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각 지파에게 주시는 모든 성읍에 재판관과 지도자를 두어, 백성에게 공정한 재판을 하도록 하십시오. 당신들은 재판에서 공정성을 잃어서도 안 되고, 사람의 얼굴을 보아주어서도 안 되며, 재판관이 뇌물을 받아서도 안 됩니다. 뇌물은 지혜 있는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하고, 죄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듭니다. 당신들은 오직 정의만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만 당신들이 살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주시는 땅을 당신들이 차지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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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명기 법전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위로와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오늘은 어버이주일을 맞아 십계명의 5계명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계명에 담긴 의미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십계명은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지켜야 하는 계명이고, 5계명부터 10계명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지켜야 하는 계명입니다. 부모 공경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지켜야 할 계명 중 가장 중요하고 근본 된 계명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부모와의 관계를 바르게 지킬 때 다른 인간과도 바른 관계를 바르게 지킬 수 있다는 뜻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지난달 수요성경공부시간에 신명기 강의를 들으신 분들은 아시겠습니다만, 신명기 12장부터 26장까지는 신명기의 핵심인데 ‘신명기 법전’이라고 부릅니다. 신명기법전은 수백 개의 계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계명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게 될 때에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계명들이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 계명들을 지키면 장수하고 그 땅에서 계속 살 수 있지만, 그 계명들을 지키지 못할 시에는 많은 이가 죽고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먼 타국으로 끌려가 노예로 살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신명기 법전에는 수백 개의 계명이 나열되어 있어 계명들 간의 연관성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서학자들에 따르면 신명기 법전은 십계명의 확장판 형태로 작성된 것입니다. 12장부터 26장까지 열네 장에 걸쳐 나열된 수백 개의 계명은 아무 연관성 없이 나열된 것이 아니라 십계명의 순서에 따라 10개의 묶음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12:1~28에 나오는 여러 개의 계명들은 십계명의 1계명인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의 확장된 해석이고, 바로 그 뒤인 12:29~13:18에 나오는 여러 개의 계명들은 십계명의 2계명인 ‘우상을 만들지도 말고 절하지도 말라’의 확장된 해석인 것입니다. 하나의 십계명의 계명을 여러 계명으로 설명하고 있어서 우리는 십계명의 의미를 보다 깊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14:1~21은 3계명,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장례 문화에 대한 계명이 나옵니다. ‘죽은 사람을 애도할 때에 몸에 상처를 내거나 앞머리를 밀어서는 안 된다.’ 이방사람들은 장례 중 죽은 이와 접속하기 위해 몸에 상처를 내거나 머리를 밀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수십 종류의 동물들이 나열됩니다. 어떤 것은 정한 동물로 어떤 것은 부정한 동물로 구분지었습니다. 정한 동물은 먹을 수 있지만, 부정한 동물은 먹을 수 없습니다. 소와 붕어와 메추리는 먹을 수 있지만, 돼지와 장어와 타조는 먹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장례나 식생활과 같은 일상생활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행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십계명이 신명기 법전에서는 ‘일상생활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행해야 한다’는 계명으로 재해석되었습니다. 신명기 14:22~16:17은 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에 대한 말씀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씀과 더불어, 십일조와 안식년, 이스라엘의 삼대 절기인 유월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을 지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십일조와 안식일을 묶어 설명한 것은 안식일은 시간의 십일조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십일조를 드릴 때 매 삼 년 끝에는 소출의 십일조를 모아 레위인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삼대 절기를 지킬 때 자신만 절기 축제에 참여하지 말고 종들까지 함께 축제에 참여하게 하라고 명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십계명의 계명이 신명기 법전 속에서 ‘가난한 이들도 함께 안식하라’는 말씀으로 확장되었습니다.
2. 네 부모를 공경하라
5계명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신명기 16:18에서부터 18:22에 이르기까지 꽤 길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신명기 법전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아주 획기적으로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법전은 이스라엘 사회에 있어서 부모의 역할을 맡은 이들인 재판관, 왕, 제사장, 예언자의 책임을 언급했습니다. 재판관은 공정성을 잃어서는 안 되고, 관계에 따라 재판하면 안 되며, 뇌물을 받아서도 안 됩니다. 공정성을 잃은 재판, 관계에 따라 이루어지는 재판, 뇌물을 받고 하는 재판은 죄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재판관은 오직 정의만을 따라야 합니다. 정의를 많은 말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쉽게 말하면 정의란 누가 보아도 옳은 것입니다. 왕은 많은 군대의 말이나 많은 아내나 많은 돈을 가까이 해서는 안 됩니다.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뀔 때, 그러니까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고 많은 군대의 말이나 아내나 돈을 가까이 할 때 백성을 업신여기게 되고 좌로나 우로나 한쪽으로 치우치게 됩니다. 제사장은 물려받은 땅은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유산이십니다. 그러니 제사장은 물질에 연연해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이 말하라고 하지 않은 것을 자기 마음대로 전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예언자는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부모가 바로 서야 가정이 바로 서듯, 지도자가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섭니다. 이스라엘의 재판관들은 공정성을 잃고 관계에 따라 재판하고 뇌물을 받고 재판했습니다. 정의를 저버리고 재판했습니다. 죄 없는 자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왕은 많은 군대의 말을 사들이고, 많은 아내를 두고, 많은 금과 은을 모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고 백성을 업신여겼습니다. 제사장들은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을 두고 살았습니다. 예언자들은 자기의 비뚤어진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했습니다. 그렇게 백성의 어버이 된 지도자들이 무너지자 나라가 멸망했고, 나라가 멸망하자 그 고통은 백성들이 감당해야 했습니다. 모세의 예언처럼, 수많은 이가 죽었고, 포로로 끌려갔고, 뿔뿔이 흩어져 떠돌이가 되어 살아야 했습니다. 신명기 법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지도자들을 무조건 부모처럼 공경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명기 법전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향해, ‘당신들은 사회의 어버이로서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준엄하게 묻고 있습니다.
3. 사람에 대한 책임
신명기 법전은 십계명을 해석할 때 사회의 공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 양상은 신명기 법전 전반에 고루 나타나고 있으나 8계명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십계명의 ‘도둑질하지 말라’는 8계명은 신명기 법전에서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면 안 된다’, ‘물건을 저당 잡을 때에는 맷돌까지 저당 잡으면 안 된다’는 계명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자를 받는 것과 맷돌을 저당 잡는 게 도둑질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자를 과하게 받으면 채무자는 빚과 이자를 갚기 위해 도둑질을 할 수도 있고, 빵을 주식으로 삼았던 사람에게서 맷돌을 빼앗아간다는 것은 그를 굶주리게 만드는 것이고, 굶주린 이가 다른 집의 맷돌이나 음식을 도둑질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말라고 명한 것입니다. 곧 신명기 법전은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도둑질하지 않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라’는 계명으로 확장시켰습니다. 도둑질은 한 개인의 문제일 수 있지만 사회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신명기 법전의 생각입니다. 신명기 법전은 사회적 약자들의 문제를 그들만의 문제로 보지 않고 사회와 사회지도자들이 함께 풀어가야 할 문제로 보았습니다. 신명기 법전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로 만들기 위한 율법서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란 사람이 사람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공동체는 비단 신명기만 지향한 공동체가 아니라 성서 전체가 지향한 공동체이며, 하나님이 바라신 공동체이며, 우리 예수님께서 공생애 내내 이 땅 위에 이루기 위해 노력하신 공동체였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사회적 약자들의 문제를 그들만의 문제로 보지 않으시고, 마치 당신이 그들의 어버이라도 되신 듯이 그들의 문제를 당신의 문제로 여겨 적극 개입하셨습니다. 병든 자의 병을 고쳐주셨고,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셨고, 유대인이 인간으로 여기지 않던 이방인 여인의 딸도 고쳐주셨고, 당신의 말씀을 듣기 위해 들판으로 나왔던 가난한 사람들의 배고픔까지도 당신의 배고픔으로 여기셔서 그들로 하여금 배부르게 먹게 해 주셨습니다.
사람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공생애 마지막 유월절 때, 예수님께서 로마 병사들과 성전 경비병들에게 잡히실 때도 드러났습니다. 사람들이 횃불과 무기를 들고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을 찾아오자,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요.”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찾는 것은 나이니, 이 사람들은 물러가게 하여라.” 예수님도 살고자 하는 생명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위험을 홀로 감당하시고, 당신의 제자들은 위험 뒤로 물러서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8장은 그 행동의 이유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수께서 전에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나는 한 사람도 잃지 않았습니다.’하신 그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사람들 중 한 사람도 잃지 않기 위해 책임을 다하신 분이셨습니다. 어떤 지도자는 위험을 만나면 뒤로 숨으면서 자기 책임하에 있는 사람들을 방패막이로 이용합니다. ‘베드로, 앞을 막아라’, ‘야고보, 뒤를 막아라’, ‘요한, 나는 빠져나갈테니 네가 나인척 해라.’ 예수님이 이러셨다면 이상하지요? 우리 사회에서 지도자들은 사람을 ‘책임지기’보다 ‘이용’합니다. 그러다보니 성과는 얻을지 몰라도 사람을 잃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를 따라 사는 것, 그것은 사람을 이용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사람을 책임지며 사는 것입니다.
4. 너의 뒤에 내가 있다.
우리 한국 사회는 그 어느 사회보다 우울과 불안 지수가 높습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사람을 책임지기보다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이 드라마에 열광했는지도 모릅니다. <폭싹 속았수다> 사랑하는 남녀의 순수한 사랑, 변치 않는 헌신적인 사랑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부모 됨과 사람이 사람에 대해 져야할 책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딸 애순이에 대한 엄마 광례의 사랑과 딸 금명이에 대한 엄마 애순과 아빠 관식의 사랑이 눈물겨웠습니다. 금명이가 시집가던 날, 결혼식장에 입장하기 위해 금명이와 아빠 관식이 신부 입장을 위해 식장 밖에 서있습니다. 아빠가 말합니다. “잘할 수 있지? 수틀리면 빠꾸. 아빠한테 냅다 뛰어와. 알지?” 이 말은 딸이 어렸을 때부터 아빠가 자주 해주던 말이었습니다. 초등학교에 처음 가게 되었을 때, “학교 갈 수 있어? 일단 갔다가 아니다 싶으면 빠꾸. 냅다 집으로 뛰어와. 아빠가 집에 있을게.” 학교 운동회 하루 전날 달리기를 연습할 때, “1등 안 해도 되니까 못하겠으면 빠꾸. 자빠지면 아빠한테 냅다 뛰어와. 아빠가 내일 뒤에 있을게.” 고3 때 대입 시험 보러 고사장에 들어가기 전에, “영 골치 아프고 안 되겠다 싶으면 빠꾸해. 아빠가 여기 있을게.” 딸은 옛일을 회상하며 혼자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외줄을 탈 때마다 아빠는 그물을 펼치고 서 있었다. ‘떨어져도 아빠가 있다.’ 그 한 마디가 얼마나 든든했는지”
누군가 여러분에게 ‘너의 뒤에 내가 있다’라는 말을 해 준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누군가에게 ‘너의 뒤에 내가 있다’라는 말을 해 준 적이 있습니까? 둘 다 있다면 여러분은 행복한 사람이고, 둘 다 없다면 앞으로 적어도 누군가에게 ‘너의 뒤에 내가 있다’고 말해 주는 사람이 되어 사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예수님에게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요,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입니다. 물론 사람의 인생길에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처럼 혼자 걸어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혼자 서기 위해 노력할 때 사람은 깊어지고 성숙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소의 뿔이 삶의 기본값이 될 수 없고, 더욱이 사회의 기본값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회의 구성원 모두는 연결되어 있고 존재와 존재가 잇대어 있습니다.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적 존재여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그러셨듯이 우리도 서로에게 ‘너의 뒤에 내가 있다’ 말해 주며 살아갈 수 있길 소망합니다. 그리고 사회의 약자들에게 ‘당신의 뒤에 우리가 있습니다.’라고 말해 주며 살아갈 수 있길 소망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사람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청파의 교우들과 이 시대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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