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재홍목사

은총에 이끌리어 (고전 15:10) / 김재홍 목사

새벽지기1 2025. 1. 3. 07:08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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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력에 이끌리는 사람들


주님의 위로와 치유하심이 무안 여객기 사고로 돌아가신 분들의 영혼과 그 유족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사망자 179명, 국내에서 일어난 항공기 사고로는 가장 큰 사고였습니다. 희생자가 너무 많이 발생했습니다. 3살 아기부터 80세 어르신들까지, 가족 연인 친구 이웃 직장동료가 함께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사고를 당했습니다. 긴급하게 차려진 유가족 대기실에서는 마음을 찢는 절규와 통곡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왜 그렇게 급하게 착륙을 시도했는지? 왜 랜딩기어는 내려오지 않았는지? 왜 착지 후 속도를 줄이기 위한 날개를 펴지 않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사항들이 너무 많습니다. 정확한 진상조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시신수습도 완전히 이루어져야 하고 무엇보다 관계 당국과 사고 항공사는 유족이 위로받을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다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2024년도를 보내고 2025년도를 맞이하는 송구영신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여기 이렇게 모여 있습니다. 말씀 속에서 지난날 우리가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고, 새롭게 살아갈 날들을 내다보며 새로운 다짐을 하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사람들은 코로나 펜데믹을 지나며 한층 더 이기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미국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국가가 자국중심주의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언제 또 위기가 닥칠지 모르니, 다른 나라를 배려하고 돕기보다는 자기나라부터 챙기겠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위기 앞에서 인간이 본능적으로 취할 수도 있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 정도가 지나칩니다.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다보니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 다른 나라를 침략하기도 하고 공격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자국의 이익보다는 유럽공동체의 하나됨과 공동선을 추구하던 유럽연합국가 중에도 이민자와 이슬람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정당이 득세하는 나라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좋지 않은 싸인입니다.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지도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인과 고위직 공무원 중에는 국가와 국민보다는 자기의 권력이나 이권을 더 중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비리와 불법이 드러나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윽박과 권력으로 덮으려 합니다. 사업주들은 위험한 일들을 외주업체에 하청을 주고 그곳에서 사고가 나도 책임을 지려하지 않습니다. 남성은 여성을 쉽게 성착취의 대상으로 삼고 딥페이크라는 방법을 통해 불법 동영상을 만들어 유포하여 한 사람의 인격을 말살하기도 합니다. 이런 와중에 사람들을 위로하고 바른길을 제시해야 할 교회들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 개신교회는 극우의 온상이 되고 있습니다. 유력한 아무개 목사는 이번 무안 여객기 사고를 두고 ‘하나님이 사탄을 시켜 하신 일’이라는 망발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도구로 전락시키는 동시에 희생자들과 유가족을 위로하지는 못할망정 또 하나의 상처를 준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간의 이기성은 다른 인간을 향해서만 드러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연을 향해서도 드러났습니다. 지난 한 해 지구는 더 뜨거워졌습니다. 지구 평균 기온은 관측 사상 가장 뜨거웠습니다. 물론 2023년에도 관측 사상 가장 뜨거웠던 해였습니다. 아마도 2025년도 관측 사상 가장 뜨거운 해가 되겠지요. 우리는 지난 9월에 난생 처음 무더위 속에서 추석을 보냈습니다. 여름은 길어지고 바다는 펄펄 끓고 빙하는 사라지고 해수면은 올라가고 동식물은 멸종하고 폭우와 태풍의 피해는 늘어만 가는데, 우리 인간은 그릇된 삶의 습관을 바꾸고 있지 않습니다. 여전히 많은 것을 소비하고 소유하며 편리를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인간의 이기성은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총체적 난국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유대계 프랑스 철학자, 시몬 베유는 <중력과 은총>이란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영혼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은 모두 물질의 중력법칙과 유사한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 좀 거칠게 요약하면, ‘인간의 영혼도 중력 법칙에 지배된다’는 말입니다. 저는 지난 한 해 세계와 우리나라와 주변을 보면서 시몬 베유의 말을 아프게 곱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욕망이라는 중력에 이끌려 살아갑니다. 자기, 자기의 생각, 자기의 가족, 자기의 나라, 인간만 생각할 뿐 타인, 타인의 생각, 이웃, 다른 나라, 자연으로 한 치를 나아가지 못합니다. 왜 나를 넘어 너에게 나아가지 못하는 것일까요? 자기의 욕망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욕망이 너무 무겁기 때문입니다. 시몬 베유는 ‘인간의 영혼도 중력 법칙에 지배된다’라는 말 뒤에 이런 말도 했습니다. “은총만은 예외다.” 욕망이라는 중력은 우리를 땅으로 끌어내리고 나에게로 매몰되게 만들지만, 은총은 우리를 하늘로 끌어올리고 너에게로 나아가게 만들어 줍니다.

2. 중력에서 은총으로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은총에 이끌리어 살지 못하고 여전히 욕망의 중력에 이끌려 살았습니다. 파당을 지어 자기가 속한 파가 다른 파보다 더 우월하다며 서로 싸웠습니다. 그리고 저마다 자기가 받은 은사가 다른 사람이 받은 은사보다 더 높은 은사라고 주장했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시몬 베유의 말처럼 인간의 영혼이 욕망이라는 중력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은총에 이끌려 살았다면 그렇게 사사건건 싸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예수를 믿는 것의 바른 의미를 일깨워 주어야만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언급했습니다. “나는 사도라고 불릴 만한 자격도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하나님의 교회를 어떻게 박해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제사장 무리의 이중성과 잘못을 지적하자, 그곳에 있던 유대인들은 돌을 들어 스데반을 쳐 죽였습니다. 그때, 바울은 사람들이 돌을 던지기 위해 잠시 벗어두었던 옷을 맡아 관리하였고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뿐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일 듯이 위협하였고 다메섹에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을 잡으러가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때의 바울은 은총에 이끌려 살던 자가 아니라 중력에 이끌려 살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고전15:10에서 변화된 자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회심 사건 이후에 변했습니다. 예수 믿지 않던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예수 믿지 않던 사람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의 본질은 그의 삶을 이끌어가는 동력이 변화되었다는 말입니다. 중력에서 은총으로. 그래서 바울은 ‘오늘의 나’는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말하고, 누구보다 더 열심히 일했지만 그것은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자기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변화된 바울에게서는 ‘나’가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바울의 말은 짐짓 믿음 있는 척 보이려고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진실한 고백이었습니다. 왜 그 말이 진실한 고백입니까? 바울은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무슨 일에서나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런 존재가 된 것입니다. 중력이 아니라 은총에 이끌려 살아가는 존재.

고린도교회에는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어도 되는가’라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답을 주었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을 수도 먹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약한 사람에게는 그 고기를 먹는 것이 양심을 상하게 만드는 것일 수 있습니다. 나의 자유가 다른 이에게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음식이 내 형제를 걸려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나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습니다.’ 여기서도 바울의 동력이 중력이 아니라 은총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나를 넘어 연약한 너에게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욕망이라는 중력에 이끌리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기의 욕망에 이끌리기에 이기적이고, 이기적이기에 타자를 배려하지 못하고, 타자를 배려하지 않으니 쉽게 폭력을 행사하고, 폭력을 통해 아픔과 고통을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세상을 무겁고 살기 힘든 세상으로 만듭니다. 은총에 이끌리는 사람들에게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은총에 이끌리기에 나에 매몰되지 않고, 나에 매몰되지 않았기에 타자를 배려하고, 타자를 배려하니 상처를 주지 않으려 노력하게 되고, 상처를 주지 않으려 노력하니 생명과 평화를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세상을 보다 가볍고 살만한 세상으로 만듭니다.

3. 은총에 이끌리어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 수가성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물가에 혼자 계셨고 제자들은 음식을 구하러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한 여인이 물을 길러 우물가로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셨습니다. 여인은 놀라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예수님과 여인 사이에는 많은 장벽이 있었습니다. 남과 여라는 성별의 장벽, 서로 원수로 여기는 유대와 사마리아와의 역사적 장벽, 그리고 율법이라는 종교적 장벽이 있었습니다. 그 장벽은 많은 사람의 삶을 힘들고 무겁게 만드는 장벽이었음에도 아무도 허물지 않던 장벽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인의 아픔에 가닿기 위해 그 장벽을 허무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넘어섬을 통해 여인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력에 붙들려 살던 사람이 아니라 은총에 이끌려 살던 사람이라 가능했던 일입니다. 중력에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은 장벽을 쌓아가지만 은총에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은 장벽을 허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일이 그 여인을 위해서만 하신 일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그 여인을 도운 일이 당신 삶의 양식, 양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먹을 것을 내미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 예수님의 양식은 예수님을 뒤따르는 우리의 양식이기도 합니다.

2024년 지난 한 해 동안, 청파는 은평과 강서에 두 개의 파송교회를 세우고, 세종 청파교회를 돕고, 여러 NGO 단체들과 어려운 교회들을 도왔습니다. 모두 은총에 이끌리어 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 일들 중 특별히 기억되는 일이 있습니다. 한 번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캄보디아에 있는 청소년 공부방을 도운 일입니다. 그곳은 정전이 자주 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몇몇 교회가 재정을 후원해 햇빛발전소를 세워주기로 했습니다. 우리 청파교회도 후원에 참여했습니다. 얼마 후 그 공부방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제 정전이 되어도 전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하다고. 햇빛발전소 전기로 공부방의 어둠을 밝히고 더위를 날릴 수 있게 되어서 고맙다고.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우리 청파의 후원이 어둠 속 빛이 되고 더위 속 바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제 마음까지 환해지고 시원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시몬 베유는 우리의 영혼은 가만히 두면 중력에 이끌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의 힘찬 움직임 같은 것이 필요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연어가 물살에 떠내려가듯 우리의 영혼은 중력에 끌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욕망에 이끌리지 말고 은총에 이끌리어 살아갑시다. 나의 기준과 사회적 장벽을 넘어 너의 아픔과 상처를 보듬는 자리로 나아갑시다.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는 기쁨과 보람을 삶의 양분으로 삼고 살아갑시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무너져가는 이 세상을 다시 새롭게 세워주실 것입니다. 2025년 새해, 청파의 모든 교우와 이 시대의 모든 믿음의 백성들이 은총에 이끌리어 살아갈 수 있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