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재홍목사

참다운 인간이고자 (사 58:9-12) / 김재홍 목사

새벽지기1 2025. 1. 21. 05:21

'그 때에 네가 주님을 부르면 주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다. 네가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 '내가 여기에 있다' 하고 대답하실 것이다. 네가 너의 나라에서 무거운 멍에와 온갖 폭력과 폭언을 없애 버린다면, 네가 너의 정성을 굶주린 사람에게 쏟으며, 불쌍한 자의 소원을 충족시켜 주면, 너의 빛이 어둠 가운데서 나타나며, 캄캄한 밤이 오히려 대낮같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 너를 늘 인도하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너의 영혼을 충족시켜 주시며, 너의 뼈마디에 원기를 주실 것이다. 너는 마치 물 댄 동산처럼 되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처럼 될 것이다. 너의 백성 이 해묵은 폐허에서 성읍을 재건하며, 대대로 버려두었던 기초를 다시 쌓을 것이다. 사람들은 너를 두고 "갈라진 벽을 고친 왕!" "길거리를 고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한 왕!" 이라고 부를 것이다.'

1. 폐허 위에 희망을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소망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주중에 해외에서 기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드디어 가자지구의 하마스와 이스라엘이 휴전에 합의했습니다. 1월 19일 바로 오늘부터 휴전이 이루어집니다. 전쟁 발발 15개월만의 일입니다. 그간 이스라엘에서는 1,200명이 숨지고 250명이 인질로 잡혀갔습니다. 한편 가자지구에서는 46,700여 명이 죽고, 11만 명이 부상당했습니다. 휴전소식이 전해지자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고 지옥 같은 생활을 하던 가자지구의 사람들은 환호했고, 가족이 인질로 잡혔던 이스라엘 사람들도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스라엘의 극우파가 휴전에 반대하고 있어 불안감이 남아 있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버린 가자 지구가 새롭게 재건되고, 가자와 이스라엘 간에 평화가 찾아오길 소망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지난 12월 시리아에서도 좋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2011년 아랍의 봄 때, 민주주의를 외치는 국민을 독재자 아싸드 대통령이 군대를 동원해 학살했습니다. 50만 명 이상이 죽임을 당했고, 500만 명 이상이 고국을 떠나 난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12월에 시리아 시민군의 공격을 받고 아싸드가 러시아로 도망하면서 13년만에 시리아가 자유를 되찾게 된 것입니다. 이제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던 시리아 난민들은 행렬을 이루어 고국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제 시리아 친구 압둘 와합도 지금 시리아에 가 있습니다. 아주 오래간만에 고국으로 돌아가 예전에 갔던 카페를 가고, 그곳에서 우연히 옛 친구를 만나 기쁨을 함께 나누었는데 꿈 같았다고, 이 꿈에서 깨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와합은 시리아 다마스커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였고 2009년 시리아와 한국의 다리 역할을 하고 싶어서 한국에 왔습니다. 그러다가 시리아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한국에 남아서 시리아의 상황을 한국에 알리고 여러 사람의 손길을 모아 시리아 난민들을 도왔습니다. 와합은 한국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시리아의 새 정부 요인들, 전력자원부 장관과 교육부 장관과 농업부 장관 등을 만나서 어떻게 시리아를 재건할 수 있는지를 논의하고 있습니다. 와합은 고되지만 희망으로 가득 찬 날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많은 것이 무너져 폐허더미가 된 시리아가 새롭고 건강한 나라로 재건되기를 소망하고 응원합니다.

우리나라는 가자나 시리아 정도는 아니지만, 계엄 이후 적지 않은 혼돈과 무질서와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이제 헌법재판소와 사법부로 바톤이 넘어갔습니다. 재판은 헌법과 법률에 따라 명확하게 진행이 되어야 할 것이고 모든 이는 그 판결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올바른 재판과 판결을 통해 우리나라도 속히 안정과 질서를 되찾을 수 있길 소망합니다.

2. 제 3이사야


바벨론에서 노예로 살던 유다인 중 많은 이가 약속의 땅이자 고향 땅인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비록 노예로 살았지만 오래 살아 익숙하고 발달된 문명을 갖추었던 바벨론을 떠나 죽을 고생을 하여 약속의 땅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맞아준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무너져 폐허가 된 성전과 성벽과 성읍과 그들을 달갑지 않은 눈으로 쳐다보는 그 땅의 거주민들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도대체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따지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선조들과 똑같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들의 선조들도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다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르러, 약속의 땅이 생각과 다르다, 이곳 거주민들에 비하면 자기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차라리 이집트가 좋았다,라며 온갖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슬프게도 인간의 슬픈 역사는 반복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지못해 그 땅에 정착하게 된 이들은 막 살았습니다. 지도자들은 말씀을 따라 백성들을 지도하지 않았고 자기 생각대로 백성들을 지도했습니다. 또한 탐욕스러워서 백성들을 돌보지 않고 자기 배만 채우고 독한 술을 취하도록 마셨습니다. 사람들의 불안을 이용하는 점쟁이들과 육욕에 빠져 간통하는 이들이 늘어났습니다. 사람들은 그릇된 신앙에 빠져 자기의 자식들마저 우상에게 제물로 바쳤습니다. 야훼 신앙을 지킨다는 자들도 바른 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그릇된 신앙을 지켰습니다. 한쪽으로는 금식과 같은 경건행위를 하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아랫사람들을 착취하고 압제했습니다. 헐벗은 사람과 굶주린 사람들이 넘쳐나는데도 돕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나라만 폐허가 된 것이 아니라 정신도 폐허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제3이사야라는 예언자가 일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이사야서 56장부터 66장까지를 쓴 사람을 성서학자들은 제3이사야라고 부릅니다. 그는 “주님을 부르면 주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다. 네가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 ‘내가 여기에 있다’하고 대답하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아 보이는 절망스럽고 무질서하고 혼돈스러운 상황이지만, 하나님을 부르면 하나님께서 ‘내가 여기에 있다’고 말씀해 주실 것이라 말했습니다. 이 말씀이 힘이 됩니다. 절망과 무질서와 혼돈의 상황 속에서 당신을 찾는 자에게 ‘내가 여기에 있다’ 말씀하시며 가야 할 길을 알려 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러주신 절망과 무질서와 혼돈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 “네가 너의 나라에서 무거운 멍에와 온갖 폭력과 폭언을 없애 버린다면, 네가 너의 정성을 굶주린 사람에게 쏟으며, 불쌍한 자의 소원을 충족시켜 주면, 너의 빛이 어둠 가운데서 나타나며, 캄캄한 밤이 오히려 대낮같이 될 것이다. 그리고 너희 백성은 해묵은 폐허에서 성읍을 재건하고, 대대로 버려두었던 기초를 다시 쌓을 것이고, 갈라진 벽을 고치고, 길거리를 고쳐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할 것이다.”

한 나라는 외부에서 적이 가한 물리적 공격에 의해서만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정신과 내부의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가 무너질 때도 무너집니다. 억압과 폭력과 폭언, 가난한 자들에 대한 무관심도 한 나라를 무너뜨립니다. 우리 한국 사회는 다른 사회보다 갈등 지수가 높습니다. 예전에 말씀 드렸던 바와 같이 우리는 이념 때문에 분단된 국가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을 틀린 것과 위험한 것과 제거해야 할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는 언제나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다른 의견이 억압과 폭력과 폭언의 형태로 발현된다면 그것은 법에 따라 제재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억압과 폭력과 폭언이 방치된다면 우리사회는 절망과 무질서와 혼돈을 극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굶주린 자와 불쌍한 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에게 깊은 관심을 쏟으며 살아야 합니다. 특히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5장에서 하신 말씀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며, 너희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다.’ 굶주린 자와 불쌍한 자를 돕는 것은 주님을 돕는 것이며, 갈라진 사회를 치유하고 무너진 사회를 재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입니다.

3. 참다운 인간이고자


세계적인 신학자 한스 큉은 <왜 그리스도인인가?>라는 책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참다운 인간이 되기 위해서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보통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기 위해서’, ‘천국 가기 위해서’라고 답하는 것과는 좀 다른 답변입니다. 큉은 그리스도인은 다른 무엇보다 ‘사랑’과 ‘의로움’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랑과 의 다음에 구원과 천국이 오는 것이지, 구원과 천국 뒤에 사랑과 의가 오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인종, 계급, 증오와 같이 인간이 만들어놓은 여러 장벽을 뛰어넘어 사람을 사랑하고 의를 추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런 큉의 말은 예수님의 말씀과 정확히 부합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인종과 계급과 증오의 장벽을 뛰어넘어 사랑과 의를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제사장의 말처럼 제사를 잘 드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든지 바리새인의 말처럼 율법을 많이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지극히 작은 한 인간을 인간답게 대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온양에서 목회를 할 때입니다. 그때 제가 담임했던 교회는 작고 허름한 빌라촌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골목마다 쓰레기가 쌓여 있었고, 동네 아이들은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매일 동네 청소를 하고, 오갈 곳 없이 골목에서 노는 아이들을 교회로 데려와 같이 놀아주고 간식을 해 주고 공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동네 아이들 대부분이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저는 동네 어르신들의 신임을 얻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이장님이 저를 댁으로 부르시더니 차를 대접해 주셨습니다. 이야기 중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전도사님을 보면 나도 교회를 나가야 할 것 같은데 그 놈이 떠올라서 발걸음이 쉽게 떼어지지 않는다고,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고 교회는 다니는데 사람 같지 않은 놈이 하나 있다고.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고, 교회는 다니는데 사람 같지 않은 놈.

지금으로부터 거의 딱 38년 전인 1987년 1월 14일, 우리가 지금 앉아 있는 이 예배당에서 200미터 떨어진 남영역 바로 옆에 있는 건물에서 22살의 대학생이 고문을 받다가 죽었습니다. 그 건물은 군사정권시절에 민주화 운동을 하던 요인과 학생을 연행해 고문하던 대공분실이었습니다. 부산 서구 출신의 서울대학교 학생이었던 박종철은 그 시절의 많은 대학생이 그러했듯 군부독재에 반대하며 여러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경찰 수사관들은 박종철을 붙잡아 가서 수배 중인 선배의 거처를 불라고 말했습니다. 박종철은 답을 하지 않았고, 물고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욕조에 물을 받고 그를 욕조 앞에 무릎을 꿇린 다음 그의 목을 꺾어 욕조에 처박았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몇 시간. 그는 끝내 죽었습니다. 경찰과 군부는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고문사를 사고사로 위장하려 했습니다. 결국에는 그의 죽음이 불법적인 물고문에 의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고 군부독재를 무너뜨리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 사건이 있었던 남영동 대공분실 5층 9호실을 직접 가서 본 적이 있습니다. 창문은 세로로 긴 모양이었는데 비정상적으로 좁았고, 빨간 타일에 둘러싸인 욕조가 있었습니다. 그 방은 고문이라는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 만들어진 방이었습니다. 그 욕조 앞에 무릎 꿇려진 한 젊은이와 그의 목을 욕조에 처박는 이들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종철은 왜 선배의 거처를 말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가 죽음을 감내하면서까지 지키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단지 경찰이 듣기를 원했던 선배의 거처 하나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박종철은 사람을 참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공장의 노동자와 농촌의 농부들을 사랑했고 그들을 찾아가 함께 일했으며, 어려운 사람들을 자기 몸처럼 돌보았습니다. 추운 겨울 외투가 없는 이에게 하나 뿐인 자기의 외투를 벗어주었고, 늘 얇은 바지만 입고 다니던 이에게는 겨울바지를 사주고, 슬리퍼만 신고 다니는 이에게는 운동화를 사주었습니다. 박종철은 결코 부유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박종철은 사람자체가 그런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박종철이 사람들에게 보냈던 편지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참다운 인간’입니다. 박종철은 이런 말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죽기 전에 단 하루만이라도 참다운 인간의 모습을 찾을 수 있는 사회에서 사는 것이 소망이다.” 인간이 참 인간답게 사는 세상, 인간이 인간이기에 자유롭고 서로를 존중하며 사는 세상. 그 당시 사회 속에는 없었지만 그의 안에 꿈으로 존재하던 세상. 박종철이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지키고 싶었던 것은 그 세상이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박종철이 그 길을 가지 않았다면, 박종철과 같은 이들이 그 길을 가지 않았다면, 오늘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비인간적인 세상에서 살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희생을 아프게 그리고 고맙게 기억해야 합니다.

절망과 무질서와 혼돈이 가득한 폐허 위에 나라를 새롭게 재건하는 방법은 억압과 폭행과 폭언을 줄이고 굶주린 자와 불쌍한 자를 돌보는 것이라고 말한 제3이사야. 예수를 바르게 믿는다는 것은 인간이 만든 인종 계급 증오와 같은 장벽을 뛰어넘어 인간을 사랑하고 의를 행하는 참된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 한스 큉. 지극히 작은 한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로 귀히 여기며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이며 이 땅에 천국을 이루는 길이라고 가르쳐주신 예수님. 제3이사야와 한스 큉과 예수님이 지향했던 길은 하나님 안에서 생명과 평화를 지향하는 우리 청파교회의 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박종철이 걸어간 길과도 다르지 않은 길입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예수를 따르기에 하루하루 더 참된 인간에 가까워지는 우리 모든 청파의 교우들과 이 시대 믿음의 사람들이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