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주님께서 하신 일을 선포하겠다.
주님께서는 엄히 징계하셔도, 나를 죽게 버려 두지는 않으신다.
구원의 문들을 열어라. 내가 그 문들로 들어가서 주님께 감사를 드리겠다.
이것이 주님의 문이다.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갈 것이다.
주님께서 나에게 응답하시고, 나에게 구원을 베푸셨으니, 내가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집 짓는 사람들이 내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니, 우리의 눈에는 기이한 일이 아니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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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주 5.18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위로와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부활절 제5주 주일이며, 5.18 민주화운동 45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45년 전 5월 18일도 주일이었습니다. 군부는 1980년 5월 18일 새벽 2시에 전국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하고 국회의원들을 연행해갔으며 재야인사들을 체포 구금했습니다. 광주 전남대학의 학생들은 비상계엄에 반대하며 오전 10시에 학교 정문에서 시위를 했습니다. 그 시위는 불법한 비상계엄에 대한 정당한 저항이었습니다. 그러나 군대가 이를 무력을 동원해 강제진압하면서 5.18이 시작되었습니다. 시위는 계속되었고 사망자가 발생하며 시위는 더 격화되었습니다. 시위가 격화되자 진압은 더 잔혹해졌습니다. 곤봉이 대검으로 바뀌었습니다. 대검은 남성, 여성, 어른, 아이를 가리지 않고 찔렀습니다. 대검은 곧 총탄으로 바뀌었고 총탄은 시위에 나선 사람뿐 아니라 일반시민들의 팔과 다리와 가슴과 머리를 관통했습니다. 이에 시민들도 무기를 들고 맞섰습니다. 시민들의 저항은 강렬했고 군대는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군대는 4일간 잠시 뒤로 물러나 광주를 고립시켰다가, 27일 새벽에 탱크를 앞세우고 광주 시내로 들어왔습니다. 그때 군인의 숫자는 25,000명이었습니다. 그들은 새벽 4시에 시민군들이 모여 있던 도청에 1만 발의 사격을 가했습니다. 여러 시민군이 죽고, 남은 이들이 저항을 멈추며 군의 진압 작전이 종료되었습니다.
군의 부당한 계엄에 저항한 대가가 너무 컸습니다. 그 당시 사망한 분이 165명, 행방불명자가 65명이었습니다. 행불자는 사망자와 같기에 죽은 이만 230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큰 부상을 당하였다가 수년 안에 돌아가신 분이 300명이 넘고, 부상자는 3,000명이 넘습니다. 그런데 그 부상자 수는 몸의 상처만을 계산한 숫자입니다. 몸의 상처만큼이나 고통스러운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의 숫자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습니다. 아무 죄 없는 자식이 국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도 억울하고 죽겠는데, 그 죽은 자식이 ‘폭도’로 매도되는 참담한 상황에 두 번 죽임을 당하는 것 같았던 부모들의 아픔과 고통을 어떻게 수치화 할 수 있을까요? 또한 군이 자신들의 살인을 은폐하기 위해 암매장하여 자식의 시신조차 발견할 수 없어 자식의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해 인생 전체가 장례식이 된 부모들의 한을 어떻게 수치화 할 수 있을까요?
1997년 대법원은 5.18은 군부가 일으킨 국헌문란행위에 광주시민들이 저항하며 헌법을 수호한 민주화운동이었다고 정의하였습니다. 그 후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고 피해보상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아픔과 고통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만들어 5.18 희생자를 폄훼하는 이들이 아직도 있고,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날의 고통을 잊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지금까지도 있는 것입니다. 광주 5.18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묻고 있습니다. 인간은 인간에게 무엇인가? 거대한 폭력인가? 악인가? 인간은 언제까지 이런 부조리한 비극을 반복할 것인가?
2. 시편 118편
이스라엘은 제국 이집트와 앗시리아와 바빌론의 사이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많은 고난과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성서는 이스라엘이 강대국들 사이에서 겪은 고난의 이야기에 다름이 아닙니다. 시편 129:3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밭을 가는 사람이 밭을 갈아엎듯 그들이 나의 등을 갈아서, 거기에다가 고랑을 길게”냈다. ‘등을 갈아 고랑을 길게 냈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채찍으로 등을 하도 많이 내리쳐 등이 밭고랑처럼 갈라졌다는 말입니다. 끔찍합니다. 시편 137:8,9의 말씀도 읽어보겠습니다. “멸망할 바빌론 도성아, 네가 우리에게 입힌 해를 그대로 너에게 되갚는 사람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네 어린 아이들을 바위에다가 메어치는 사람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어린 아이를 바위에다가 메어치다니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바빌론에게 그런 일을 당했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시편 118편에도 이스라엘이 겪었던 폭력과 고통이 나옵니다. ‘고난, 두려움, 해침, 에워쌈, 벌떼, 가시덤불, 불’ 같은 표현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겪었던 폭력과 고통은 17절에 이르러 ‘죽음’이란 한 단어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시편 저자는 말합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주님께서 하신 일을 선포하겠다.” 이스라엘을 둘러싼 현실은 죽음이었지만, 그 죽음의 현실은 세대와 시대를 거듭해서 반복되었지만, 이스라엘은 그 죽음에 굴복할 수 없었습니다. 삶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해야 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죽음의 현실 속에서도 함께하신 하나님, 언젠가 극악무도한 무리를 심판하실 하나님, 그래서 결국 이스라엘로 하여금 구원의 날을 맞게 하실 하나님을 고백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성서학자들은 시편 118편을 예배 중에 부른 찬양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배 전 문 밖에서 “구원의 문들을 열어라. 내가 그 문들로 들어가서 주님께 감사를 드리겠다.”(19절) 찬양하고,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며 “이것이 주님의 문이다.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갈 것이다.”(20절)라고 찬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된 노예살이를 마치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와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쁨 가운데 찬양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죽음의 상황을 견디고 넘어서 구원의 날을 맞은 이스라엘은 22절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집 짓는 사람들이 내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집 짓는 사람들이 내버린 돌’, 그것이 딱 이스라엘의 현실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적들이 쳐들어왔고 하나님의 도성, 시온성을 무너뜨렸고, 하나님 집, 성전을 무너뜨렸습니다. 왕은 두 눈이 뽑혀 쇠사슬에 묶여 끌려갔고, 자신들 또한 노예가 되어 낯선 땅에서 고된 노예살이를 해야만 했습니다. 버려진 돌이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며 곳곳이 깨져나가듯, 이스라엘 사람들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깨어져 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솜씨 좋은 건축가가 그 돌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새로 짓는 집 모퉁이의 머릿돌로 쓰듯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다시 약속의 땅에 주인으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 이후에도 헬라와 로마의 식민지배를 받았는데 그 지난한 고통 속에서도 시편 118편의 말씀 -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선포하겠다’, ‘집 짓는 사람들이 내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를 거듭거듭 묵상하며 그 죽음 같았던 어두운 시대를 견뎠을 것입니다.
3. 성서 - 살림의 책
성서는 악한 강자가 일으키는 폭력과 악에 희생당한 사람들이 겪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고난의 책인 동시에, 그런 폭력과 악 그리고 폭력과 악이 반복되는 부조리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도록 만드는 살림의 책이기도 합니다. 창세기 1장은 태초의 첫 세상에 대한 이야기이며 오늘 우리 시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창조 이전에 존재하다가 창조 이후 영원히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 이 세계 곳곳에 얼마나 많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존재합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에 주눅들 필요가 없습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자 빛이 생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곧 빛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물리치는 빛입니다. 바벨론에서 노예살이하던 이스라엘 사람들, 채찍을 맞아 등에 고랑이 파이던 사람들, 자기 아기가 바위에 던져 죽임을 당해도 저항하지 못하던 사람들, 노예로 살다가 노예로 죽는 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했던 사람들을 향해 창세기 1장은 말합니다. ‘당신들, 노예 아니야. 지금 당장 우리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만, 우리는 노예로 끝나지 않을 거야. 이스라엘 당신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귀한 존재야. 그러니 살아. 죽지 말고 살아. 죽을 것처럼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어떻게 해서든 생육하고 번성해야 해. 이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야. 이 말씀을 빛 삼아 이 혼돈과 공허와 어둠을 이겨내.’
예수님도 그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빛 되신 말씀을 어둠 속에 있는 백성들에게 선포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의 말씀입니다. 공생애를 막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지역을 돌아다시며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고, 병든 사람을 고쳐주시고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수 백 년에 걸친 식민지배로 어둠과 같던 시대를 살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빛이셨습니다. 많은 이가 그 빛을 보고 모여 들었습니다. 무리를 이끌고 갈릴리 언덕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바라보시며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획기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둠의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어디에선가 빛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살았는데, 예수님께서는 빛을 기다리며 살던 사람들에게 ‘내가 빛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그들을 향해 ‘너희가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존재론적 사명이었습니다. ‘맞다. 너희의 말처럼 이 세상은 어두운 시대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는 시대이다. 그러니 어디서 빛이 나타나기만을 바라며 살지 말고 네가 누군가에게 빛이 되어주어라’ 예수님으로부터 그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눈은 실망스런 눈빛이 아니라 초롱초롱한 눈빛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깨달은 사람의 눈에서는 빛이 나기 때문입니다.
4.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자신들을 보호해야 할 국가에 의해 가족이 살해당한 5.18 유족들과 국가에 의해 몸과 마음에 치료될 수 없는 부상을 당한 피해자들은 살았습니다.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버텼습니다. 억울해서라도 그 수많은 모욕과 고통의 나날을 견뎌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죽은 남편과 아내와 아들딸이 그리고 부상당한 자기 자신이 폭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법 - 선과 정의와 양심을 따랐던 사람들이었음을 증명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5.18의 정신은 1987년 6월 항쟁의 원동력이 되어 대통령 직선제를 이룰 수 있었고, 이후 대한민국이 실질적 민주국가가 되는데 초석이 되었습니다. 1980년 5.18 광주는 군부가 버린 돌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버린 돌을 하나님 나라의 머릿돌과 많은 이의 기댈 곳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2015년 세월호 참사 1주기 때의 일입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머물던 진도 팽목항에는 이런 현수막이 붙었습니다. “5.18 엄마가 4.16 엄마에게.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힘내소, 쓰러지지 마시오” 광주 유가족들의 모임이 ‘오월 어머니집’ 어르신들이 세월호 유족들을 만나 위로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5.18 때 남편을 잃은 이귀임 어르신은 세월호 유족들을 향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 나이가 5월 당시의 우리 나이다. 우리들이 정말 잘 싸워서 완성된 5.18을 만들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인데 그렇게 하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 세월호 어머니 아버지들 아픔을 견디고 참고, 잘 싸우는 것이 너무나 고맙다. 5.18 가족이 끝까지 편들어 줄테니까 용기를 잃지 말라.” 세월호 유족들은 오월 어머니들의 위로는 남다르다며 해마다 5월이면 광주를 방문하고 있습니다.
작가 한강은 5.18 광주에 대한 소설인 <소년이 온다>를 쓰다가, 인간이 고통스럽고 세상이 절망스러워 쓰기를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체념하려던 순간에 5.18 희생자 박용준 씨의 일기의 어느 구절을 보고 소설을 계속 쓸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 구절은 이렇습니다. “하나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한강은 <소년이 온다>를 쓰면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다는 것과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과거나 현재를 돕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죽은 자나 산 자를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폭력과 악과 고통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끝까지 놓지 않은 과거와 죽은 자만이 현재와 산 자를 돕고 살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지키며 사는 자는 참으로 산 자요, 그 마음을 지키다 죽은 자는 죽었어도 산 자요, 죽어가는 세상을 살리는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저버린 자들은 참으로 죽은 자요, 비록 살아있어도 죽은 자요, 세상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자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내가 너에게 준 마음을 지키라, 어둠에게 지지 말고 내가 너에게 준 빛을 지키라, 그릇됨에게 지지 말고 내가 너에게 준 바름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죽어도 죽지 않고 살아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증거하는 자요, 버려진 돌 같지만 하나님 나라의 머릿돌이 될 것입니다. 그런 귀한 삶을 살아가는 청파의 교우들과 믿음의 백성들이 될 수 있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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