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너희는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다시 온다고 한 내 말을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내 아버지는 나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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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위일체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위로와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삼위일체주일입니다. 언제나 승천주일 지나서 성령강림주일이 오고 성경강림주일 지나서 삼위일체주일이 옵니다. 삼위일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께서 세 분이면서 한 분이고 한 분이면서 세 분이라는 기독교회의 중요교리입니다. ‘세 분이면서 한 분이고 한 분이면서 세 분이다.’ 많이 들어서 익숙하기는 하지만, 한 번 설명해 보라고 하면 설명하기 쉽지 않은 게 삼위일체입니다. 삼위일체의 의미를 생각해보기 전에 삼위일체의 교리사를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1세는 주전 313년 로마 제국 내에 종교의 자유를 허락한다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이를 통해 기독교는 더 이상 박해를 받지 않았고 로마에 빼앗겼던 교회의 재산도 돌려받았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확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기독교가 로마의 종교로 자리잡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한 데에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중요한 전쟁을 앞둔 콘스탄티누스는 꿈에서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앞의 두 글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그 두 글자를 군사들의 방패에 그리게 하고 전쟁에 나가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에게 승리를 가져다 준 기독교라면 로마 제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여기며 기독교를 지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은 콘스탄티누스의 소망과 전혀 다르게 흘러갔습니다. 제국의 안정과 통합에 도움이 되어야 할 기독교가 오히려 파당을 지어 싸움으로 제국에 분열과 혼란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 당시 교회에는 두 가지의 커다란 논쟁거리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부활절 날짜 지정에 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325년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에서 제1회 공의회를 열어 이를 논의하게 했습니다. 그 당시 어떤 이들은 유대교의 유월절을 부활절로 지키는 이도 있었는데, 니케아 회의를 통해 춘분 후 만월 지나 맞게 되는 주일을 부활절로 확정했습니다. 오늘날까지 그 규칙에 따라 부활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부활절 날짜 지정은 그리 어렵지 않게 합의에 이르렀으나,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쉽게 합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는 뛰어난 두 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 아리우스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유사하지만 동일한 존재는 아니라며 ‘유사본질론’을 주장하였고, 아타나시우스는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라며 ‘동일본질론’을 주장하였습니다. 논쟁 끝에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라는 의견이 공의회의 공식의견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니케아 공의회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아리우스파와 아타나시우스파가 나뉘어져 계속 싸웠고 폭력이 오가고 상대편을 파면시키는 것을 넘어 서로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다시 회의가 열렸고, 그 자리에서 니케아 회의의 결정을 다시 한 번 확정하고, 성부와 성자가 동일하다는 고백 위에 성령을 추가했습니다. 곧 오늘 우리가 고백하는 것처럼,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한 분인 동시 세 분이다,라는 삼위일체 교리가 확정된 것입니다. 두 번의 공의회를 통해 교리를 확정지었음에도 논쟁은 계속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는 파와 인성을 강조하는 파로 나뉘어 논쟁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431년 에페소 회의와 451년 칼케돈 회의를 거쳐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시다’라는 교리를 확정지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의 역사를 살펴보니 좀 복잡하지요? 그런데 저에게는 삼위일체 교리의 역사는 복잡하다기보다는 아프게 와닿았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세 분이면서 한 분이다,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믿고 섬긴다는 사람들이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파면하거나 죽이기를 서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예수님의 본질이 하나님과 유사하냐 동일하냐를 논쟁하다가 예수님과 하나님의 본질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본질은 사랑과 생명과 평화이십니다. 결코 폭력이 될 수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기독교회는 2천년 역사에 걸쳐 아픈 삼위일체 교리사를 반복했습니다. 종교개혁과 30년 전쟁이 대표적이지요. 똑같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한 분이라고 고백하면서도 기독교는 가톨릭과 개신교로 나누어 싸웠고, 1618년부터 1648년까지 전쟁하며 기독교인이 기독교인을 800만 명이나 죽였습니다. 교리는 무질서를 정리해 주고 질서를 부여해 주지만, 교리만을 너무 강조하다보면 신앙의 본질을 잃을 수 있음을 교리의 역사는 아프게 우리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2. 제자들에게 삼위일체란?
삼위일체 교리의 시작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유대교인들에게 예수님은 그냥 랍비 중에 한 명이었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은 그냥 랍비 중의 한 명이 아니었습니다. 빌립보서 2:6은 예수님을 하나님과 본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개역) 요한복음 14장에서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라는 빌립의 요청에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답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한 명의 인간이나 랍비의 모습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기도 했지만 하나님이 육신이 되신 분이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유사본질이냐 동일본질이냐는 교리가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보았다는 체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던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셨는데 제자들은 더 이상 그 예수님을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상황이 올 것을 미리 아셨기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요한복음 14:16 말씀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리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 보혜사를 보내주신다는 말씀은 14:26에도 나옵니다. 성령을 뜻하는 ‘보혜사’라는 말은 일상에서 전혀 사용하지 않는 단어로 좋은 번역이 아닙니다. 헬라어로는 ‘파라클레이토스’라고 하는데 조력자, 변호자라는 뜻입니다. 다른 이의 어려움과 아픔을 자신의 어려움과 아픔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해결해 주기 위해 애쓰는 존재가 파라클레이토스입니다. 다른 이의 어려움과 아픔을 자신의 어려움과 아픔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해결해 주기 위해 애쓰는 것은 사실 예수님이 하셨던 일이었습니다. 곧 예수님의 일과 성령의 일은 같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 성령강림주일에 성령이 오셔서 제자들에게 해 주신 일은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이어가게 된 것이라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4:26에서 성령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만을 생각나게 하시지 않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누군가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일을 감사히 기억하고 다른 이의 어려움과 아픔을 보고 그 어려움과 아픔을 자신의 어려움과 아픔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면, 그에게 파라클레이토스가 되어 준다면, 주님께 받은 사랑과 생명과 평화를 그에게 전해 준다면, 그로부터 도움을 받은 사람은 그 사람으로 인해 구원을 체험하게 되고,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어떤 분인지를 단박에 알게 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파라클레이토스가 되어 주었고, 제자들을 통해 많은 이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체험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과 초대교회 사람들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런 체험적 고백이었지 교리가 아니었습니다.
3. 체험에서 체험으로
<울지마 톤즈> 다큐멘터리로 유명한 이태석 신부님 이야기입니다. 신부님은 1962년에 부산 서구에서 태어났습니다. 의대를 졸업한 이후에 가톨릭 신학을 하고 신부가 되어 2001년 남수단 톤즈에 가서 의료선교와 교육선교에 투신했습니다. 그 당시 수단은 오랜 내전으로 모든 것이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톤즈에 도착하여 마을 둘러본 후 이태석 신부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곳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병원도 없었고 학교는 무너진 채 방치되어 있었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내전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받은 것은 아이들이었습니다. 손에 책을 잡아야 할 아이들이 총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이 신부님은 아이들을 위해 손수 학교를 짓고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나중에는 아이들에게 악기를 하나씩 가르쳐 브라스밴드를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낮에는 200여 명의 환자를 돌보고, 오후에는 아이들에게 공부와 악기를 가르쳐 주고, 저녁에는 응급환자들을 돌보며 지냈습니다. 틈틈이 한센병 환자들과 결핵 환자들을 보살폈고, 일주일에 한 번씩 오지 마을을 돌아다니며 이동진료도 했습니다.
수단에서 열정적으로 봉사하던 이 신부님은 2008년 휴가차 한국에 들어와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대장암 4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 신부님은 2010년에 돌아가셨습니다. 향년 47세. 이 신부님이 한국에 들어가신 후 연락이 없어 궁금해하던 톤즈 사람들에게 신부님의 사망 소식을 알렸습니다. 우는 것을 수치로 여겨 울지 않던 톤즈 사람들은 “그분만큼 우리를 돕던 분이 없어요” “왜 하나님이 이 신부님을 데려가셨나요”라고 말하며 많은 이가 울었다고 합니다. 특별히 이 신부님께서 마음을 많이 쓰셨던 브라스 밴드의 학생들은 눈물이 바다를 이루었습니다. 톤즈에서 한국으로 유학 온 이 신부님의 제자들은 의대를 졸업해 작년에 전문의 자격시험을 통과했다고 합니다. 그 톤즈 출신의 의사들은 이 신부님이 하셨던 일을 자신들이 이어가겠다며 다시 남수단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지지난 주에 이 신부님이 지인들과 후원자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묶은 책, <이태석 신부 서간집>이 나왔습니다. 이 신부님은 뛰어난 하나님의 종이었지만 그도 사람이었습니다. 이 신부님은 후배 부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나에게 하나님은 왜 이리도 큰 시련을 주신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말했습니다. ‘하필 왜 내가’라는 생각도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신부님은 끝내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고 ‘Everything is good!’이라는 말을 남기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후배 부제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오늘 한동안 잊고 지내던 친한 친구 하나가 갑자기 생각났다. 그 친구만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설레는데 왜 그리 깡그리 잊고 살았는지? 갑자기 생각나니 너무너무 보고 싶다. 톤즈에 처음 막 도착했을 때, 충격으로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고 멍하니 있을 때, “걱정하지 마라! 내가 함께 있지 않느냐!”라며 위로해 주시던 바로 그 주님. 질병과 가난으로 고통에 허덕이는 그곳 사람들 가운데 항상 떡 버티고 계셨던 그 주님. 그곳의 가장 버림받은 이들의 모습으로 오셔서 함께 아파하고 함께 괴로워하시던 바로 그 주님. 모든 어려움을 함께 지낸 만큼 그 우정 또한 보통 두터운 것이 아니었는데. 그 친구만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설레는데 왜 그리 깡그리 잊고 살았는지? 그 우정이 그립다. 그 친구가 그립다.”
이태석 신부님. 신부님은 병환 중에 잠시 예수님을 잊기는 했지만, 일생 든든한 친구가 되어주신 예수님을 기억하셨고,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파라클레이토스, 든든한 친구가 되어주셨듯이, 어려움에 처한 톤즈 사람들에게 파라클레이토스, 든든한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럼으로써 그곳 사람들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렇게 체험에서 체험으로 전해지는 분이지 교리교육을 통해 전해지는 분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교리에 붙들려 믿음의 본질을 놓치지 말라고. 믿음의 본질은 사랑과 생명과 평화이지 폭력이 될 수 없다고. 주님께서 어려움과 아픔 속에 있던 우리에게 찾아와 파라클레이토스가 되어 주셨던 것처럼 어려움과 아픔 속에 놓여 있는 다른 이를 찾아가 그에게 파라클레이토스가 되어 주라고. 그럼으로써 그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게 하라고. 그렇게 귀하고 아름다운 일을 기쁘게 감당하는 청파의 모든 교우들과 이 시대 믿음의 백성들이 될 수 있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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