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522

환희 / 정병선목사

드디어 5월 12일 수술하는 날이 밝았다. 눈을 떠보니 새벽 6시다. 아들은 잠에서 채 깨어나지 않았는지 게슴츠레한 표정이다. 7시면 아들이 수술실에 들어가야 한다. 멀쩡한 몸을 찢고 자르기 위해. 심란했다. 뭘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어 하고 있는데, 멀리서 친구 목사님 부부와 향상교회 목사님, 사모님, 전도사님, 가정교회 목자와 목녀, 그리고 큰형님 부부가 달려와 병실이 북적였다. 새벽부터 먼 길을 달려온 분들이 고마웠다. 잠에서 덜 깨어난 아들은 얼굴을 씻고 수술복으로 갈아입더니 웃음기를 보였다. 하지만 아들의 얼굴에선 긴장이 묻어났다. 얼굴 근육이 약간 굳어있었다. 사실 아들은 키 171센티에 몸무게 57키로가 고작인 녀석이다. 어려서부터 통통해 본 적이 없는 왜소한 체구에다가 오목 가슴이 깊어 ..

‘함께 있음'과 ‘함께 없음’의 차이

수술을 이틀 앞두고 아들과 나는 나란히 입원을 했다. 언제나처럼 값이 비싼 2인실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이 2인실에 입원했다. 병실에 들어가 보니 아내와 함께 우리 가족 3명이 전부였다. 느낌이 좀 묘했다. 아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 병원에 온 게 아니라 꼭 콘도로 가족 여행을 온 것 같다.” 세 사람은 서로 웃으며 묘한 느낌을 공유했다. 주일 오후여서인지 병원은 한가했다. 우리 가족도 큰 수술을 앞둔 가족답지 않게 편안하게 담소하며 여유롭게 지냈다. 오랜 만에 가족 전체가 집을 떠나 여유를 만끽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또 친구 목사와 예전에 목회했던 교회 성도들이 담임 목사님과 함께 방문해 반가운 얼굴들을 보는 기쁨도 함께 누리면서. 입원 둘째 날, 그러니까 수술 하루 전이다. 수술을 앞두고..

수술하게 된 것을 기뻐하는 아들

암 전이 검사를 한 결과 다행히 암이 다른 장기로 전이되지는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식 수술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제 남은 건 아들의 검진이었다. 아들은 근무하는 공익기관에 휴가를 내고 4월 6일 하루 동안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다. 자기 간을 떼어내는 모험을 하기 위해 실시하는 검사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그 날을 기다려왔다. 그리고 두려워하거나 망설이는 기색 없이 즐겁게 검사를 받았다. 검사 후에는 ‘결과가 잘 나와야 할 텐데’ 라고 진심으로 염려하며 결과가 나오는 4월 10일을 기다렸다. 나는 그런 아들을 보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들을 지켜주어야 할 애비가 무거운 짐만 지워주는 것 같아 안타깝고 미안했다. 그러면서도 두 가지 묘한 감정이 마음의 저류에 흐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

기다림 / 정병선목사

장기 이식을 결정하고 나면 곧바로 기증하는 자와 받는 자 공히 건강 검진을 받아야 한다. 살아있는 사람의 장기 일부를 떼어내는 일인 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이식을 해도 별 효용이 없는 사람에게 이식을 한다면 건강한 사람의 장기를 떼어내기라도 하는 일이 발생하면 안 되기 때문에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철저하게 검사를 받아야 한다. 신체는 말할 것도 없고 정신과까지 검사를 받아야 한다. 나는 아들보다 먼저 일주일여 동안 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 이식이 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전에 복부 컴퓨터 단층 촬영(CT)을 했었는데 간에 암의 가능성이 보인다며 정확하게 확인하려면 자기공명 단층 촬영(MRI)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병원에 가면 제일 힘든 ..

가족의 재발견 / 정병선목사

나는 참 어리석다. 일이 다 지나고 나서야 후회를 할 때가 많고, 일의 순서가 뒤바뀔 때가 많다. 이번 장기 이식도 그랬다. ‘왜 장기 이식까지 해가며 생명을 연장하려고 하는가?’를 물으려면 마땅히 장기 이식을 결정하기 전에 묻고 고민했어야 한다. 그게 바른 순서다. 그런데 나는 거꾸로 했다. 장기 이식을 결정하고 난 다음부터 고민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암튼 순서가 뒤바뀐 고민을 하면서 나는 ‘생의 의지’는 곧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의지이기도 하다’는 논리로 장기 이식을 결정한 자신을 변명했다. 정당한 논리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마음의 동의를 얻었다. 하지만 왠지 현학적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어떤 형태를 띠든(상대방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장기 이식을 결정하고 나서

오랫동안 만성 간염을 앓아오던 나는 2004년 간경변 판정을 받은 후부터 매년 빼놓지 않고 식도 정맥류 출혈로 인해 병원을 드나들었다. 식도정맥류는 간경변 환자의 전형적인 합병증 가운데 하나이다. 식도 쪽으로 흐르는 정맥의 혈관이 압력을 견디지 못해 부풀면서 터지는 병증인데, 일단 혈관이 터져 출혈이 일어나면 목에 내시경을 쑤셔 넣고 터진 혈관을 찾아 묶는 시술을 해야 한다. 2009년도 예외가 아니었다. 3월까지는 비교적 건강하게 생활해왔는데 3월 마지막 날 주일 아침에 또다시 식도 정맥류 출혈 증상이 나타났다. 몸에 기운이 빠지면서 속이 매스꺼운 게 전형적인 출혈 증상이 분명했다. 순간 두려움이 엄습했다. 또다시 겪어야 할 일들이 영화 필름처럼 지나갔다. 끔찍하고 무서운 생각이 나를 집어삼켰다. 그렇..

한없이 갖고 싶은 것

생존은 생명의 첫째가는 의무요 책임이며 특권이다. 그러나 사람은 생존 이상의 존재다. 성경은 사람을 가리켜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고 했다. 떡을 먹어야 하지만 떡 이상의 것, 즉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먹어야 사람답게 살 수 있다고 했다(마4:4). 그렇다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뭘 뜻할까? 기록된 말씀만을 뜻할까? 일차적으로는 그럴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제한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기록된 말씀을 넘어 하나님의 뜻과 의지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라고 이해해도 큰 무리는 없을 듯싶다. 피조세계의 질서 속에 반영된 하나님의 뜻과 의지, 하나님의 형상이 반영된 인간의 품격으로까지 확대해석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자연과 인간 속에 담겨 있는 보이지 않는 의..

살아있음을 경축하라 / 정병선목사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생존의 위협을 느끼거나,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 본 경험이 없다. 물론 넉넉하게 살아 본 적도 없지만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지경으로까지 내몰린 적도 없다. 그래서일까. 생존을 위해 온 삶을 투신하는 사람을 보면 미안하고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면서도 은근히 홀대하는 마음이 있었다. 생존을 위해 땀을 흘리는 것을 훌륭한 태도라고 여기면서도 단지 생존하는 것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생활과 삶을 엄격하게 구별했다. 생활이 단지 생존을 위한 것이라면 삶은 생존을 넘어 문화적 차원 ∙ 사회적 차원 ∙ 영적 차원으로까지 확대된 것이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고민하며 자기로 존재하기를 힘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런 구별이 틀린 것은 아니다. ..

성공에서 행복으로 / 정병선목사

이 글은 제가 쓰고 있는 행복 이야기의 서문입니다. 왜 행복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읽고 비평해주시기 바랍니다. 한국인의 심장 속에는 한(恨)의 유전자와 흥(興)의 유전자, 정(情)의 유전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작은 반도에 몸 붙이고 살면서 숱한 아픔과 굶주림, 전쟁의 상흔, 고난과 위기로 점철된 반만년의 질곡 깊은 삶을 온 몸으로 겪어내면서 가슴 깊이 한을 곰삭혀 왔습니다. 그리고 곰삭혀진 한 속에서 흥이라는 전혀 다른 유전자를 발효시켜냈습니다. 한에서 발효된 흥의 유전자는 한을 달래주었을 뿐 아니라 흥의 가벼움을 한의 깊이로 승화시켜주었습니다. 하여, 한국인의 한과 흥은 단순한 한이 아니고 단순한 흥이 아닙니다. 두 가닥을 비벼 꼬아 만든 새끼줄처럼 한의 유전자와 흥의 유전자가 서..

마가복음 최후의 묵상 / 정병선목사

마가복음과 함께 2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마지막으로 두 가지를 정리하고 싶다. 첫째, 로마 사람 백부장이 십자가에 죽어가는 예수님을 지켜보며 내뱉었던 고백이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마지막 삶의 과정을 지켜보며 “저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감동적인 고백을 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그분의 삶을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그분의 존재를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저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는 백부장의 고백이 깊은 울림이 되어 새롭게 들린다. 사실 인류의 역사 속에는 훌륭한 분들이 많이 있었다. 석가, 노자, 장자, 공자, 소크라테스 … . 하지만 그 누구도 예수님과 비슷한 분은 없었다. 예수님만큼 창조주 하나님께 집중한 분은 없었다. 아버지의 뜻을 유일한 뜻으로 삼고 사신 분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