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재홍목사

환히 열린 미래를 봅니다.(시 36:5~10) / 김재홍 목사

새벽지기1 2025. 3. 27. 06:34

주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하늘에 가득 차 있고, 주님의 미쁘심은 궁창에 사무쳐 있습니다. 주님의 의로우심은 우람한 산줄기와 같고, 주님의 공평하심은 깊고 깊은 심연과도 같습니다. 주님, 주님은 사람과 짐승을 똑같이 돌보십니다. 하나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어찌 그리 값집니까? 사람들이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하여 숨습니다. 주님의 집에 있는 기름진 것으로 그들이 배불리 먹고, 주님이 그들에게 주님의 시내에서 단물을 마시게 합니다. 생명의 샘이 주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받아 환히 열린 미래를 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께서 친히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어 주십시오. 마음이 정직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의를 변함없이 베풀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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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옥 같은 어둠 속에 놓여있는 사람들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전국 16곳에서 산불이 발생했습니다. 특히 경남 산청에서는 산불이 크게 발생했습니다. 진화 과정 중 네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고인의 영혼과 유족 위에 주님의 위로하심이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강풍이 불어 진화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부디 주님께서 도우셔서 바람이 잠잠해지고 불길이 잡혀 더 이상 피해가 발생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주중에 각 국가별 행복지수가 발표되었습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 웰빙연구센터와 여론조사 기관인 갤럽과 유엔이 함께 발표한 ‘2025년 세계행복보고서’가 나온 것입니다. 경제, 복지, 건강, 자유, 부패 정도 등을 따져 행복지수를 산출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는 핀란드였습니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북유럽 국가들이 상위 순위를 차지했고, 제일 행복지수가 낮은 나라는 아프가니스탄이었습니다. 그럼 우리나라는? 58위였습니다. 작년보다 6계단 하락했습니다. 140여 개 나라 중 중간수준입니다. 북유럽 국가들이 부러우신가요?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도 사는 게 참 힘들고 어렵다고 느끼는데, 우리보다 힘들고 어렵게 사는 나라들이 많구나.’ 보고서를 낸 기관의 홈페이지를 찾아 들어갔습니다.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의 행복지수를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는 111위였고, 놀랍게도 팔레스타인은 그보다 높은 108위였습니다. 아마도 팔레스타인의 데이터에는 가자지구가 포함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자지구의 행복지수를 조사한다면 거의 0에 가까울 것입니다. 가자지구는 지금 거의 지옥에 가까운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면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 러시아는 66위였고, 가자지구를 지옥으로 만든 이스라엘은 8위였습니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의 하마스와의 휴전협정 후 두 달만인 3월 18일에 다시 가자지구를 폭격했습니다. 400여 명이 죽고 600여 명이 부상당했습니다. 하마스는 휴전합의대로, 이스라엘군이 가자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하마스가 이스라엘 인질들을 석방하는 단계로 넘어가길 원했지만, 이스라엘이 이를 거부하고 이스라엘군이 가자에 남은 상태에서 이스라엘의 인질이 전원 석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처음 휴전합의 사항과 다른 요구를 한 것입니다. 하마스가 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자 이스라엘은 무차별 폭격을 가했습니다. 이스라엘 인질 20명을 석방하라며 가자지구 사람들 1,000명 죽이거나 다치게 만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대한 전력공급을 차단하고 구호품 반입을 금지시켜 가자지구 사람들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 계획의 이름은 ‘지옥계획’입니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사람들에게는 지옥을 선사하면서 자기들은 세계에서 거의 가장 높은 수준의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 행복이 바른 행복일까요? 너를 지옥으로 몰아넣어 얻는 행복은 행복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런 행복에 대해서는 심판으로 응답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폭격 이후 가자지구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구호식량을 나누어 주는 곳에 와서 그릇을 내밀며 음식을 달라고 부르짖는 아이들. 죽은 아들을 양손에 안고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울부짖는 아버지. 모든 집이 폭격으로 무너진 거리. 살림살이들을 힘겹게 짊어지고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 아빠엄마 뒤를 자기의 짐을 끌며 따라가는 아이들. 컬러사진이었습니다만, 모든 것이 잿빛이라 흑백사진처럼 보였습니다. 가자지구에는 지옥 같은 어두움이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이 고통 가득한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이 기다리던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사순절은 그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기 위해 노력하는 절기입니다. 저는 사순절기를 보내면서 종종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다시 오신다면 어디를 향해 걸어가실까?’ 피란길에 오른 가지지구 사람들의 사진을 보다가, ‘아, 지금 주님께서 저들과 함께 걷고 계시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옥 같은 어둠 속에 있는 이들, 미래를 내다볼 수 없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사순절, 그들 곁에 다가가 함께 걸어줄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2. 시편 36편과 다윗


오늘 설교말씀의 본문은 시편 36편입니다. 먼저 5절과 6절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하늘에 가득 차있고, 주님의 미쁘심은 우주에 사무쳐 있으며, 주님의 의로우심은 우람한 산줄기와 같고, 주님의 공평하심은 큰 바다와 같습니다.” 참 아름다운 찬양입니다. 시편 36편 저자가 보기에는 하늘, 우주, 산, 바다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의 사랑과 미쁘심과 의로우심과 공평하심이 차고 넘치고 있습니다. 그는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었을까요? 그의 상황이 풍족하고 여유롭고 평안했기에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이었을까요?

사실은 그 반대였습니다. 시편 36편은 악인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1절에서 4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악인에게는 반역의 충동만 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악인의 눈빛은 지나치게 의기양양하고 자기의 잘못을 찾을 생각이 없습니다. 악인의 입에서는 사기와 속임수만 나올 뿐 슬기로운 말이나 선이 나오지 않습니다. 악인은 늘 남을 속일 궁리나 하고 죄된 길을 고집하고 그 악한 고집을 버리려 하지 않습니다.’ 시편 36편의 저자는 악인 때문에 마음에 쌓인 게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가 보기에 악인에게는 다음의 것들이 가득합니다. 악한 충동, 교만, 사기와 속임수, 고집. 그리고 악인에게는 다음의 것들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반성적 사고, 슬기로움과 선, 회개. 악인은 이런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채우지 말아야 할 것만 가득 채우고, 채워야 할 것은 하나도 채우지 않은 사람. 시편 36편의 저자는 다윗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생애를 생각하며 말씀을 묵상해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어떤 주석가는 ‘그 악인은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아들 압살롬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사울로도 생각할 수 있고, 또는 압살롬과 사울을 도와 다윗을 죽이려 했던 여러 사람들로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윗에게는 적이 많았습니다. 다윗의 시편에 원수와 악인이 많은 등장하는 이유는 그것입니다.

1절에서 4절의 말씀을 읽고 나서 5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을 읽으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악인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과 미쁘심과 의로우심과 공평하심이 가득하다고 찬양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7절 이하에는 다윗이 하나님께 그런 찬양을 하게 된 어떤 경험이 나옵니다. 그는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여 돌보심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날개 그늘은 8절에서는 주님의 집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는 주님의 집에서 기름진 것으로 배불리 먹고 단물을 마셨습니다. 주님의 돌보심과 주님이 주신 음식과 단물은 그에게 ‘생명’이 되었습니다. 9절 상반절에 ‘생명의 샘이 주님께 있습니다.’라는 고백이 그 고백입니다.

다윗 생애를 살펴보았을 때, 다윗에게는 많은 적이 있었지만, 또 그에게는 많은 도움의 손길도 있었습니다.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왕으로 세운 사무엘도 있었고 다윗의 수많은 부하 장수들도 있었지만, 가장 대표적인 두 사람은 요나단과 아히멜렉이 아닐까 싶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좋아했습니다. 요나단은 자기 목숨을 아끼듯 다윗을 아꼈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왕의 아들이었고, 사울이 죽으면 당연히 자신이 왕위를 물려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다윗이 왕위를 물려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 했고, 요나단은 목숨을 걸고 다윗을 피신시켰습니다. 아히멜렉은 놉 땅의 제사장이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급하게 도망을 쳐야 했습니다. 아무것도 챙기지 못하고 길을 나섰던 다윗은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갔습니다. 다윗은 그에게 먹을 것과 무기가 있다면 달라고 했습니다. 아히멜렉은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빵과 골리앗의 칼을 내어주었습니다. 자신이 다윗을 돕게 되면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알면서도 한 행동이었습니다. 사울은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운 것을 알고는 아히멜렉과 그 일가를 몰살시켰습니다.

3. 환히 열린 미래를 봅니다


요나단과 아히멜렉, 그 두 사람은 다윗이 악인과 적들에 둘러싸여 죽음의 상황에 처했을 때 다윗에게 주님의 날개 그늘과 주님의 집이 되어 주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삶이 제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나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생각하는 한 사람, 나의 어려움을 자기의 어려움을 받아주는 한 사람, 나를 자기처럼 아껴주는 한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이 주님의 날개와 주님의 집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9절 하반절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받아 환히 열린 미래를 봅니다.” 우리를 위해 기꺼이 주님의 날개와 주님의 집이 되어 준 사람은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 비추어 주시는 빛의 통로가 되어 어둠 속에 있는 우리로 환히 열린 미래를 보게 만들어 줍니다.

주중에 ‘세움’이란 단체에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우리교회에서 2023년부터 돕고 있는 단체인데, 교도소에 수감된 이들의 자녀들을 돌보고 지원하는 단체입니다. 수감자들의 자녀들은 사회적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습니다. 홀부모와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아빠나 엄마가 교도소로 들어가면 아이는 혼자가 됩니다. 아이는 잘못한 게 없는데 형벌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아동복지를 위해서 오랜 기간 일해오던 이경림 대표는, 어느 날 아빠가 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동안 이웃에 잠시 맡겨졌던 아이가 그 이웃에 의해 폭행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저런 아이들을 위한 단체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2015년에 세움이란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교도소나 교도소에서 전도활동을 하는 분이나 수감자 본인이 세움에 아이를 돌보아달라고 요청을 해오면 세움에서 아이를 직접 만나러 갑니다. 만나서 조금씩 관계를 맺어갑니다. 아이에게 매달 용돈이나 교육비를 지원하고, 필요한 물품들도 지원해 주고, 상담도 합니다. 아이 혼자 가기 힘든 엄마 아빠 면회를 같이 가주기도 합니다. 아이가 병원에 가야 할 일이 있으면 그때도 같이 가줍니다. 또 아이들에게 멘토를 연결해주어 멘토가 아이들의 생일과 졸업식과 같은 기념일 등을 챙겨줍니다. 그런다고 아들이 금방 마음을 열어주거나 고마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상처가 컸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5년 6년이 지나서야 고맙다 말하는 아이도 있다고 합니다. 세움이 활동을 시작한 지 10년이 지나가자, 어려서부터 세움의 돌봄을 받던 아이들 중에는 대학을 졸업한 이들도 생겼습니다. 얼마 전부터는 수용자 자녀들을 위한 캠프도 진행하고 있는데, 캠프에 봉사자로 따라온 형이 아이들 앞에서 자신도 수용자 자녀였음을 밝히고 자기 삶의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은 거의 동시에 울음을 터트리면서 저마다의 아픔을 털어놓게 되었습니다. 이후 아이들은 훨씬 친해졌고 서로를 통해 힘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대표님께 ‘참 고맙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지만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하고 계셨기 때문이고,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새삼 일깨워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건축가 중에 김중업이라는 건축가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1세대 건축가입니다. 그가 설계한 건축물들이 아직 전국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충정로에 있는 프랑스 대사관과 안국에 있는 삼일빌딩도 그가 설계한 것입니다. 김중업은 집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집이란 어드메 한 구석 기둥을 붙들고 울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그런 집에서 살고 계십니까? 누군가에게 그런 집이 되어 준 적이 있습니까?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집이 되어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정과 부패로 가득하던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라 말씀하시며 ‘내가 사흘만에 성전을 다시 짓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성전, 하나님의 집이 되어 사람들을 만나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주님의 날개 그늘과 주님의 집이 주는 안식과 위로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안식과 위로는 빛이 되어 어둠 속에 있던 이들로 밝은 미래를 보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나의 행복을 위해서 기꺼이 너를 지옥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세상은 점점 더 큰 지옥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더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지옥 같은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 친히 다가가 빛이 되어 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뒤를 따라 어두운 이 세상에 빛의 통로가 되기 노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덕분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 되길 소망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기둥 삼아 붙들고 울 수 있는 사람, 지옥 같은 상황에 놓인 이에게 주님의 날개 그늘과 주님의 집이 되어줄 수 있는 교회, 어느 특정한 나라와 인종만이 아니라 이 세상 모두가 환히 열린 미래를 볼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람과 교회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