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재홍목사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 8:5~13) / 김재홍 목사

새벽지기1 2025. 2. 10. 05:16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다가와서, 그에게 간청하여 말하였다. "주님, 내 종이 중풍으로 집에 누워서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가서 고쳐 주마." 백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 나는 주님을 내 집으로 모셔들일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마디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내 종이 나을 것입니다. 나도 상관을 모시는 사람이고, 내 밑에도 병사들이 있어서, 내가 이 사람더러 가라고 하면 가고, 저 사람더러 오라고 하면 옵니다. 또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고 하면 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놀랍게 여기셔서,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 아무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과 서에서 와서,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의 시민들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서,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 시각에 그 종이 나았다.

1. 입춘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소망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설 연휴 잘 보내셨습니까? 이번 연휴 중에는 사건사고가 많았습니다. 폭설로 전라도와 충청도에는 축사 여러 곳이 무너졌습니다. 또 눈이 많이 내려 전국 곳곳에서 교통사고도 잇따랐습니다. 경부고속도로 천안부근에서도 교통사고가 있었는데 우리 교우의 어머니도 부상을 당하셨다고 합니다. 다행히 병원으로 이송 후 수술을 잘 받고 곧 퇴원 예정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김해에서는 에어부산 여객기 화재 사고도 있습니다. 기내 수화물에서 화재가 발생했는데 176명이 모두 무사히 대피했다고 합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이륙 전에 화재가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륙 이후에 화재가 발생했다면 대형사고를 피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그와 비슷한 사고가 일어나니 마음이 불안해집니다. 평상시 철저한 안전점검과 응급상황시 신속한 대처를 위한 훈련을 통해 다시는 그와 같은 사고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내일 2월 3일은 입춘입니다. 여전히 춥고 자주 눈도 내리지만 점점 해가 길어지는 것을 보며 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낍니다. 제주에는 이미 동백꽃과 유채꽃이 활짝 피었다고 합니다. 이제 곧 남도에서 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이 올라오겠지요. 그런데 몇 번 말씀을 드렸기에 잘 아시겠습니다만, 입춘의 ‘입’자는 들 ‘入’이 아니라 설 ‘立’자입니다. 봄은 그냥 저절로 오는 게 아니라 누군가 겨울의 한 가운데 봄을 세워야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입춘을 ‘예언자적 절기’라고 부릅니다. 입춘이 되면 옛사람들은 문앞이나 안쪽에 입춘첩을 붙였습니다. 입춘첩의 글귀는 다양한데 제일 유명한 것은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이지요. 새 봄이 되었으니 크게 길하고, 따스한 날 되었으니 경사가 많길 바라는 소망을 적은 것입니다. 그런데 입춘대길 건양다경의 뜻을 이렇게도 풀 수 있습니다. “아직 겨울의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지만, 누군가 그 겨울의 한 가운데 ‘입춘’ 봄을 세워야 ‘대길’ 모두가 길한 날이 온다. 그리고 누군가 겨울 같은 세상의 한 가운데 ‘건양’ 따스함을 세워야 ‘다경’ 모두가 잔치하는 날이 온다.” 예언서의 한 구절 같지 않습니까? 우리사회가 엎치락뒤치락 거리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우리사회 곳곳 입춘 같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작년 2024년도에 한국의 종교에 대한 설문조사가 있었고 지난 12월에 결과가 나왔습니다. 설문 중에는 비종교인들이 선호하는 종교가 무엇이냐는 항목도 있었습니다. 1위는 불교 53%, 2위는 천주교 48%, 3위는 개신교회 14%였습니다. 14%. 10명 중에 8.6명은 개신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개신교회의 신뢰도가 낮은 이유는 ‘지나친 전도’, ‘부패’, ‘차별과 혐오발언’ 등이었습니다. 여기서 ‘지나친 전도’는 그냥 전도지를 많이 돌린다는 뜻이 아니라 개신교회가 타종교나 타인의 신앙을 존중하지 않고 자기를 우위에 두고 가르치려든다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비종교인들이 보았을 때 개신교회는 ‘부패’한 집단입니다. 부패한 집단이 자꾸 자신을 우위에 두고 다른 이를 가르치려고 하니 싫은 것입니다. 비종교인들이 개신교회에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설문도 있었습니다. 가장 많은 이가 원하는 것은 ‘사회적 약자를 향한 봉사와 구제’였습니다. 참 아픈 지적입니다. 사회적 약자를 향한 봉사와 구제는 예수님께서 몸소 실천하신 바요, 제자된 우리에게 부탁하신 바이기도 한데, 그것을 교회 밖 사람들이 우리에게 재차 요구한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 개신교회가 해야 할 일을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설문 조사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너희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냐. 그런 믿음은 본 일이 없다.”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오늘 우리 개신교회는 겨울의 한가운데 봄을 가져오고 입춘 같은 존재가 아니라 봄이 오는 것을 막고 있는 겨울 같은 존재에 가깝습니다.

2.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머물고 계실 때 백부장이 예수님을 찾아와 간청했습니다. “주님, 내 종이 중풍으로 집에 누워서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아픈 사람을 고쳐달라는 요청은 복음서에 수도 없이 나올 정도로 일반적인 요청이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의 요청은 좀 특이한 요청이었습니다. 일단 그 요청을 한 사람이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라는 점에서 특이했습니다. 주로 예수님께 나아와 병자를 고쳐달라고 요청한 사람들은 유대인이었습니다. 이방인이 예수님께 나와 병을 고쳐달라고 요청한 경우는 흔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백부장의 요청이 특이한 요청이었던 이유는 그가 예수님께 고쳐달라고 청한 사람이 그 자신도 아니고 그의 가족도 아니라 그의 종이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 중에서도 자기의 종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는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말 그대로 상하가 확실한 주종관계였습니다. 하물며 지배자인 로마의 군장교와 피지배자인 유대인 종 사이의 관계는 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여러모로 백부장은 참 특별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마음은 참 귀한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백부장을 좋게 보셨던 것인지 그에게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내가 가서 고쳐 주마.” 예수님께서 일어나 길을 나서시려는데 백부장은 예수님을 만류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나는 주님을 내 집으로 모셔들일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마디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내 종이 나을 것입니다. 나도 상관을 모시는 사람이고, 내 밑에도 병사들이 있어서, 내가 이 사람더러 가라고 하면 가고, 저 사람더러 오라고 하면 옵니다. 또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고 하면 합니다.” 대단한 믿음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에게는 종의 병을 고칠 능력이 있다고 믿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그 능력은 거리와 상관없이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면 발휘되는 능력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10절 상반절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놀랍게 여기셔서…”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님도 놀라실 정도의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10절 하반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 아무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님께서 만나 본 믿음 중 최고의 믿음이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에게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하고 말씀하셨고, 바로 그 시각에 그 종이 나았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의 요청은 대단한 믿음의 요청이었던 동시에 대단히 위험한 요청이기도 했습니다. 앞서 말씀 드렸던 바와 같이 그는 로마의 군장교였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치유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예수님께 부탁이 아니라 명령을 해야 했습니다. 로마 군의 장교로서 유대인에게 부탁을 했다는 것, 그것도 자기 자신이나 가족이 아니라 유대인 종의 병을 고쳐달라고 부탁을 했다는 것은 로마군인들 사이에서 구설수에 오르기에 충분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 따르면 그 백부장은 유대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런 말이 그의 상관이나 총독에게 전해졌을 때 그것은 백부장에게 결코 좋게 작용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 빗대어 말해본다면, 일제강점기에 일본군 장교가 조선 기독교인을 위해 예배당을 지어주고, 조선인 목사에게 조선인 종을 고쳐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한 것입니다. 그 뒷이야기가 나오지 않아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는 백부장 자리에서 쫓겨나거나 어떤 불이익을 당했을 지도 모릅니다. 백부장은 그런 위험과 불이익을 감내하면서도 그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 백부장은 왜 그렇게까지 했던 것일까요?

3. 이런 사랑을 본 일이 없다


누가복음 7장에 따르면 그 백부장은 자기의 종을 소중히 여겼다고 합니다. 유대인 장로들은 그 백부장을 예수님께 소개하며 ‘유대인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백부장은 로마의 군장교였지만 유대인 종과 유대인을 사랑했습니다. 백부장은 사람이 만들어 놓은 인종과 신분과 계급의 차이를 뛰어넘어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그랬기에 종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청하러 나아갈 수 있었고, 유대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백부장은 자기를 뛰어넘어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그랬기에 자기에게 찾아올 수도 있는 위험과 불이익을 감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흔치 않은 사랑입니다. 백부장은 놀라운 믿음의 사람만이 아니라, 놀라운 사랑의 사람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을 향해,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 아무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백부장에게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 아무에게서도 이런 사랑을 본 일이 없다.”는 말씀도 해 주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믿음이 따로 있고 사랑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바른 믿음은 바른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아니 바른 사랑으로 드러날 때만 그 믿음은 바른 믿음이 됩니다.

백부장의 모습 속에는 예수님의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셔서 그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인종과 계급과 신분과 성별의 장벽을 뛰어넘으셨던 예수님, 그 장벽을 넘음으로 당신에게 찾아올 십자가의 위험을 기꺼이 감내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백부장의 모습 속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백부장을 최고의 신앙인으로 칭찬하신 이유는 백부장에게서 당신의 모습을 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방인 백부장을 최고의 신앙인으로 칭찬하는 예수님을 유대인들은 불편한 표정으로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유대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동과 서에서 와서,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의 시민들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서,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믿음과 사랑의 실천을 통해 구원을 받는 것이지 인종과 혈통을 통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 – 인종, 혈통, 전통, 연륜, 이념보다 중요한 것은 믿음과 사랑의 실천입니다.

8세기 영국의 수도사이자 신학자이자 역사가였던 성 비드The Venerable Bede라는 사람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자비란 다른 사람의 혼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백부장이 삶으로 보여준 것이 그 자비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혼돈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는 사랑. 그 사랑은 바로 입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혼돈 속에 있는 이를 사랑해서 그의 혼돈 속으로 들어갈 때, 겨울과도 같았던 그 사람의 마음속에 봄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날들을 돌아봅니다. 어려움에 어려움이 겹치고 혼돈 위에 혼돈이 겹치고 계절이 바뀌어도 계속 겨울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우리는 답 없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왜 세상은 나를 이렇게까지 힘들게 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계속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나를 사랑하여 나의 혼돈 속으로 기꺼이 들어와 주신 주님이 계셨기 때문이며, 여러 어려움과 수고를 감내하며 나를 사랑해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주님의 자비와 사람들의 사랑이 있었기에 우리는 혼돈과 겨울의 시간을 지날 수 있었습니다.

요즘 자주 듣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대 폭풍 속을 걷고 있을 때 비바람을 마주해야 할 때
불빛조차 보이지 않아도 그대 혼자 걷지 않을 거예요
두려움 앞에서 하늘을 보아요 외로운 그대여 걱정 마요
꿈꾸는 그 길을 또 걷고 걸어요 그대 혼자 걷지 않을 거예요

 

우리의 폭풍 같은 혼돈 속에 들어와 기꺼이 같이 걸어주시는 주님과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마워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혼돈 속에서 혼자 걷고 있는 이의 곁에 다가가 그와 같이 걸어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믿음은 주님의 믿음과 같은 믿음이 되고, 우리의 사랑은 주님의 사랑과 같은 사랑이 되며, 우리는 주님처럼 겨울의 한 가운데 봄을 세우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런 귀한 믿음과 사랑의 사람과 입춘 같은 사람이 되어 살아가는 청파의 교우들과 이 시대의 믿음의 백성들이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