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05 12

빛과 온기의 사람 (눅24:28~32) / 김재홍 목사

'그 두 길손은 자기들이 가려고 하는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더 멀리 가는 척하셨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를 만류하여 말하였다. "저녁때가 되고,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우리 집에 묵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려고 앉으셨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셨다. 그제서야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한순간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우리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1. 부활절기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

누가 돌을 굴려줄까?(막 16:1~8) / 김재홍 목사

'안식일이 지났을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가서 예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그래서 이레의 첫날 새벽, 해가 막 돋은 때에,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누가 우리를 위하여 그 돌을 무덤 어귀에서 굴려내 주겠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그런데 눈을 들어서 보니, 그 돌덩이는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 돌은 엄청나게 컸다. 그 여자들은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웬 젊은 남자가 흰 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놀랐다. 그가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놀라지 마시오. 그대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그는 살아나셨소.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소. 보시오, 그를 안장했던 곳이오. 그러니 그대들은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

완전한 구원, 영원한 경배 (계 7:1~17) / 이재훈 목사

이 기록된 목적은 악한 세상에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반드시 있을 것이며, 동시에 어린 양을 따르는 성도들은 그 진노와 심판으로부터 확실히 구원받는다는 것을 알려주고 격려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한 번에 완전히 임하는 게 아니라 여러 차례 경고성 심판이 이어질 것이고, 회개할 기회가 주어지지만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고집하는 이들에게는 마지막 심판이 주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곱 인들이 하나씩 떼어질 때마다 심판이 임하는데 땅의 4분의 1에 재앙이 임합니다. 그 다음 일곱 나팔의 재앙에서는 나팔이 불려질 때마다 땅의 3분의 1에 재앙이 임합니다. 마지막 일곱 대접의 심판에서는 제한 없이 땅의 모든 영역에 심판이 임합니다. 마지막 심판은 불가피합니다. 여섯 번째 인이 떼어질 때 마지막 심판이..

목사공부(14) 목회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밀접해지는 목사 / 정용섭 목사

목회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밀접해지는 목사라고 한다면 그는 목회를 수행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그런 목사는 목회 행위에 존재론적으로 참여하기 때문에 결과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당연하지 않겠는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목회의 기쁨을 얻는 사람이 주변의 반응에 일희일비할 까닭이 있겠는가. 이게 과연 현실 목회에서 가능하겠는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교회 구조가 열악하면 아무리 뛰어난 영성의 목사라고 하더라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목사 한 사람의 의식이 변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교회 구조도 거기에 따라줘야 한다. 성장 구조로 고착된 교회에서 목회를 수행의 차원에서 밀고나가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구조가 바뀌려면 시간이 좀더 필요하다. 한 세대 이상의 시간이 필..

목사공부(13) 목회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져야 한다. / 정용섭 목사

수행으로서의 목회라는 말은 목회를 구원 행위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이런 쪽으로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목사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소명을 받았다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것처럼 큰 착각도 없다. 목사는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다. 그가 남을 구원할 수도 없다. 단지 전문적인 교육을 받아서 목회를 책임지고 있을 뿐이다. 목사의 이러한 역할이 별 게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역할은 크다. 크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구원에 천착해야 한다. 그게 전제되지 않으면 목사의 영성은 훼손되고 말 것이며, 수행의 길을 갈 수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종교 장사꾼으로 머물 뿐이다. 목회를 구원 행위로 받아들인다는 말은 목회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당연한 말이라..

목사공부(12) 칭의가 아니라 자기의에 치우친 신앙생활 / 정용섭 목사

한국교회 신자들에게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신앙의 아이러니는 다음이다. 겉으로는 믿음을 강조하는데 실제로는 업적주의에 치우쳐 있다. 칭의가 아니라 자기의(義)에 기울어진 셈이다. 믿음조차도 업적으로 변질되었다. 신자들은 믿음이라는 사태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자신의 종교적, 또는 인간적인 욕망을 채우려고 한다.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예를 여기서 일일이 열거하지 않겠다. 하나의 예만 들면 충분하다. 한국교회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책들을 보라. 모두 종교적 업적과 욕망을 자극하는 것들이다. 기도를 통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게 되었다는 간증 유의 책들이 범람하고 있다. 이건 믿음이 아니라 자기 확신이며, 영성이 아니라 심리학이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칭의가 아니라 자기의에 치우친 신앙생활의 ..

목사공부(11) '칭의는 수행의 존재론적 근거다.'/ 정용섭 목사

수행을 달가워하지 않는 또 하나의 다른 이유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율법이 아니라 복음에서 찾는다는 사실에 있다.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사실에 충실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겉으로는 이게 말이 된다.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덕을 아무리 높이 쌓는다고 해도 그것으로는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없다. 그런 노력은 우리를 좌절하게 하거나 교만하게 만든다.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충분히 해명했고, 루터도 오직 믿음과 오직 은총이라는 신학 개념에서 분명하게 언급한 칭의(稱義)에 대한 가르침이 그것이다. 실제로는 의롭지 않지만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는 뜻이다. 바울과 루터의 칭의론에 근거해서 수행을 외면하는 건 칭의에 대한 오해일 뿐만 아니라 수행에 대한 오해이기도 하다. 칭의는 업적주의에 대한 ..

목사공부(10) 수행자의 영성 / 정용섭 목사

수행으로서의 목회가 무슨 뜻일까? 이에 대한 대답을 찾기 전에 한국교회 신자들이 수행(修行)이라는 말을 별로 탐탁스러워하지 않는 이유를 먼저 짚어야겠다. 이를 확인하면 목사가 목회를 왜 수행의 차원으로 대하지 못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한국교회 신자들은 수행을 불교나 유교와 같은 동양 종교의 특성으로 여긴다. 그게 틀린 말은 아니다. 불교, 유교, 도교 등은 수행을 자기들 종교의 가장 큰 덕목으로 생각한다. 암자나 토굴에 들어앉아서 묵언 수행하는 일은 흔하다. 성철이라는 승려는 8년 동안이나 장좌불와(長坐不臥), 즉 눕지 않은 채 가부좌의 자세를 유지하면서 수행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기독교에도 이런 수행의 전통이 없는 게 아니다. 중세기에는 사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