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재홍목사

하늘에서 온 사람 (요9:1~7) / 김재홍 목사

새벽지기1 2025. 6. 2. 04:47

'예수께서 가시다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곧 온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뒤에, 땅에 침을 뱉어서,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시고, 그에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다.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 눈먼 사람이 가서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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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승천주일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위로와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대통령 선거로 온 나라가 들썩이고 있습니다. 작년 12월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전국민이 참으로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맞게 되는 대선입니다. 계엄 선포와 국회의 계엄 해제부터, 대통령 구속과 헌재의 탄핵 선고를 거쳐, 각 당의 대선 후보 선출과 후보들 간의 과격한 토론에 이르기까지 국민 모두가 험난한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경제 안정화와 구성원간의 갈등해결이라는 문제뿐 아니라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빠르게 대응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부디 이번 선거를 통해 바르고 유능한 지도자가 선출되어 대한민국이 안정을 되찾고 가야할 길을 바르게 가는 나라가 될 수 있길 소망합니다.

지난 목요일에 서울 하늘은 유난히 푸르고 맑았습니다. 파란 하늘에는 커다란 뭉게구름이 떠있었습니다. 그날은 교회력으로 주의 승천일이었습니다. 부활절로부터 40일이 지나 맞는 목요일이 승천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던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기독교의 여러 교단과 교파에서는 주의 승천일 다음에 맞는 주일인 부활절 제7주일을 승천기념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이 그날입니다. 누가복음 24:50,51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장면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베다니까지 데리고 가서, 손을 들어 제자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축복하시는 가운데, 제자들에게서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장면은 사도행전 1장에서 좀더 자세히 그려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곤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들려 하늘로 올라가셨고 구름에 싸여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하늘로부터 왔다가 하늘로 돌아갈 존재로 인식하며 사셨던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은 종종 하나님으로 바뀌어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자, 그것이 예수님 자신에 대한 인식이었습니다. 그런 표현은 요한복음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당신을 소개하실 때 이렇게 소개하신 적이 있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다.’ 또 제자들과의 이별을 앞두고는 ‘나는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간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예수님 본인만 자신을 그렇게 여기신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예수님을 그런 분으로 고백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인 니고데모는 어느 날 밤 예수님을 찾아와 ‘선생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세례 요한 또한 예수님을 ‘위로부터 오시는 이, 하늘에서 오시는 이’라고 말했습니다.

2. 눈뜬 자와 눈먼 자


요한복음 9장에도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고 고백한 사람이 나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이 길을 가다가 나면서부터 눈먼 자를 만났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이 사람의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요즘 같으면 결코 할 수 없는, 해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앞 못 보는 장애는 그 본인의 죄도 아니요 그 부모의 죄도 아니죠. 제자들의 발언은 그 당시 사람들이 큰 질병과 장애를 죄와 연관지어 인식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그릇된 질문에 바르게 답하셨습니다. “이 사람의 죄 때문도 아니고 그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보내신 분의 일을 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고는 땅에 침을 뱉어서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발라주셨습니다. 그 후에 그에게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씻으라 하셨습니다.

그 눈먼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로암 연못을 찾아갔고, 그곳의 물로 눈을 씻고는 눈이 밝아져 돌아갔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그 사람이 정말 전에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인가 다들 의아해했습니다. 예수님에 의해 눈을 뜨게 된 사람은 ‘내가 그 사람이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사람들의 관심은 그 눈멀었던 자의 눈을 뜨게 해준 예수님에게로 쏠렸습니다. 기적을 행한 분을 찾아가 도움을 받고자 하는 생각이 컸던 것이지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다른 목적으로 예수를 찾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고쳐주신 날이 바로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일종의 의료행위를 함으로써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십계명을 어겼기 때문에 예수를 찾아 벌을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를 찾지 못했던 바리새인들은 눈을 뜨게 된 자를 불러 심문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안식일 계명을 어겼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러자 눈을 뜨게 된 자가 그에 대해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그가 죄인이라면 어떻게 나의 눈을 뜨게 해 줄 수 있었겠는가? 그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격분한 바리새인들은 그 사람을 회당 공동체에서 쫓아냈습니다. 이스라엘은 회당공동체가 마을공동체였습니다. 회당에서 쫓아냈다는 것은 마을 공동체에서 쫓아냈다는 말입니다. 참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한 공동체 내에서 평생 앞을 못 보며 어렵고 고통스럽게 살던 이가 누군가의 손길을 통해 앞을 보게 되었다면 함께 축하해주고 그를 고쳐준 이를 칭송하고 감사를 표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날이 안식일이었다고 해서 그 기적 행위자를 벌주려 하고, 그 기적 행위자에게 큰 은혜를 입었기에 그를 칭송한 사람을 공동체에서 쫓아냈습니다.

어쩜 이렇게도 놀라운 기적이 어쩜 이렇게도 어처구니없는 결론으로 이어지게 된 것일까요? 요한복음 9장에서는 눈뜬 자와 눈먼 자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눈뜬 자이고 눈먼 자가 눈먼 자가 아니라, 예수님이 눈뜬 자이고 바리새인이 눈먼 자였습니다./ 예수님 눈에는 보이는 것이 바리새인 눈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태어나면서 눈먼 자 속에 있는 하나님 자녀의 모습이 보였고, 그의 아픔과 고통이 보였고, 나음을 입은 후에 기쁨과 감사가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눈에는 눈먼 자 속에 있는 하나님 자녀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고, 그의 아픔과 고통도 나음을 입은 후의 기쁨과 감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 그들이야말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눈먼 자였습니다.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자들은 이 세상에 아픔과 고통을 가져옵니다. 바리새인은 사람들의 아픔을 보듬지 못할망정 아픔을 죄로 정죄하면서 아픔을 더욱 큰 아픔으로 만들었습니다. 바로 그런 것이 죄입니다.

3. 실로암


요한복음 9장의 이야기는 실로암 연못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죽어 무덤에 묻혔던 나사로도 그 자리에서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예수님이셨기에 나면서부터 눈 멀었던 사람의 눈도 그 자리에서 충분히 뜨게 해 주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실로암 연못에 가서 눈을 씻으라 말씀하신 데에는 특별한 뜻이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친절하게 실로암이라는 이름의 뜻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보냄을 받았다.’ 실로암은 히브리어 쉴라흐에서 왔습니다. 쉴라흐는 ‘보내다’라는 뜻입니다. 뭘 보낸다는 것일까요? 물을 흘려보낸다는 뜻입니다. 주전 8세기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가 유다를 공격해 왔습니다. 히스기야는 강력한 적군의 공격에 대비해야 했습니다. 예루살렘성은 높은 지형에 견고하게 세워진 성이었기 방어하기가 다른 성보다 좋았습니다. 그런데 물이 문제였습니다. 예루살렘 성 안에는 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 밖에 있던 기혼샘에서부터 예루살렘 성 안쪽으로 지하 터널을 뚫어 기혼샘의 물이 성 안으로 흘러오게 만들었습니다. 대공사는 무사히 마쳐졌고 기혼샘은 물을 예루살렘 성 안으로 흘려보내주었습니다. 그 물이 흘러온 곳에 만들어진 연못이 실로암 연못이었습니다. 실로암은 죽음의 위기에 놓인 예루살렘 성 안의 사람들에게 생명을 전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눈 먼 사람을 죄인 취급하던 제자들에게, ‘그 사람은 죄인이 아니다’라는 말씀과 더불어 ‘우리는 우리를 보내신 분의 일을 하면 된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사람들을 만났을 때, 장애와 같은 외적 상태를 보고 그를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것은 우리를 보내신 분의 일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그에게 나를 보내신 분이 하실 만한 일을 해야 합니다. 그에게 나를 보내신 분이 하실 만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 일은 나를 통해 하나님의 생명이 그에게 흘러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곧 우리가 그에게 실로암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서로에게 해 주어야 하는 일은 그것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실로암이 되어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만나는 모든 사람을 귀하게 여겨 주셨습니다. 병자, 장애인, 이방인, 창기, 세리 등 그 당시 죄인으로 취급받던 사람들을 모두 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여겨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회적 기준을 가지고 그들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주셨습니다. 병든 자와 장애인은 고쳐 주셨고, 이방인은 유대인처럼 여겨 주셨고, 창기와 세리에게는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을 쉽게 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9장에 등장한 인물 중 지금 우리의 모습과 가장 비슷한 사람들이 바로 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의 율법처럼 자기 안에 완고하게 자리잡은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자기의 아픔과 기쁨에만 관심할 뿐 타인의 아픔과 기쁨에 공감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너무 자주 자기만을 귀한 존재로 인식할 뿐 다른 사람 또한 자신과 동등하게 귀한 존재임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어느 빵 만드는 공장에서는 거의 한 해에 한 명씩 노동자가 빵을 만들다 죽고 있습니다. 사측은 해마다 재발방지를 약속했지만 약속은 계속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보다 돈을 중시한 결과입니다. 어느 남성 정치인은 정적을 공격하기 위해 여성을 모욕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많은 이가 문제를 제기하자 오히려 ‘내가 뭘 잘못했냐’ 되물었습니다. 눈먼 자입니다. 이번 대선을 통해 선출되는 지도자는 눈이 실로암처럼 맑은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국민을 차별하지 않고 모든 국민을 귀히 여겨, 국민이 자신에게 허락된 생명을 생명으로 누릴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4. 하늘에서 온 사람


나면서부터 눈먼 자였던 사람은 예수님으로 인해 눈을 뜨게 된 이후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 하늘로부터 온 사람’이라고 고백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고백함으로 자기에게 불이익이 돌아오게 될 것을 알았지만, 예수님께 대한 고백을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정말 예수님이 하늘에서 온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눈에는 왜 예수님이 하늘에서 온 사람으로 보였을까요? 그가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생명을 준 사람에게서 하늘을, 하나님을 느끼게 됩니다. 승천 사건은 예수님께서 물리적으로 하늘로 올라가신 사건일 수도 있지만, 예수님에게서 하늘과 하나님을 느낀 제자들의 고백의 언어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한 인간이 물리적으로 하늘에 올라가는 사건보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생명을 전해 주어 그로 하여금 하늘과 하나님을 느끼게 해주는 사건이 더욱 의미가 깊은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늘에서 와서 하늘로 올라가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눈먼 자가 아니라 눈뜬 자가 되어 살아가라고. 자기만 귀하게 여기지 말고 다른 이 또한 귀하게 여기며 살아가라고. 자기의 알량한 기준을 앞세워 남을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고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생명을 흘려보내며 살라고.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라고.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서로에게서 하늘을, 하나님을 느낄 것이며 이 땅에 하늘나라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꺼운 마음으로 이루어가는 청파의 교우들과 이 시대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