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말문
사도행전을 시작하며 누가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찾아 40일 동안 함께 하셨다고 기록합니다. 한 달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제자들은 부끄러움과 회한을 넘어 회복과 위로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중단되었던 하나님 나라의 시계가 다시 돌아가고 있음을 제자들은 강하게 느꼈습니다. 골고다를 오르시는 주님을 모른 채하며 도망했던 일을 벌써 잊은 듯 제자들은 주님께 재촉하듯 묻습니다. 사도행전 1장 6절입니다.
6 사도들이 한 자리에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었다.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열한 제자들의 자신만만함이 느껴지시는지요?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라면 거칠 것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계획은 제자들과 달랐습니다. 그분은 말씀 한마디만 남기고 홀연히 하늘로 오르셨습니다. 그 말씀은 이렇습니다. 사도행전 1장 7절과 8절,
7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때나 시기는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
8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 도래의 때와 시간은 너희 알 바 아니니 신경 쓰지 말라. 대신 성령이 오실 터이니 기다려라. 성령이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아 온 세상에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주님이 남기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이 말씀 남기시고 주님은 하늘로 떠나셨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보리라 기대했던 제자들의 입장에선 당혹스럽기가 그지없습니다. 부활의 능력으로 세상의 주인이 되셔야 할 주님이 또다시 자취를 감췄기 때문입니다. 저렇게 가실 것 뭐 하러 다시 나타나셨는가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성령이 오신다는데, 어떤 모습으로 언제 오실는지, 또 오셔서 능력을 주신다는데 무슨 능력을 어떻게 주신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투성이였습니다. 제자들의 황망한 심정이 사도행전 1장 11절에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11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면서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실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 다시 오실 테니 공연히 하늘만 쳐다보지 말고,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답을 얻지 못한 채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주님의 남은 제자들이 흩어지지 않고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고 또 결원이 발생한 열두 번째 사도 직분 맡을 이를 의논과 합의를 통해 선출했다는 점입니다. 앞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 잠시라도 멈추어 기도하고 일상의 일을 해 나가야 함을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제자들의 신앙이 이전과 비교했을 때 한 뼘만큼은 성장했음을 봅니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불투명합니다. 제자들은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는 말문 막힌 상태입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더 흐른 후 '오순절이 되어서'라는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구와 함께 오늘 우리가 마주한 본문의 사건이 시작됩니다. 다락방에 모여 있는 주님의 제자들 머리 위로 성령이 강하게 임하신 것입니다.
누가는 성령의 임재를 생동감있게 묘사합니다. 하늘에 세찬 바람이 부는 소리가 온 집안을 가득 채웠고, 이어 불길이 타올라 마치 혀처럼 갈라져 각 사람 머리 위로 내려 앉았습니다. 바람 소리라는 청각적 경험, 불꽃이라는 시각적 경험이 방 안에 충만했습니다. 성령 임재가 관념적이거나 영적 차원의 일이 아니라 경험적이며 실존적 사건임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누가는 이 놀라운 사건의 시작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4절 상반절입니다.
4a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다락방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잃어버린 언어: 성령 충만
성령 충만, 우리는 이 단어를 듣거나 생각할 때 여러 표상들을 떠올립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충만을 은총에 대한 감각적 상태로 봅니다. 가령 벅차오르는 감정, 뜨거움, 열정, 영적인 황홀함, 혹은 죄인이라는 고백을 터뜨리는 불안과 죄책감을 야기하는 현상으로 봅니다. 능력이나 힘 혹은 기적을 일으키는 도구 심지어 무기의 일환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성령 충만의 경험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확실한 표징이라고 보는 교리적 입장도 있습니다. 성령 충만에 대한 이러한 해석에 타당한 부분이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다만, 성령 충만을 개인의 특정한 상태로만 제한하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더불어 성령 충만 자체를 터부시하거나 피하려는 경향도 있습니다. 아마도 성령 충만이 불러일으키는 부담스러운 이미지들 때문이겠지요. 그러니 성령 충만은 우리의 신앙 세계 안에서 왜곡된 혹은 잃어버린 언어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성경, 특히 우리가 보고 있는 사도행전에는 성령으로 충만한 이들이 일으킨 놀라운 사건으로 가득합니다. 성령에 충만한 이들은 그들 자신이 먼저 변했고, 만나는 이들에게 생명을 전했으며, 세상의 길과 다른 길이 있음을 삶으로 증명했습니다. 성령 충만은 우리 신앙의 소중한 전통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초기 교회 공동체에 임한 성령 충만의 사건을 면밀히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승천하기 직전에 어째서 성령을 기다리라 하셨는지, 성령이 주시는 참다운 능력이 무엇인지 우리는 천천히 톺아 보겠습니다.
말문을 열어: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2장 4절입니다.
4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다락방에 모인 이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진 후 무엇을 합니까? 말하기 시작합니다. 교회 역사에서 최초로 발현된 성령의 능력이 바로 말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냥 말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말 했습니다. 곧 성령이 하라는 말만 했습니다. 사도행전 안에서 성령 충만과 말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몇 구절 찾아보겠습니다.
사도행전 4장 8절,
8 그 때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그들에게 말하였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장로 여러분,
대제사장 안나스의 위협 앞에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복음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사도행전 4장 31절
31 그들이 기도를 마치니,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고,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
성전 권력자들의 박해를 받고 심신이 크게 다친 상태였지만, 성도들은 성령에 충만해져 거침없이 복음을 증거하며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장면입니다.
사도행전 9장 17절
17 그래서 아나니아가 떠나서,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손을 얹고 "형제 사울이여, 그대가 오는 도중에 그대에게 나타나신 주 예수께서 나를 보내셨소. 그것은 그대가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오" 하고 말하였다.
이 장면에서는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기원하며 형제들의 원수인 사울에게 용서의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9절
9 그래서 바울이라고도 하는 사울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마술사를 노려보고 말하였다.
바울은 성령으로 충만해져 사람들을 현혹하는 바예수라 불리는 거짓 예언자에게 하나님의 준엄한 경고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렇듯 성령에 충만한 이들은 모두 말을 했습니다. 그들이 쏟아낸 말은 자기가 하고 싶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성령께서 시키는 말이며 성령께서 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지치고 낙망한 이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말, 원수를 용서하고 용납하는 화해의 말, 불의한 세상 앞에 담대히 선포하는 올곧고 바른 말, 성령에 사로잡힌 이들은 모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령에 충만했기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믿는 이들의 입에서 나와야 할 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은 결국 무엇으로 세상에 드러납니까? 말입니다. 내 입 바깥으로 나오는 말이 곧 나입니다. 내 속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은 내 입안에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말은 내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밀려 올라와 목과 입과 혀를 통해 구체가 됩니다. 그러니 말이 내 입술 바깥으로 떨어지는 순간 그 말은 곧 또 다른 나입니다. 여러분의 입에서 떠나간 또 다른 여러분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까? 누구와 만나고 있으며, 어디를 향해 가고 계십니까? 만약 우리 입을 통해 나온 또 다른 우리가 불평과 불만에 가득하고, 누군가를 험담하며, 화려한 세상만 쫓아간다면, 우리 안에 충만한 것이 성령이라고 말하기는 무척 어려울 것입니다.
사람들 안에 충만한 성령은 그들의 속을 바꾸시고 말을 바꾸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말문을 여시어 하늘의 언어를 발화하게 만드시는 분임을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바깥으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2장 4절을 다시 봅시다.
4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성령으로 충만한 이들이 말을 시작했는데 그 말이 '방언'이라는 말씀입니다. '방언'이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고린도 교회에 임했던 신비로운 언어로서의 방언, 통역의 은사 받은 자가 해석하지 않으면 알 수 없었던 능력의 일종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2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는 성령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신비의 언어였습니다. 일반의 언어로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말의 대상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세계 각국의 말, 곧 일상의 언어였습니다. 사도행전 2장 5절에서 8절을 봅시다.
5 예루살렘에는 경건한 유대 사람이 세계 각국에서 와서 살고 있었다.
6 그런데 이런 말소리가 나니, 많은 사람이 모여와서, 각각 자기네 지방 말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서, 어리둥절하였다.
7 그들은 놀라, 신기하게 여기면서 말하였다. "보시오,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오?
8 그런데 우리 모두가 저마다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이오?
세계 각처에서 살다가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온 유대인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한눈에 보아도 자기 동네를 떠나 본 적 없어 보이는, 게다가 외국어 공부를 해보았을 리 만무해 보이는 저 갈릴리의 촌사람들이 세계 여러 나라의 방언을 거침없이 내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제자들과 주님을 따르는 이들의 닫힌 말문을 여시고 말을 쏟게 하셨는데, 그 말은 세계 각국의 방언, 곧 외국어였습니다. 사도행전 2장 9절과 10절, 11절에는 구체적인 지명이 언급됩니다. 바대, 메대, 엘람, 갑바도기아,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이집트, 그리고 로마에 이르기까지 지역도 다양하지만 범위도 매우 넓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들을 보십시오. 훗날 복음이 전해진 곳이며 교회가 세워진 땅입니다.
저는 2년 전 김기석 원로 목사님과 청파 교회 교우님들과 함께 튀르키예 갑바도기아와 소아시아 그리고 그리스 일대를 순례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수천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이었음에도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이 전파되었음을 보았습니다. 성령이 밀어 올린 말이 사도들의 입 바깥으로 나와 세계 곳곳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위대한 사역의 시작이 바로 오순절에 성령에 충만해진 이들의 말문이 열리며 시작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하셨던 그 약속,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 오랜 시간을 걸쳐 성취되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시작을 알리는 사도행전의 첫 장면에서 성령은 어째서 방언을 말하게 하셨을까요? 단지 외국어 능력 주심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 낯선 이방의 말들은 유대 땅을 벗어나 본 적 없었던 사도들에게 낯선 타자들의 말이었습니다. 그러니 성령이 주신 능력은 사도들이 복음들고 가야 할 바로 그 땅의 말, 낯선 타자들이 살아가는 그들 세계의 말을 하고 들을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낯선 이방의 말을 소통할 능력을 주신 이유입니다. 자기 세계의 언어를 큰 목소리로 떠든다고 낯선 세계의 사람들이 그 말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복음 들고 예루살렘을 넘어 세계로 가는 당신의 사도들에게 전하신 능력은 너의 말은 네 속에 넣어두고 저들의 말을 꺼내어 그들과 소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사도들이 자기들의 말과 언어를 고집하며 낯선 세계로 나갔다면 복음은 뿌리내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받은 타자의 언어로 그들과 대화했기에 그들의 삶으로 깊숙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언어로 그들의 애환을 듣고, 그들의 언어로 위로와 격려를 전하라는 뜻입니다. 나의 말로 전해진 복음에 세상은 마음을 열었습니다.
말씀에 비추어 우리를 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우리 하고 싶은 나의 말만을 내뱉으며 살고 있는지요. 상대방의 세계로 들어가 그들의 언어로 말을 걸고 그들의 언어를 듣고자 귀 기울이려는 노력을 우리는 얼마나 하고 있는지요? 말문이 굳게 닫힌 이들에게 찾아가 마음을 헤아리고 미세한 그들의 음성을 듣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노력했는지요? 혹시 나 하고 싶은 말만 쏟아내며 왜 내 말을 듣지 않느냐고 다그치지는 않았는지요?
사회학자 조은 교수는 한국 사회의 빈곤문제와 구조적 원인과 해결점을 찾고 연구하기 위해 옛사당동 철거민촌에 들어가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때가 1986년입니다. 연구를 개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은 교수는 한 가지를 크게 깨닫습니다. 그의 책 <사당동 더하기25>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계급 계층별 언어 사용의 차이도 생각보다 컸다. 서울말과 지역 사투리간의 격차는 알고 있었지만 언어의 계급성이 그토록 심할 것이라고는 예상 하지 못했는데 연구하면서 보니 생각보다 훨씬 심했다. 이러한 문제점은 조교들의 현장 일지에 자주 언급되고는 했다. 특히 생애사 인터뷰를 녹취 하거나 녹취를 풀면서 이들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체감했다. 발음이 부정확하고 우물우물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에는 학력 때문인가 했는데 자신 있게 의견을 말하고 살아 본 경험이 없어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당동 더하기25> 85.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자기 말을 온전히 내뱉을 수 없는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 조은 교수는 25년을 그들과 동행하며 빈곤 문제를 뿌리 깊게 탐구했습니다. 1986년에 시작한 연구를 정리한 책이 2012년에야 나왔습니다. 말문 닫힌 자의 말을 듣기 위해 수십 년의 시간을 아끼지 않은 연구자의 마음을 우리 믿는 사람들은 본받아야 합니다.
청파의 교우님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선교지, 우리가 만나야할 선교 대상은 누구입니까? 말문이 막혀 말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최근 우리 귀에 닿는 이 참담한 사건들 속에 말문이 닫혀버린 사람들의 말을 우리는 들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어느 때보다 성령의 충만을 갈망해야 합니다. 내 속에 가득한 날 것의 욕망과 어두움을 뱉어내는 삶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따라 주님의 말, 하늘의 언어를 내어 뱉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들의 언어 속으로 다가가 말하고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한 자의 표징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 사회는 극심한 갈등으로 언로가 가로막혀 있습니다. 말의 길이 막히면 언제나 힘없는 자들의 말부터 소거됩니다. 성령 충만한 이들은 성령이 시키는 말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은 말문 막힌 자의 말을 열고 말 길이 끊긴 자들의 말을 잇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이렇게 내뱉어진 말은 내 입 바깥의 또 다른 내가 되어 복음을 전하고 상처받은 이를 위로하며 거친 말들의 전장이 되어버린 이 세상에 주님의 향기를 전할 것입니다. 모두 성령 충만한 삶을 사시길 기원합니다. 주신 말씀 기억하며 거둠의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
거둠의 기도
하나님, 성령에 충만한 사람들은 그 속에 복잡하고 답답한 것들이 제아무리 아우성친다고 할지라도, 그의 입 바깥으로는 성령이 이끄시는 말을 내어 뱉는 사람들임을 깨닫습니다.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기 말의 문법을 포기해서라도 낯선 이들의 문법을 이해하고 용납하며 그들 세계의 언어를 이해하려 애쓰는 사람임을 또한 깨닫습니다. 우리의 말이 끊어진 말의 길을 잇고 말로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는 살림의 말이 되게 해 주십시오. 우리에게 성령의 은총을 가득 부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축도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하시는 은혜와 우리를 사랑하사 아들을 내어주신 성부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과 충만한 은혜로 닫힌 말문을 여시는 성령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총이 성령의 이끌림을 따라 낯선 세계로 들어가 말 걸기를 두려워하지 않고자 다짐하고 돌아가는 당신의 충성스런 종들과 말못할 아픔으로 말문 닫혀있는 당신의 연약한 사람들과 아무말 못하고 신음소리만 내고 있는 피조 세계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시길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좋은 말씀 > 김재홍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음에서 생명으로 (눅 9:28~36) / 김재홍 목사 (0) | 2025.03.03 |
---|---|
하나님의 북소리 (암 7:10~17) / 김재홍 목사 (1) | 2025.02.24 |
복 있는 사람 (시편 1편) / 김재홍 목사 (0) | 2025.02.13 |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 8:5~13) / 김재홍 목사 (0) | 2025.02.10 |
자기 우상화와 폭력 (눅 15:25~32) / 김재홍 목사 (1) | 2025.0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