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두 길손은 자기들이 가려고 하는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더 멀리 가는 척하셨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를 만류하여 말하였다. "저녁때가 되고,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우리 집에 묵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려고 앉으셨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셨다. 그제서야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한순간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우리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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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활절기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주일은 부활절이면서 곡우였습니다. 곡우穀雨는 봄비를 맞고 곡식이 풍성하게 자라는 절기라는 뜻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비가 적당히 내렸고, 한두 주 사이에 나무들은 푸른 잎을 더욱 많이 피워냈습니다. 작년 가을에 교회 화단에 새로 심었던 배롱나무와 능소화 가지 끝에서도 푸른 잎이 돋아났습니다. 수개월 동안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정도로 아무런 변화가 없더니 부활절을 지나며 부활했습니다. 뿌리를 잘 내린 것입니다. 이제 그들도 우리의 식구입니다. 이제 칠팔월에 배롱나무꽃과 능소화가 피면 교회마당에는 새로운 풍경이 펼쳐질 것입니다.
부활절기는 7주간 지속됩니다. 오늘은 부활절 제2주라 앞으로 6주가 지난 후에 우리는 성령강림절을 맞게 됩니다. 성령강림절은 유대절기로는 칠칠절, 오순절입니다. 유월절 후 일곱 주, 곧 50일 후 맞게 되는 날이라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부활절기 동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의미를 깊게 묵상해야 합니다. 오늘은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 나온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통해 부활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2.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
영화 <레미제라블>의 한 장면입니다. 18세기말 프랑스에서 부패한 왕정을 무너뜨리고 자유와 민주의 시민사회를 이루려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리우스는 친구들과 한 방에 모여 혁명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키우며 열띤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혁명군은 군대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이 되었고, 친구들은 죽고 마리우스 혼자 장발장의 도움으로 살아남았습니다. 마리우스는 친구들과 함께 지냈던 그 방으로 가서 빈 의자와 빈 테이블을 바라보며 이렇게 탄식합니다.
의자와 테이블 모두 비어있네요 / 이제 내 친구들은 죽어 사라졌어요
여기서 그들은 혁명에 대해 이야기했지요 / 여기서 그들은 불꽃을 일으켰어요 여기서 그들은 내일을 노래했어요 / 그러나 내일은 결코 오지 않았어요
오 친구들아 친구들아 나를 용서해다오 / 나는 살고 너희는 떠났구나 너희들의 희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내게 묻지 말아다오 의자와 테이블은 모두 비어있네요 / 나의 친구들은 더 이상 노래하지 않아요
그 마리우스처럼 큰 절망과 상실감 속에서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에게 예수님은 로마의 폭력적 지배와 부정하고 부패했던 성전지도자들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였고, 불꽃이었으며,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무력하게도 유월절 명절 목요일 밤에 성전경비대에 잡히셨고,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는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은 앞으로 어찌 살아가야 할지,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지, 그렇게 허망하게 끝내실 것이었다면 예수님은 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셨던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은 그렇게 충격과 슬픔과 공허한 마음으로 각자의 길로 흩어졌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도 그런 무리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낯선 사내가 다가와 같이 걷기 시작했습니다. 사내는 그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가 물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으로 알고서 그분에게 소망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를 죽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두 제자의 고백은 참 슬픈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힘이 있는 예언자였다. 우리는 그에게 소망을 걸었었다. 모두 과거형입니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의 반대말은 ‘나는 너를 미워한다’거나 ‘나는 너를 사랑 안한다’가 아니라 ‘나는 너를 사랑했었다’라고. 두 제자의 말은 ‘예수님은 힘이 있는 예언자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우리는 그에게 소망을 걸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사내는 그 두 사람에게 성경을 들어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너무 충격적이고 슬픈 일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그 일은 메시야가 겪어야 할 고난이었음을 하나님께서 이미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지 않았느냐’고, ‘메시야는 그 고난을 통해 영광에 이르는 것이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저녁때가 되어 엠마오에 이르렀고, 함께 집에 들어가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내는 빵을 들어 축복하고, 떼어서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모습은 유월절 만찬 때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제야 두 제자는 눈이 열려 그 사내가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예수님은 사라지셨습니다. 두 제자는 놀라 서로 말했습니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 렘브란트는 <엠마오의 저녁식사>라는 그림에서 예수님을 빛나는 존재로 그리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눈에도 예수님은 밝게 빛났을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어둡던 마음이 다시 밝아지고, 불 꺼진 아궁이 같이 식었던 마음이 다시 뜨거운 마음으로 변했습니다.
3. 디베랴 바닷가의 제자들
요한복음 21장에도 제자들과 부활하신 예수님이 만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20장에도 나오고 21장에도 나오는데, 성서학자들 중에는 21장의 만남이 20장의 만남보다 먼저 있었던 만남으로 보는 이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후 제자들은 디베랴 바다, 곧 갈릴리 호수로 돌아갔습니다. 베드로가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하니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가겠소”하고는 옛 생활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로 돌아간 제자들의 마음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 그 두 제자들보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깊고 사랑이 컸던 만큼 충격과 슬픔과 공허감은 더욱 컸을 것입니다. 고기 잡는 어부로 돌아간 것은 ‘이제부터는 예수를 완전히 잊고 고기 잡으며 돈벌이나 하자’라는 것이 아니라, 충격과 슬픔과 공허감을 달래기 위해 뭐라도 해야 했기에 했던 슬픈 몸부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제자들의 충격과 슬픔과 공허감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빈 그물이 제자들의 마음, 영혼의 상태였습니다.
밤이 지나고 동틀 무렵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내가 호숫가에 와서 제자들이 탄 배를 보고 섰습니다. 그 사내는 제자들에게 “무얼 좀 잡았나?”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못 잡았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내가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리하면 잡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니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서 그물을 끌어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 일은 예수님께서 베드로 일행을 처음 제자로 부르실 때 일어난 일과 똑같은 일이었습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그 사내가 부활하신 예수님인 것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성미 급한 베드로는 호수로 뛰어내려 헤엄쳐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땅으로 올라와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숯불을 피워 놓으셨고, 그 위에 생선도 구워놓으셨고 빵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와서 아침을 먹으라”하셨습니다. 시간이 밤에서 아침으로 변하였듯 어둡던 제자들의 마음은 다시 밝아졌을 것이고, 예수님께서 차려주신 따스한 생선과 빵을 먹으며 빈 그물 같이 공허하던 마음은 다시 든든하게 채워졌을 것입니다.
4. 빛과 온기의 사람
누가복음과 요한복음 속에 등장한 부활하신 예수님은 빛과 온기의 존재였습니다. 어둠과 절망 속에 있던 제자들에게 빛과 희망이 되어주셨고, 식어버리고 공허하게 변해버린 제자들의 마음을 다시 뜨겁고 든든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빛과 온기가 되어주신 예수님의 모습은 부활하신 이후의 모습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공생애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이었습니다. 한밤중에 당신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빛과 같은 깨달음을 주셨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걸린 여인에게는 따스한 보호막이 되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빛과 온기가 되어주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살던 모습 그대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살던 모습이란 신체적 외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이를 대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그랬기에 제자들은 처음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지만, 그가 하시는 일, 살아생전에 하시던 일을 그대로 하시는 것을 보고 그제야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인 것을 알아본 것입니다. 현재의 삶이 따로 있고 부활의 삶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살던 모습 그대로 부활합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부활할 만한 삶이 부활합니다. 그러면 부활할 만한 삶이란 어떤 삶입니까? 그것은 너에게 빛과 온기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빛과 온기는 생명이 살아감에 있어 필수 요소입니다. 빛과 온기는 생명입니다. 나에게 빛과 온기를 준 사람을 우리는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가 내게 생명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빛과 온기가 되어 살았던 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지난 주 월요일인 4월 21일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교황의 본명은 베르골리오입니다. 그는 교황이 되면서 교황의 이름으로 ‘프란치스코’를 선택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13세기 가톨릭의 성인으로 가난하게 살았으며 가장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교황은 본인 또한 청빈하게 살아갈 것과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살아갈 것을 다짐하며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는 정말 이름대로 살았습니다.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며 교황궁에서 살지 않고 방문객 숙소에서 살았습니다. 늘 어디를 가나 작은 차를 탔습니다. 그리고 그는 빈민과 장애인을 가까이했으며, 이민자와 난민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으며, 무슬림과 같은 타종교인과도 격의 없이 지냈으며, 성소수자도 포용했습니다. 그는 노인과 죄수들의 발을 씻겨주고 그 발에 입을 맞추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스러져가는 자연생태계를 되살리기 위해 사람들에게 생태적인 삶으로 전환하라고 강력하게 요청했고, 전쟁과 내전으로 고통당하는 이들을 위해 죽기 직전까지 평화와 종전을 위해 애를 썼습니다.
그는 2014년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는데, 그때 세월호 유가족들을 여러 번 만났습니다. 차량으로 이동 중 세월호 희생자였던 유민이 아빠를 보고는 차에서 내려 그에게 다가가 손을 꼭 잡아주었습니다. 유족들이 프란치스코에게 노란 리본을 달아드렸는데, 곁에 있던 이가 ‘정치적 중립을 위해 리본을 떼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씀 드렸을 때,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라며 계속 노란 리본을 달았습니다. 2019년에는 바티칸으로 내전을 벌였던 남수단의 대통령과 반군의 지도자를 초청했습니다. 그 둘은 수년 간 전쟁을 벌여 서로 수십 만 명을 죽였던 사이였습니다. 그 둘은 어렵게 평화협정을 맺었으나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는 약속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 둘에게 평화협정을 지킬 것을 강하게 당부하였습니다. 그런 후 프란치스코는 갑자기 바닥에 엎드려 그 사람들의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그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를 낮추고 비워 어떻게 해서든 사람들에게 생명과 평화를 가져다주려던 사람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남은 육신은 유언에 따라 장식 없는 나무관에 담겼고, 역대 많은 교황이 모셔진 성 베드로 성당이 아니라 바티칸 밖에 있는 성모 마리아 성당에 안장되었고, 묘비에는 ‘프란치스코’라고만 적도록 했습니다. 그는 마지막 가는 길까지 청빈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부활절 다음날 별세했습니다. 그는 많은 이에게 빛과 온기를 전해 주며 살았습니다. 그러했기에 많은 이가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고, 그를 영원히 기억하겠다 말하고, 그를 따라 살겠다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자기를 더 밝게 만들기 위해서 기꺼이 너를 더 어둡게 만드는 세상입니다. 나를 더 따뜻하게 만들기 위해 기꺼이 너를 더 춥게 만드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더 냉혹해지고 있습니다. 빛과 온기의 사람이 절실합니다. 예수님처럼 빛과 온기의 사람으로 살아갑시다. 우리가 서로의 마음속에 빛과 온기의 씨앗을 뿌리며 살아갈 때, 우리는 서로의 마음속에서 빛과 온기로 부활할 것입니다. 그 귀한 일을 기쁘게 감당하는 청파의 교우들과 이 시대 믿음의 백성들이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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