는 열에너지를 커다랗고 하얀 빙하가 반사판이 되어 다시 지구 밖으로 내보내는데, 그 반사판이 작아지면서 지구의 온도가 급격하게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빙하가 녹으면 지구 온도는 더 올라가고, 지구 온도가 올라가면 숲은 더 메마르게 되고, 숲이 메마르면 대형 산불은 더 자주 발생하고, 산불이 자주 발생하면 빙하는 더 많이 녹고, 빙하가 녹으면 지구 온도는 더 올라가고… 악순환입니다.

지구가 점점 뜨거워지는 것은 우리 인간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산업화 이후 인류는 계속 발전해 왔습니다. 그러나 산업화 이후 지구는 계속 병들어 왔습니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많은 것을 누리려는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이 자연을 파괴했습니다. 파란 하늘은 뿌옇게 변했고, 맑은 시냇물은 검게 변했고, 푸르던 녹지는 회색빛 아파트 단지와 공장지대로 변했고, 동식물 중 멸종되는 종은 나날이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산업화 이후 지구의 평균온도는 1.5도 이상 올랐습니다. 마지노선을 이미 넘은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 욕망의 온도를 잴 수 있는 온도계가 있다면, 그래서 그 온도를 잴 수 있다면 분명 1.5도 이상 올랐을 것입니다. 인간은 자연만 파괴한 것이 아닙니다. 1,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기계화되고 발전된 무기로 약 8천만 명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전쟁을 계속 벌이고 있습니다. 전지구적으로 모든 나라, 모든 사람의 이기적인 욕망의 온도는 급속하게 오르고 있습니다. 한때 세계의 경찰 국가를 자임하던 미국은 힘을 앞세워 다른 나라들의 돈을 갈취하는 깡패 국가로 전락했습니다. 각 나라간 갈등이 심화되면서 각국은 국방비를 급격하게 증가시키고 있습니다. 자유 민주주의 선진 국가였던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자국중심주의와 배타주의를 축으로 하는 극우정당이 급부상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이념을 앞세워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를 죽여야 한다며 잔뜩 열이 올라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산불 생존자가 찍은 영상을 보았습니다. 연기가 자욱하여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길을 차를 몰고 갑니다. 길 옆으로는 시뻘건 불길이 삼킬 듯 덤벼옵니다. 앞은 보이지 않지만 속도를 줄일 수는 없습니다. 바로 눈앞에 장애물이 나올 때마다 핸들을 급하게 이쪽저쪽으로 돌리며 계속 달릴 뿐입니다. 아주 위태로운 삶과 죽음 사이의 질주입니다. 지금 우리 지구가, 우리나라가 그런 상황 속에 있습니다. 부디 구원의 주님께서 멸망으로 치닫는 이 세계와 이 나라를 구원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 느부갓네살과 안티오쿠스의 화덕


오늘의 성경본문은 ‘다니엘의 세 친구 이야기’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이었지만 지혜와 학식을 겸비하여 바벨론의 지방관리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은 큰 신상을 세우고 그 신상에 절할 것을 명했습니다. 그 신상은 사실상 느부갓네살 왕을 상징하는 신상이었습니다. 그 신상에게 절함으로 느부갓네살 왕에게 충성과 복종을 표하도록 한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절을 명하면서 절을 하지 않는 자는 모두 불타는 화덕에 던질 것이라 말했습니다. 드디어 신상 제막식 날이 되었습니다. 나팔이 울렸고 사람들은 일제히 신상에게 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신상 앞에 절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다니엘의 세 친구를 왕에게 고발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 앞에 불려갔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그들에게 지금이라도 신상 앞에 절할 것을 명했습니다. 그러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느부갓네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 속에 던져져도, 우리를 지키시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활활 타는 화덕 속에서 구해 주시고, 임금님의 손에서도 구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신상에게 절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왕에게 실력으로 인정받는 관료들이었지만, 왕은 자신에게 절대 충성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보다 하나님을 높이는 이들을 그냥 둘 수 없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잔뜩 화가 나서 그들을 불타는 화덕 속에 던지라 명했습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화덕 속에 던져진 세 사람이 그 뜨거운 불 속에서 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신의 아들 같은 한 사람이 나타나 그 세 사람과 함께 있었습니다. 왕은 깜짝 놀라, 그 세 사람에게 나오라 소리쳤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불 밖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서는 주전 6세기 바벨론 포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실제 역사적 배경은 주전 2세기입니다. 주전 2세기 이스라엘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나고 넷으로 나누어진 헬라의 왕조 중 가장 큰 왕조였습니다. 다니엘서가 쓰여질 때는 셀레우코스의 안티오쿠스4세가 왕이었을 때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다스리던 모든 식민지를 헬라화하려고 했습니다. 모든 식민지에 헬라의 문화와 종교를 강요했습니다. 유대에도 그것을 강요했습니다. 예루살렘에 그리스식 운동장을 만들었습니다. 유대의 젊은이들은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듯 그리스의 문화를 받아들였고 그리스 사람들처럼 육체미를 자랑하기 위해 운동장에서 알몸으로 운동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율법이 금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안티오쿠스는 자기의 형상을 닮은 신상을 예루살렘 성전에 세우고 사람들로 경배하게 했습니다. 토라 소유를 금했고 토라를 가진 이는 토라와 함께 불태워 죽였습니다. 다니엘서에 나온 느부갓네살의 신상은 안티오쿠스의 신상이었고, 느부갓네살의 화덕은 안티오쿠스의 화덕이었던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의 신상에게 절하지 않아 화덕에 던져졌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죽지 않고 살아났지만, 안티오쿠스의 신상에게 절하지 않아 불구덩이에 던져졌던 이름 모를 수많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살아나지 못했습니다. 믿음과 신앙 때문에 안티오쿠스에게 경배하지 않은 이들, 헬라의 문화와 종교를 받아들이지 않은 수 만 명의 사람들은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악한 일입니까? 자기 스스로 자기에게 절대적 권력을 부여하고 사람들에게 그 절대적 권력에 무조건 복종할 것을 요구했던 안티오쿠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에피파네스라고 부르게 시켰는데, 그 뜻은 ‘신의 현현’이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이야기가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바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불에 던져져도 타 죽지 않는다’입니까? 그게 아니죠. 상대적인 인간을 절대적 존재로 신격화하여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자기를 절대화한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 존재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욕망의 화덕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경배하지 않는 이, 자기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 자기에게 반대하는 이는 모두 화덕에 던져넣어 불태워버립니다. 그런 양상은 그 가짜 절대자를 추종하는 자들을 통해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 절대자를 자기처럼 추종하지 않거나 그 절대자에게 반대하는 자는 모두 죽여야 할 존재로 여깁니다. 그들 속에도 화덕이 있는 것이죠.

3. 눈물과 네 번째 사람


예수님께서 공생애 마지막 순간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우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터인데!”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게 되면 당신이 죽게 될 것을 미리 아시고 그것이 슬퍼서 우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곧 예루살렘에 닥칠 비극을 내다보시며 우셨던 것입니다. 예수님 사후 40여년이 지났을 때 예루살렘은 로마에 저항했습니다. 로마의 티투스 장군은 대군을 이끌고 와서 수 만 명의 유대인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예루살렘을 멸망시켰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막으실 수는 없었던 것이었을까요? 왜 예수님은 울기만 하셨던 것일까요? 다니엘의 세 친구가 느부갓네살의 화덕 안에 던져졌을 때 그들과 함께 화덕에 들어간 네 번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신의 아들 같아 보였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그가 세 사람이 지극한 고통을 겪고 있을 때 그들 곁에 함께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받아들여 흘리는 눈물, 지극한 고통 속에 있는 이를 홀로 두지 않고 그의 곁을 끝까지 지켜주는 마음. 저는 그 무력하고 미약해 보이는 눈물과 마음이야말로 인간의 마음속에 끝없이 타오르는 이기적인 욕망과 멸망의 불을 끌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16세기 인도에는 탄센이라는 아주 뛰어난 음악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궁정음악가로도 활동했습니다. 그는 북인도 고전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는 노래로 자연을 움직이고 인간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에 대한 전설이 많은데 한 가지만 소개해 보겠습니다. 탄센의 노래를 유난히 좋아했던 왕이 그를 불러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그런데 왕은 간신들에게 속아 탄센으로 하여금 불의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왕의 명령을 어길 수 없던 탄센은 불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자 궁궐의 등불이 하나둘 켜졌고 나중에는 불이 궁궐의 사방으로 번졌습니다. 탄센은 불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불은 인간의 욕망을 닮은 것이어서 한 번 발화되면 통제하기 어렵습니다. 모두가 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비의 노래가 들려왔습니다. 누군가 혼신의 힘을 다해 부르는 노랫소리였습니다. 그 노래에 감동한 하늘은 비를 내렸고, 궁궐을 뒤덮었던 불은 꺼졌습니다. 사람들은 비의 노래가 들려왔던 곳으로 가보았습니다. 탄센의 연인이 피를 토하고 죽어 있었습니다. 탄센의 연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불을 끄기 위해, 사랑하는 이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다해 비를 부르는 노래를 부르다가 죽었던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욕망의 화덕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은 화덕을 넘어 거대한 산불이 되어 너무 많은 것을 집어삼키며 불태우고 있습니다. 그 강력한 불 앞에서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고, 무력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들로 인해 우리의 앞길을 어두워졌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찾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알려 주신 길이 있습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어려움에 처한 자의 곁을 끝까지 지켜주는 것입니다. 이번 화재로 3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서울 면적의 80%에 해당하는 산림이 검게 탔습니다. 청파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힘껏 도웁시다. 그리고 첨예한 이념의 대립으로 한껏 달구어진 이 나라에 또 하나의 불을 더하는 이가 아니라 평화를 더하는 이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평화는 다른 게 아닙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울고 고통 속에 있는 이의 곁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평화입니다.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고 우셨던 예수님의 눈물로, 화덕 속에 들어간 이들의 곁을 끝까지 지켰던 네 번째 사람의 마음으로 그 일을 기꺼이 감당하는 청파의 교우들과 이 시대 믿음의 사람들이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