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재홍목사

마땅한 죽음은 없다.(행7:54~8:1) / 김재홍 목사

새벽지기1 2025. 6. 25. 03:33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해서, 스데반에게 이를 갈았다. 그런데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쳐다보니,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하나님의 오른쪽에 인자가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사람들은 귀를 막고, 큰 소리를 지르고서,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그를 성 바깥으로 끌어내서 돌로 쳤다. 증인들은 옷을 벗어서,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사람들이 스데반을 돌로 칠 때에, 스데반은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서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이 말을 하고 스데반은 잠들었다. 사울은 스데반이 죽임 당한 것을 마땅하게 여겼다. 그 날에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났다. 그래서 사도들 이외에는 모두 유대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

1. 전쟁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위로와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2주 주일입니다. 이번 주 수요일이 6.25입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어느덧 75년이 되었습니다. 지금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의 시인 이리나 슈발로바의 시 <전쟁에 대해 쓴다는 것>의 앞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그 어떤 혀도 담지 못한다.
전쟁에 대해 쓴다는 것
가시 돋친 철사를 천천히
일 센티미터씩 삼키는 것
꿈속에서 체코 고슴도치를
헐벗은 팔과 다리로 껴안는 것

전쟁을 직접 몸소 겪어보셨던 분들은 어찌 그날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혀로도 담아낼 수 없는 슬픔을, 가시 돋친 철사를 삼키는 것 같던 고통을, 철책을 헐벗은 팔과 다리로 껴안는 것 같던 아픔을. 75년이 지났지만 어제 일처럼 선명한 그 슬픔과 고통과 아픔이 전쟁을 겪은 이들의 마음과 분단된 조국의 산하 곳곳에 깊게 배어있습니다. 그동안 남북간의 화해를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많은 노력을 해보았지만 엇나가기 일쑤였습니다. 부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남북이 평화로운 관계를 회복할 수 있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그 슬프고 고통스럽고 아픈 전쟁을 인류가 계속 반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년째 지속되고 있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은 휴전 및 종전 이야기도 나오고 있지만, 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난 화요일에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를 미사일과 드론으로 공격했습니다. 그 공격으로 수 십 명이 숨지고 다쳤습니다. 지금까지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20만 명이 넘습니다. 이스라엘과 가자지구의 전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전쟁도 어느새 1년 8개월이 지나고 있습니다. 가자지구의 상황은 아주 좋지 않습니다. 생명 유지의 필수품인 식량과 의약품과 연료가 바닥났습니다. 이스라엘은 배급소를 열어 식량을 나누어 준다며 가자지구 사람들을 모아들이고는 그들을 총으로 쏘아 죽였습니다. 전쟁 범죄입니다. 학살입니다. 가자에 살고 있는 알라 사쿼 씨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 죽었는데 그 사람을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를 옮기려면 자식들에게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사는 게 죽음입니다.” ‘사는 게 죽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가자에서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사라졌습니다. 유럽연합은 이스라엘을 향해 가자전쟁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가자지구에서는 벌써 5만 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그 대부분은 민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가자전쟁을 중단할 의사가 없을 뿐 아니라 이란과의 전쟁도 새롭게 시작하였습니다. 지난 6월 13일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시설을 공습했습니다. 그 공습으로 핵발전소가 파괴되었고 여러 군지도자와 민간인 600명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이에 이란은 바로 반격하였고, 이스라엘의 도시와 병원을 공습하여 수십 명이 사망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란이 핵무기를 만들 수도 있었기 때문에 선제공격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보통 핵무기 억제를 위해 사용하는 방법은 선제 타격이 아니라 협상입니다. 실제 이란은 미국과 핵협상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총리 네타냐후에게는 다른 속셈이 있었습니다. 네타냐후는 부패 수사의 대상이었고, 이란 공격 하루 전날은 의회에서 불신임 투표까지 있었습니다. 그는 간신히 재신임을 받았습니다. 네타냐후는 자신의 권력을 연장하기 위해 이란을 공격한 것입니다. 내적 갈등을 외적 갈등으로 덮으려 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란은 이스라엘을 향해서 공격을 멈추면 보복 공격을 멈추겠다고 했지만, 네타냐후는 이란을 향한 공격을 멈추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폭격 장면을 영상으로 보았습니다. 순식간에 날아든 미사일 한 발에 건물이 무너지고 길을 걸어가고 있던 사람들이 사라졌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너무 쉽게 죽이고 있습니다. 전쟁을 주도하고 있는 이들은 자신이 한 ‘공격을 멈추지 않겠다’는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공격을 멈추지 않겠다는 말은 사람을 계속 죽이겠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너무 쉬운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복수를 위해, 경제적 이득을 위해, 권력 연장을 위해 수십 명, 수백 명, 수천 명, 수만 명, 수십만 명쯤은 죽여도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은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각이 아닙니다.

2.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찬 사람


사도행전 6장과 7장에는 초대교회의 첫 순교자인 스데반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스데반은 예루살렘교회에서 선출한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은혜와 성령이 충만한 사람으로 놀라운 일과 큰 기적들을 행하였습니다. 그는 성서에 대한 지식도 많았는데 그 지식을 바탕으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메시야 됨에 대해 논증했습니다. 스데반의 논리가 워낙 탄탄했기에 유대인들은 스데반을 당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사람들을 매수해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는 거짓증언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스데반은 율법과 성전을 거슬렀다는 죄목으로 공의회에 잡혀갔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님과 같은 죄목으로 예수님이 심판 받으셨던 공의회의 피고석에 서게 되었습니다.

대제사장의 신문이 시작되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스데반에게 율법과 성전을 거스르는 말을 한 것이 사실이냐, 물었습니다. 스데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모세의 출애굽의 역사와 솔로몬의 성전 건축에 대해 서술함으로 그가 그 누구보다 율법과 성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임을 증명했습니다. 그리고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며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 안에 거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유대인이라는 족속이 육신의 할례만 받았을 뿐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족속으로 율법을 받기만 했을 뿐 지키지 못한 족속임을 지적하였고, 그뿐 아니라 유대인들은 그 조상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을 죽였던 것처럼 예수를 죽였음을 지적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스데반의 연설을 듣고는 격분해 이를 갈았습니다. 분위기가 험악해졌습니다. 여차하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였듯이 스데반 또한 죽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절체절명의 순간 스데반은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본 바를 거기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하나님의 오른쪽에 인자가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스데반의 그 발언은 유대인들의 분노의 불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귀를 막고 큰 소리를 지르며 일제히 스데반에 달려 들었습니다. 그를 성 바깥으로 끌고 가 돌로 쳤습니다. 그때 스데반은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곤 무릎을 꿇고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하고는 죽었습니다.

한 사람이 자신이 믿는 바를 솔직하게 이야기했다는 이유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 잔혹한 살인 장면 중 기독교 역사에 있어 중요한 한 사람이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사울이라고도 하는 바울. 사람들이 분노에 휩싸여 스데반을 죽이려 돌로 칠 때 겉옷을 벗었고, 바울은 그들의 겉옷을 맡아주었습니다. 성경은 바울이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한 것’으로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8:3에 보면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없애려고 날뛰었고, 집집마다 찾아 들어가서,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고 끌어내서 감옥에 넘겼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찬 사람으로 생각했겠지만, 실은 바울은 자기만 옳다는 오만과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향한 증오과 그를 제거하려는 분노로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찼던 사람은 바울이 아니라 스데반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랬습니까? 스데반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길을 가되 오만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자기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증오하거나 그를 제거하려는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은 오히려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용서했습니다. 스데반의 용서는 십자가에서 당신을 못 박아 죽이던 사람들을 용서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오만과 증오와 분노를 버리고 예수님의 마음, 용서로 자신을 가득 채우는 것이 하나님의 영으로 자신을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3. 마땅한 죽음은 없다


바울은 다메섹에 있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미친 듯이 말을 타고 달려갔습니다. 가던 도중 이전에 보지 못했던 환한 빛을 보게 되었고 그 빛으로 인해 말에서 떨어졌고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전에 듣지 못했던 음성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목소리는 바울에게 물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은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목소리가 답했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바울은 새로운 빛과 목소리를 통해서 자신이 핍박하던 존재, 그를 죽이는 게 마땅하다고 여겼던 존재가 사실은 하나님이 보낸 귀한 존재임을, 자신을 구원할 자임을 깨달았습니다. 다메섹의 회심은 단순히 예수 믿지 않던 자가 예수 믿는 자로 변화된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자기 생각만 옳다는 오만의 어둠에서 벗어나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보내신 귀한 존재임을 깨닫는 빛의 세계로 나오는 사건이며, 그에 대한 증오와 분노에 사로잡혀 그를 제거하는 게 마땅하다 말하는 내면의 목소리에서 벗어나 그를 너른 하나님과 예수님의 마음으로 대하라는 하늘의 목소리를 듣는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폭격기가 이란을 폭격하기 하루 전날, 이스라엘의 총리인 네타냐후는 메모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 백성이 암사자처럼 일어난다. 그들이 수사자처럼 우뚝선다.” 이는 민수기 23:24절의 말씀을 적은 것입니다. 이번 이란 공격작전의 이름인 ‘일어서는 사자’는 거기서 나온 것입니다. 네타냐후는 그 성경구절을 작전명으로 정하면서 자기 자신의 내면을 하나님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 채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네타냐후가 자신의 내면에 가득 채운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만 옳다는 오만과 이란 사람들에 대한 증오와 그들을 제거하려는 분노였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판단과 감정을 신의 이름으로 포장하는데 선수입니다. 자신의 판단과 감정이 곧 신의 판단과 감정이라는 착각은 인간의 흔한 착각이요 거대한 착각입니다. 그 착각 때문에 인류는 신의 이름으로 어리석은 전쟁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우리들 속에서는 수시로 오만과 증오와 분노의 사자가 일어서려고 합니다. 그 사자는 다메섹 도상에서 쓰러졌던 바울처럼 쓰러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슬프고 고통스럽고 아픈 전쟁을 멈추고 평화에 이를 수 있습니다.

지난 6월 11일 우리 군은 대북방송을 중단했습니다. 그러자 그 다음날인 6월 12일부터 북한이 소음방송을 중단했습니다. 작년 5월 남쪽의 대북전단 살포에 반발하여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냈고, 이에 우리 군은 대북방송을 시작했으며 그에 맞서 북한도 소음방송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쇠를 긁는 것 같은 소리, 귀신이나 동물이 울부짖는 것 같은 소리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려퍼졌습니다. 접경지역에 사는 주민들은 살 수가 없었습니다.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주민들은 정부 관계자에게 우리가 먼저 방송을 멈추면 북도 방송을 멈추지 않겠냐. 제발 방송을 멈춰달라며 무릎을 꿇고 사정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6월 11일 우리 군이 대북방송을 중단하자 그 다음날부터 북한이 대남 소음방송을 중단한 것입니다. 소음방송이 중단되자 주민들은 믿기지 않는다면서도 모처럼 잘 잤다고 기뻐했습니다.

평화는 그렇게 시작해야 합니다. 나와 너 사이에 채우지 말아야 할 것을 채우지 않는 것, 있지 말아야 할 것을 비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무시, 폭언, 서로를 마땅히 죽여야 할 존재로 여기는 생각들을 비워내는 것에서 평화는 시작됩니다. 그렇게 비워야 할 것들을 비워내고, 그 자리에 존중, 바른 말, 서로를 하나님으로부터 온 귀한 존재로 여기는 생각들을 채워나갈 때 이 땅 위에 생명과 평화의 하나님 나라는 이루어질 것입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주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이요, 스데반과 바울과 같은 믿음의 선배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그 생명과 평화의 길을 충실하게 뒤따라가는 청파의 교우들과 이 시대 믿음의 사람들이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