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재홍목사

복 있는 사람 (시편 1편) / 김재홍 목사

새벽지기1 2025. 2. 13. 06:17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함 같으니,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다.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한낱 바람에 흩날리는 쭉정이와 같다. 그러므로 악인은 심판받을 때에 몸을 가누지 못하며, 죄인은 의인의 모임에 참여하지 못한다. 그렇다. 의인의 길은 주님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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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씀을 등불 삼아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소망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이번 수요일은 정월대보름입니다. 설 지나 첫 보름달이 듭니다. 겨울 밤하늘에 뜬 보름달은 유난히 밝습니다. 고등학생 때 겨울방학을 맞아 전라도 장수에 있는 친구의 집에 놀러간 적이 있습니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도착했는데 정류장부터 집까지 한참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가로등도 없는 길이었는데 모든 게 환하게 보였습니다. 달빛이 그만큼 밝았던 거지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는데 달 주위로 커다란 둥근 테가 보였습니다. 달무리였습니다. 저는 그때 달무리를 처음 보았는데 장관이었습니다. 찬송가 299장 ‘하나님 사랑은’이란 찬양의 3절 가사는 이렇습니다. ‘그 사랑 앞에는 풍파도 그치며 어두운 밤도 환하니 그 힘이 크도다’ 그 찬양을 부를 때면, 그날 밤의 달무리가 생각납니다. 우리가 어두운 순간을 만날 때마다 정월보름달보다 더 밝은 빛 되신 주님께서 우리의 앞길을 환히 비추어 주시길 소망합니다.

시편 119편 저자는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새해 맞아 우리 삶의 등불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읽고 계신지요? 우리 교우들이 선교회, 속회, 부서별로 열심히 성경을 읽고 있다는 말씀을 전해 듣고 있습니다. 환경부는 해마다 1월 1일부터 부활절까지 성경을 통독하고 있습니다. 서너 달만에 성경을 통독하기 위해서는 하루에 10장 이상씩 읽어야 하는데 대단한 열심입니다. 말씀을 사모할수록 자주 읽게 되고, 꾸준히 공부하며 읽을수록 말씀은 우리에게 빛과 힘이 됩니다. ‘성서일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성서정과라고도 하는데, 매일 규칙적으로 읽어야 할 성경본문을 정해놓은 것 입니다. 1년 안에 성경을 통독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성경 읽기표’ 하고는 조금 다릅니다. 총 3년에 걸쳐서 성경을 1독 할 수 있도록 짜놓은 표인데, 교회 절기에 맞추어 읽어야 할 본문이 정해져 있습니다. 구약의 한 곳, 시편의 한 곳 그리고 신약 서신서의 한 곳과 복음서의 한 곳의 말씀을 읽도록 되어 있습니다. 1년이 걸리는 성경통독이든 3년이 걸리는 성경통독이든 다 좋습니다. 말씀을 사모하며 꾸준히 공부하여 말씀을 길 삼아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2. 시편 1편


오늘은 여러분과 시편 1편의 말씀을 묵상해보려 합니다. 시편 1편은 다른 시편들과 같은 시편이면서도 좀 다른 의미가 담겨 있는 시편입니다.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수십 편의 시가 실려 있는데 시집의 제일 앞 지면에 서시가 쓰여 있습니다. 서시에는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시인의 지향과 정서가 담겨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시편 1편에는 시편 150편을 관통하는 정신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정신은 시편 150편만 관통하는 정신이 아니라 구약 전체를, 더 나아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정신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은’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복 있는 사람이 되어 사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복’은 우리 동양 사람들이 생각하는 오복 - 수 부 강령 유호덕 고종명(오래 살고, 많은 재산을 얻고, 건강하고, 덕을 좋아하고, 편안히 죽는 것) - 과는 조금 다릅니다. 시편의 저자는 복 있는 사람이 되어 사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그 반대의 경우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것은 다음의 세 가지입니다. 첫째, 악인의 꾀를 따르는 것. 이득을 위해서라면 그릇된 일도 서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죄인의 길에 서는 것. 여기서 ‘죄’는 히브리어로 ‘하타’라고 하는데 ‘표적에서 빗나가다’, ‘길에서 벗어나다’라는 뜻으로 길이 아닌 길을 가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 것. 여기서 오만은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높이는 것뿐 아니라 하나님보다 자신을 높이는 것 또한 포함하는 것으로 자신을 지극히 높이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볼 대목은 악인이라 칭할 수 있는 사람의 상태가 점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작은 이득을 따르다가 그릇된 길에 서게 되고 나중에는 사람들뿐 아니라 하나님마저 우습게 여기는 자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자리에 앉게 되었다’는 말은 그가 그런 오만한 존재로 고착되었다는 말로 볼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누룩의 비유가 두 종류가 나옵니다. 천국도 누룩처럼 퍼져 나가지만, 악 또한 누룩처럼 금방 번져 나갑니다. 복 있는 사람이 되어 살려고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 반대의 사람, 악인이 되어 살지 않으려 주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 있는 사람은 누구냐’, 이에 대해서 시편 1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 여기서 율법은 ‘토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모세오경으로 국한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한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할 때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산 좋아하는 사람은 산을 다녀야 살아갈 힘을 얻고, 책 좋아하는 사람은 책을 읽어야 살아갈 힘을 얻고, 맛있는 것 좋아하는 사람은 맛있는 것을 먹어야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힘으로 삼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힘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일뿐 아니라,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묵상’은 조용한 분위기에서 눈을 감고 말없이 마음속으로 그 뜻을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묵상은 히브리어로 ‘하가’라고 하는데, 이는 우리 말 ‘읊조리다’에 가깝습니다. 뜻을 음미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읊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암송’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차라리 말씀을 씹고 씹고 곱씹어 내면화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그의 밖에 있지 않고 그의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그저 그의 머리나 입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속에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내면화한 사람은 그 말씀을 자기 삶을 통해 사람들에게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시인이 3절에서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함과 같다,고 말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힘으로 삼고 사는 사람, 말씀을 온전히 내면화한 사람은 생명의 열매를 세상에 내어놓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바람에 날리는 쭉정이와 같습니다. 쭉정이는 시냇가에 심기어 철따라 열매를 맺는 나무와 완전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악인은 처음부터 쭉정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익을 얻기 위해 그릇된 길을 갔습니다. 이익을 얻어 높은 자리,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앉고 보니 사람들을 우습게 여기게 되었고, 나중에는 하나님마저도 우습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길은 그릇된 길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길을 인정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심판하셨습니다. 그 결과 그는 의인의 모임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가 얻은 이익과 그가 차지했던 자리는 모두 사라졌고, 그는 한낱 바람에 날리는 쭉정이가 된 것입니다.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와 바람에 날리는 쭉정이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입니까? 크고 작음? 뿌리가 있고 없고? 그 둘의 가장 큰 차이는 생명의 유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힘으로 삼고 말씀을 온전히 내면화한 사람 속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는 말씀의 열매인 생명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줍니다. 그러나 자기의 이익을 위해 그릇된 길을 가며 다른 사람을 우습게 여기고 하나님마저 무시하는 사람 속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의 내면에는 삐뚤어진 욕망과 일체가 된 그 자신과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시편 1편의 마지막 구절은 짧으면서도 강렬합니다. “의인의 길은 주님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 이는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가 악인의 길이 아니라 의인의 길을 갈 수 있길 소망합니다.

3. 시편 1편과 마태복음


앞서 시편 1편에는 성서를 관통하는 정신이 담겨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시편 1편의 메시지와 마태복음의 메시지가 아주 유사합니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은’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도 비교적 앞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5장에 그와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원어성경에는 “복이 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시편 1편의 ‘복 있는 사람은’과 비슷하지요? 그뿐 아니라, 팔복의 복과 시편 1편의 복은 그 지향이 비슷합니다. 시편1편의 복이 자기 자신만의 복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 생명을 전하는 복이었듯이 팔복의 복 또한 다른 이를 복되게 하는 복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하게 사는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은 자기 자신보다 다른 이를 복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시편 1편에 나온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을 나누는 심판의 말씀은 마태복음 25장의 최후의 심판을 통해 양과 염소를 나누는 말씀과 비슷합니다.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를 영접해 주고, 헐벗을 자를 입혀 주고, 병든 자를 돌봐주고, 갇힌 자를 찾아봐 준 자, 곧 다른 이에게 복을 주고 생명을 준 자는 의인의 모임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자, 그런 이들을 돌보지 않았던 자, 곧 다른 이에게 복이 되어 주지 못하고 생명을 나누어주지 못한 자는 의인의 모임에 참여할 수 없게 됩니다.

시편 1편에 나온 바람에 날리는 쭉정이와 같은 자는 마태복음 21장에 나오는 무화과 나무를 연상시킵니다. 그 무화과는 이파리만 무성할 뿐 열매는 없었습니다. 시편 1편의 쭉정이가 악인을 상징했던 것과 같이 그 무화과는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제사장과 바리새파 무리를 상징합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의로운 척했지만 속은 부패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전과 율법을 통해 하나님과 백성을 섬긴 것이 아니라 성전과 율법을 팔아 자기의 배를 섬겼습니다. 그들은 또한 스스로가 하나님이 되어 자기들의 기준에 어긋나는 자는 죄인으로 낙인을 찍어 공동체 바깥으로 내어쫓고 때로는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성전과 율법과 하나님을 운운했지만 그 안에는 생명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주후 70년 로마의 공격을 받아 예루살렘 성전과 더불어 바람에 날리는 쭉정이처럼 사라졌습니다.

4. 복 있는 사람은


제가 20대 때 온양에서 개척교회 목회를 할 때의 일입니다. 교인들은 대부분 어린이와 학생들이었고 성인들은 많지 않아 재정적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가까운 곳에 선배 목사님이신 장춘근 목사님이 목회를 하고 계셨는데 자주 찾아와 교회와 우리 가정의 상황을 살피고 가셨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교회에 가려고 문을 열었는데 문앞에 쌀자루가 놓여 있었습니다. 장 목사님이 두고 가신 것입니다. 그런 일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장 목사님의 교회도 재정적 상황이 넉넉한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중고등학생들이 주축이 된 교회였습니다. 장 목사님은 교회 아이들도 당신의 아이들처럼 아주 살뜰하고 정성스럽게 챙기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지역에 있던 장애인 시설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그곳에 계신 분들에게도 정성을 쏟으셨습니다. ‘생명을 전해주려 노력하는 사람’, 그것이 제가 몇 년 동안 지켜본 장 목사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목사님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사람이 한 권의 하나님의 말씀과도 같을 수 있구나.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은 저런 것이구나.’ 어느 해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던 때, 그러니까 딱 요맘때, 장 목사님과 논둑 옆을 걷고 있었습니다. 논둑에는 냉이가 많았습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김 전도사님, 냉이 좋아해요? 요즘 냉이가 한참인데. 그런데 그거 알아요. 뿌리를 깊게 내린 냉이일수록 향이 진해요. 사람도 마찬가지 같아요. 어렵고 힘들수록 하나님과 말씀 속에 깊게 뿌리를 내리는 사람의 향이 진해요.”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복 있는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말씀에 당신의 존재의 뿌리를 깊게 내리고 하나님과 말씀의 힘으로 사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 당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 보여 주셨고, 육신이 말씀이 되어 사셨습니다. 성경이 시종일관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는 복 있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을 닮아 하나님과 말씀에 깊게 뿌리를 내려 그 힘으로 살아가고 사람들에게 복과 생명을 전하는 복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우리 청파의 모든 교우들과 이 시대의 믿음의 백성들이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