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재홍목사

큰 구렁텅이 (눅16:19~26) / 김재홍 목사

새벽지기1 2025. 1. 17. 06:28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런데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 하는 거지 하나가 헌데 투성이 몸으로 누워서,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고 하였다. 개들까지도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다. 그러다가, 그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에게 이끌려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었고, 그 부자도 죽어서 묻히었다.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다가 눈을 들어서 보니, 멀리 아브라함이 보이고, 그의 품에 나사로가 있었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아브라함 조상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시원하게 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나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네가 살아 있을 동안에 너는 온갖 호사를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 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로 건너가고자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에게로 건너올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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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판의 충돌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소망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주현 후 첫 주일입니다. 지난 1월 6일은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세상에 공적으로 보이신 주현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신 이후에 본격적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 사역의 핵심은 광야 같은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삶을 가지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며 사셨습니다. 지난 한 주간 우리는 우리의 삶을 가지고 이 세상에 어떤 세계를 드러내며 살았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자기 속을 가득 채운 것을 밖으로 드러내며 살게 되어 있다고. 자기만의 세계로 자기를 가득 채운 사람은 자기만의 세계를 세상에 드러내고, 하나님의 나라로 자기를 가득 채운 사람은 하나님의 세계를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속에 자리하고 있는 자기만의 세계를 비워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가득 채울 수 있길 소망합니다.

미국 LA에서 대형 산불이 발생했습니다. LA 곳곳에서 발생한 산불이 강력한 바람을 타고 삽시간에 번져나갔습니다. 지난 금요일 기준 여의도 면적의 24배가 불탔습니다. 사망자 숫자는 파악이 안 되고 있으며 주택 만여 채가 화재로 소실되었습니다. 그리고 18만 명이 대피 중이랍니다. 뉴스를 보는데 소방관계자가 화재 진압율 0%라고 말하는 대목에 상황의 심각성이 확 와 닿았습니다. 시속 160킬로미터의 강풍이 불고 있어서 전혀 불길을 잡을 수가 없는 상황인 것입니다. 부디 주님의 도우심으로 속히 불길을 잡을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고 티베트에서는 지진으로 인해 126명이 사망하고 200여 명이 부상을 당하고 6만 명이 이재민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고지대에 추운 지역이라 구조가 더뎌 사망자와 부상자는 더 늘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곳에도 주님의 위로와 도우심이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티베트는 인도대륙판과 유라시아판이 충돌하는 지점이라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지역입니다. 판과 판의 충돌은 판과 판의 충돌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판 위에 삶의 기반을 마련하고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되기도 하고 죽음과 같은 고통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 한반도는 유라시아판 위에 있습니다. 유라시아판은 일본에서 끝나고 그 끝나는 지점에서 필리핀판과 충돌합니다. 일본에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이유는 거기에 있습니다. 유라시아판과 필리핀판의 충돌을 일본이 막아주어 우리 한반도는 상대적으로 충격의 피해가 적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반도와 우리나라에는 다른 판들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남과 북, 여당과 야당, 보수와 진보, 남자와 여자, 계층과 계층. 그리고 지금은 한남동 관저 앞에서 충돌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조만간 경찰과 경호처가 크게 충돌할 것이 예상됩니다. 부디 아무도 다치는 사람 없이 상황이 순조롭게 정리되기를 소망합니다. 뉴스에서 보니, 관저 앞 도로에서 양쪽으로 편을 나누어 다른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 사이에는 큰 빈공간이 있었습니다. 안전을 위해 경찰이 만든 충돌방지 공간이었습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갈수 없고 저쪽에서 이쪽으로도 갈 수 없도록 만든 공간이었습니다. 그 공간을 보며 김남주 시인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3.8선은 3.8선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6장의 말씀도 떠올랐습니다.

2. 부자와 거지 나사로


어떤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습니다. 자색 옷은 아무나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니었습니다. 왕족이나 귀족만이 입을 수 있는 옷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큼 풍요롭고 여유롭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자와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사는 이가 있었습니다. 나사로라고 하는 거지가 그 집 대문 앞에 있었는데 몸 곳곳이 헐고 몸을 가눌 힘도 없어 누워서 지냈습니다. 일을 할 수가 없었기에 그는 그 부잣집 앞에 누워서 그저 부자집에서 나오는 음식부스러기라도 얻어먹을 수 있길 소망했습니다. 부자는 그런 나사로를 치료는 못해 주어도 먹을 것이라도 줄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물 한 모금도 주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와서 돌보지 않던 나사로를 지나가는 개들이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습니다. 개들이 나사로를 치료해 주려고 핥은 게 아니라 곧 죽을 사람으로 여겨 여차하면 뜯어먹으려 한 것입니다. 참으로 처참한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둘 다 죽었습니다. 여기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 거지 나사로는 죽어서 천사들에게 이끌려 하늘나라에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었고, 부자는 지옥불에 떨어져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지옥에 있던 부자의 눈에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안겨 있는 나사로가 보였습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소리를 질러 말합니다. “아브라함 조상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시원하게 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나는 이 불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참 소박한 부탁입니다. 이왕 부탁하는 것 물 한 대접을 달라고 청하지 손가락 끝에 물 몇 방울을 요청했습니다. 불쌍하여 청을 들어줄 법도 한데 아브라함은 다음과 같은 말로 청을 거절합니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네가 살아 있을 동안에 너는 온갖 호사를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거기서 고통을 받는다.” 세상에서의 온갖 호사는 지옥 불의 고통으로 이어지고, 세상에서의 온갖 괴로움은 하늘의 위로로 이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갑자기 호사를 부러워할 게 아니라 멀리해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그 뒤에 아브라함이 한 이야기가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이런 말도 했습니다.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 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로 건너가고자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에게로 건너올 수도 없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있답니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구렁텅이는 너무 커서 서로 오갈 수가 없답니다. 아브라함은 간절히 물 한 방울을 요청하는 부자에게 물을 전해 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나와 너 사이에 있는 큰 구렁텅이 때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 큰 구렁텅이는 그저 아브라함과 부자 사이의 간극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부자 사이의 간극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큰 구렁텅이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누가 만든 것입니까? 그 큰 구렁텅이는 부자 자신이 만든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세상에 살 때 나사로와 자기 사이에 만든 간극이 죽은 후 큰 구렁텅이가 된 것입니다.

부자는 나사로를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부자의 잘못은 거기에 있습니다. 부자는 말 그대로 부자고 나사로는 말 그대로 거지라 경제적 신분차이 때문에 나사로를 무시했을 수도 있습니다. 혹 부자는 예루살렘 사람이고 나사로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과거에 싸웠던 역사 때문에 그를 멀리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나사로가 몸 곳곳이 헐어 율법적으로 부정한 자였기에 정결법 때문에 멀리했을 수도 있습니다. 신분, 역사, 율법 그 무엇이 이유가 되었든 부자는 나사로를 자신과 같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기에 그를 도울 수 있었음에도 돕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지옥에 있던 부자가 아브라함을 부르는 호칭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을 ‘조상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조상님 품에 안겨 있는 것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사람 취급하지 않았던 나사로였습니다. 그제서야 부자는 나사로도 자기와 같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때늦은 깨달음이었습니다.

3. 구렁텅이를 만들지 않기 위해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다른 것을 요청했습니다. “나는 형제가 다섯이나 있습니다. 제발 나사로가 가서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고통 받는 이 곳에 오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이번에도 아브라함은 부자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그러나 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나서 그들에게로 가야만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그에 대해 아브라함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난다고 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불지옥에 떨어지지 않을 방법, 나와 하나님 사이에 구렁텅이를 만들지 않을 수 있는 방법, 나와 너 사이에 큰 구렁텅이를 만들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이미 율법과 예언에 이미 다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2:37~39에서 하나님 말씀 중에 가장 중요한 말씀은 이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둘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 달려 있다.” 우리의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지옥불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요, 나와 하나님 사이 그리고 나와 너 사이에 구렁텅이를 만들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최고의 말씀으로 강조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게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가장 중요한 것을 우리 인간이 가장 잘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우리 인간이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나 자신입니다. 언제나 우리 인간이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이웃이 아닙니다. 나 자신입니다. 바로 그것, 언제나 하나님보다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를 서로 충돌하게 만들고, 우리로 불지옥에 이르게 만들고, 너와 나 사이와 하나님과 나 사이에 큰 구렁텅이를 만드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 자기중심성. 그것은 아주 힘이 셉니다. 인간에게 작용하는 중력 중에 최고의 중력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그것입니다. 여기서 ‘다하라’라는 말씀을 ‘버리라’는 말씀으로 뜻을 새길 때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우리의 마음과 뜻은 자주 오염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뜻을 자주 하나님의 마음과 뜻으로 여기려 합니다. 그런 그릇된 마음과 뜻을 버려야 우리는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야 그때에야 비로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이를 수 있습니다. 미가 예언자는 주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다음의 세 가지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공의를 행한다는 것은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이고, 인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겸손은 나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낮추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의 권면 속에도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는 것은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날 때에라야 공의를 행할 수 있고 이웃을 사랑하고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몇 해 전에 읽었던 책인데 스웨덴 사람,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가 쓴 책입니다. 그는 다국적 금융회사의 잘 나가는 임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져 사직서를 내고 태국에 가서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17년 간 수행을 거쳐 다시 사회에 환속한 후 사람들에게 강연을 통해 많은 선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그는 책에, 어느 날 수행 중 그의 스승이 수련생들에게 알려 준 수련법을 소개했습니다. 스승이 말했습니다. “갈등의 싹이 트려고 할 때, 누군가와 맞서게 될 때, 이 말을 마음속으로 세 번만 반복하세요. 진심으로 세 번만 반복한다면 여러분의 근심은 사라질 것입니다. 따라해 보세요.”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품고 사는 사람은 구렁텅이를 메우지만,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를 만나든 구렁텅이를 만들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 큰 구렁텅이가 많습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려고 해도 갈 수 없고 저쪽에서 이쪽으로 오려고 해도 올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기 사랑,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구렁텅이는 늘어만 갈 것입니다. 구렁텅이의 간극은 커져만 갈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자기사랑에서 벗어나 진정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이르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길 바랍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우리가 가는 곳마다 충돌이 잦아들고,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구렁텅이가 메워지고, 지옥불이 꺼질 것입니다. 그런 복되고 귀한 일을 함께 이루어가는 청파교우들과 이 시대의 믿음의 백성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