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6 13

축복과 저주(신27:11-26)

축복과 저주(신27:11-26) 본문은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에발산에 돌비와 돌단을 쌓은 후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기 위해, 12지파 가운데 각 6지파씩 나누어 각각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 서야 했다. 이처럼 각기 6지파씩 나누어 선 것은 하나의 상징적 행위로, 축복의 산에 선 6지파는 율법에 순종하는 자들을 상징하고, 저주의 산에 선 6지파는 율법에 불순종하는 자들을 상징할 뿐이다. 특히 본문에는 축복에 관계 된 내용이 생략된 채 저주에 관계된 내용만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본성적으로 범죄하기 쉬운 인간의 죄악 된 심성에 강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함이다.

아름다운 거리감

아름다운 거리감 지구가 태양을 사랑한다고 해서 태양 쪽으로 갑자기 뛰어든다면 혹은 달이 지구가 좋다고 와락 달려와 안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별빛이 고운 것은 그 빛이 오래전 출발해 지금 우리 눈에 닿았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지척에서 별의 표면을 본다면 그것은 한낱 울퉁불퉁하고 거친 광야 같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으며 '아름다운 거리감'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함부로 대하지 않으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랑을 통한 아름다운 거리감은 서로의 공간과 시간을 존중하면서도 마음의 연결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때로는 열정적이고 격렬할 수 있지만, 그 열정이 상대방을 무례하게 다루거나 침범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1:8)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디모데후서1:8)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필수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제대로 살고, 그리스도인답게 살려면 그 자체가 고난이고, 고난 앞에 놓일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고난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지금도 고난인데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말씀이 아주 무겁게 느꺼질 수도 있습니다. 매년 이 맘때면 교회마다, 성도마다 더욱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받고, 변화되어 자신의 일생을 복음을 위해 신실하게 살아낸 믿음의 선배로서 고난을 어떻게 대했는지 고백하여 남겨줌으로써 우리에게도 그렇게 살 것을 권면하고 있습..

제삼시(막15:25)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막15:25) 마가복음 기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시간을 ‘제삼시’로 못 박습니다. 오늘의 시간으로 오전 9시입니다. 제육시, 즉 낮 12시에 온 땅에 어둠이 깔렸고(막 15:33), 제구시, 즉 오후 3시에 예수님은 큰 소리를 지르며 운명했습니다.(막 15:34, 37) 마가복음의 이런 연대기적 진술은 다른 복음서 기자들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십자가에 못 박힌 시간을 말하지 않고 대신 어둠이 깔린 낮 12시와 예수님이 운명하신 오후 3시만 지적합니다. 누가복음도 마태복음과 똑같이 보도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제삼시’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이 말하는 시간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대신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십자가 아래서(3)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막15:24) 십자가 아래서 제비뽑기를 하고 있던 로마 군인들에 대한 이야기에서 원죄론의 타당성을 언급한 어제의 묵상을 오늘 보충해야겠습니다. 자칫하면 그 묵상이 원죄론의 오용과 왜곡을 옹호하는 것처럼 전달될 수도 있으니까요.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원죄론은 크게 왜곡되기도 했습니다. 우선 그 가르침은 신자들을 심리적으로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했습니다. 거의 질병 현상으로 나타날 때도 있습니다. 불행한 일을 만나면 모든 것을 죄의 탓으로 돌립니다. 심지어는 기도를 게을리 했다거나, 헌금을 제대로 바치지 않아서 그런 일을 당했다고까지 말합니다. 이런 죄책감이 사회적인 차원으로 발전하면 개혁과 변화의 장애로 작용합니다. 원..

십자가 아래서(2)(막15:24)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막15:24)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은 뒤 사형수의 옷을 나눠 갖기 위해 제비뽑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걸 희극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비극이라고 해야 할까요. 십자가 위에서는 한 인간이 죽음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그 아래서는 옷에 욕심을 부리고 있다니요. 위 로마 군인들이 어떻게 보이나요? 인격 파탄자처럼 보이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보편 인간입니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운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생살이에서 매일 배웁니다. 경쟁 중심의 사회에서는 이런 경험이 더 적나라하게 나타납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같은 지역의 한 교회가 분란에 싸이는 경우에 ..

침묵하신 이유 (막 15:1-5) / 김영봉목사

해설: 새벽이 되어 산헤드린의 의장인 대제사장이 전체 회의를 소집하여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고발 하기로 정합니다. 총독의 오전 업무가 시작되자 마자 고소하기 위해 서두른 것입니다. 산헤드린 자치 의회에서는 사형을 결정할 수 있었지만 집행할 수는 없었습니다. 로마 식민지였으므로 사형 집행은 총독의 전권에 속했습니다. 산헤드린 의원들은 예수님을 로마 법에 고소할 죄목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로마에 정치적 반란을 일으킬 목적으로 유대인의 왕으로 자처했다고 고발하기로 결정합니다. 반란을 꾀한 사람들은 당시에 최고 극형이었던 십자가 처형에 처해졌습니다. 빌라도가 총독으로 부임한 후에 몇 차례의 반란이 있었기 때문에 유다 총독으로 공을 세워 로마 황제가 되기를 꿈 꾸었던 그는 이 문제에 유독 예민하게 반..

‘빗나간 철저함’을 포기하라!(요한복음 12:3-6)

‘빗나간 철저함’을 포기하라! (요한복음 12:3-6)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소설이나 연극, 영화 등에서 예수님을 판 제자 가룟 유다에 대해 혁명의 투사쯤으로 상상력을 발휘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유다를 가리켜 ‘도둑’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아마도 유다는 계산이 밝고 똑똑했을 듯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에게 제자공동체의 재정을 맡겼을 것..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막 14:32-42)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봅니다.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가도하실 때 매우 슬프셨습니다. 주님은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약간 떨어진 채로 기도하였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마셔야 할 십자가의 고난이 지나가기를 원하였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가져오는 고통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뤄지기를 원하였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있을 때 함께 온 제자들은 피곤하여 잠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고 깨어 있으라고 하였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잠에 빠졌습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위중함을 알지 못한 제자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목자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양들이..

나의 시선을 어디에 고정하고 살 것인가?

나의 시선을 어디에 고정하고 살 것인가? 글쓴이/봉민근 그리스도인은 누가 뭐라고 해도 거리낌이 없이 당당하게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이 깨끗하면 떳떳하고 당당할 수가 있다. 정직하지 못하고 죄를 지으면 에덴동산이라도 할지라도 하나님의 낯을 피해서 숨을 수밖에 없다.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놓을 수 없는 일은 해서는 안된다. 양심에 거리끼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죄를 지으면 고개를 들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양심을 주셨기 때문이다. 죄를 짓고 나면 양심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 기도를 가로막는다. 주께서 우리를 이처럼 용서하고 사랑하셨거늘 그 앞에서 악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배신이다. 남을 미워하고 불의를 행하며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죄를 짓고도 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