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4 13

고정관념을 버리자

고정관념을 버리자 비가 오면 보통은 우산을 씁니다. 특히 한국은 길거리 곳곳에서 우산이 펼쳐지지만, 프랑스에서는 장대비가 아니고선 웬만해서 우산을 잘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비 오는 날 프랑스 길거리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아무렇지 않게 비를 맞고 다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는데 거기에는 프랑스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특별한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손이 자유롭지 못해 넘어졌을 때 다칠 위험이 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은 우산을 쓰고 걸어가면 시야가 좁아져서 교통사고의 위험이 커지기 때문에 우산 대신 우비나 레인코트를 입도록 교육한다고 합니다. 프랑스어로 고정관념을 뜻하는 것은 '클리셰(Cliché)'입니다. 고정관념이란 당연한 것처럼 알려져 머릿속에 굳어진 생각입니다. 이러..

긴요하고 우선되어야 할 사회적 제도는 ‘약자 보호’(신24:14-22)

긴요하고 우선되어야 할 사회적 제도는 ‘약자 보호’(신24:14-22) 본문은 계속해서 사회적 약자인 품꾼과 객, 과부 및 고아와 같이 가난하고 곤궁에 처한 이웃에 대한 보호 규정이다. 그 규정은 첫째, 품꾼의 삯은 해가 지기 전에 지불하라(14-15절). 둘째,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말고 과부의 옷을 저당잡지 말도록 하라(17-18절). 셋째, 가난한 사람들의 양식을 위하여 곡식이나 과실을 거둘 때 그 일부를 일부러 남기라(19-22절). 주목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상의 규례를 주시면서 특별히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이 애굽에서 종 되었던 사실을 기억하도록 촉구하고 있는데(18-22절), 이는 지난날의 애굽의 속박과 압제를 기억하여 가난한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요19: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요한복음19:38) 성경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명예롭지 못한 씁쓸한 과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치 베드로의 과거, 도마의 과거,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한 시도 깨어 기도하지도 못하고, 예수님이 잡히시자 비겁게 도망가고, 흩어졌던 제자들의 과거처럼 아리마대 사람 요셉도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부끄러운 과거가 변화된 현재, 소망스러운 미래를 가진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우리 안에도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비겁함, 우리 안에도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두려움, 우..

빌라도의 재판(4)(막15:2)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막15:2) 빌라도의 질문에 예수님은 예상 밖의 대답을 하셨습니다. “네 말이 옳도다.” 이건 긍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닙니다. 빌라도가 무슨 뜻으로 질문했는가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빌라도가 실제로 그렇게 믿고 물었다면 긍정의 대답이고, 별 무게를 두지 않고 건성으로 물었다면 부정의 대답이겠지요. 예수님이 빌라도의 질문에 대답하기 곤란해서 이런 식으로 대답하신 건 아닙니다. 이 대답은 긍정이든지, 부정이든지 어느 쪽으로 받아들여도 옳은 말씀입니다. 우선 긍정의 의미로 그 대답을 살펴봅시다. 이것은 어제의 묵상에서 이미 어느 정도 방향은 제시된 것 같습니다.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

빌라도의 재판(3)(막15:2)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막15:2) 이제 예수님이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심문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사회 정치적인 사안을 다루는 로마 총독의 법정 앞에 섰다는 것은 예수님이 누명을 썼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로마 제국의 사회 정치적으로 위태롭게 할 만한 행위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삼으려고 했을 때도 오히려 사람들을 피하셨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산헤드린의 고발입니다. 빌라도는 산헤드린의 이런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겠지요. 그럴만합니다. 총독의 가장 큰 업무는 관할지역의 치안을 안정시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지역 지도자들의 도움을 받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

빌라도의 재판(2)(막15:1)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막15:1) 산헤드린 공회는 난폭한 범죄자를 다루듯이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고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체포할 때 그들이 무력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빌라도에게 넘기는 이 대목도 이해가 갑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이런 방식으로 다루어야 할 중죄인이었습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그 자리로 갈 수만 있다면 산헤드린 공회 의원 중에서 비교적 양심이 살아 있는 한 사람에게 물어보고 싶군요. 당신들은 정말 예수님을 위험인물로 보았소? 아니면 다른 목적으로 그를 그렇게 폭력적으로 다룬 것이오? 서로의 기본적인 입장이 다를 터이니 그가 무슨 대답을 할지 감..

십자가의 길과 하나님의 능력 (고전 1:18-25) / 정용섭목사

사순절 3주, 2024년 3월 3일 오늘 설교 본문인 고전 1:18-25절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18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라고 할 때 도는 그리스어 λόγος의 번역입니다. 이 로고스는 그리스 스토아 철학의 핵심 개념입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이도스, 또는 노장사상의 도(道)나 하이데거의 존재(Sein)처럼 만물의 근원이자 원리를 가리킵니다. 요한복음은 1:1절에서 로고스를 세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말 성경은 이 로고스를 ‘말씀’으로 번역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와 달리 ..

사랑이 한 일 (막14:1-9) / 김영봉목사

해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의 노예 살이로부터 벗어난 날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유대인의 달력으로 니산월 14일입니다. 유월절은 곧바로 무교절로 이어집니다. 니산월 15일부터 일 주일 동안 누룩 넣지 않은 빵(무교병)을 먹으면서 이집트를 탈출하던 조상들의 고난을 기억하는 기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유대인들은 제사와 축제를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여듭니다. 유월절이 시작되기 이틀 전(1절), 즉 오늘로 하면 마지막 주간의 수요일에 예수님은 베다니에 있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머무르고 계셨습니다(3절). 그 때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로마 총독에게 넘겨 처형시킬 방도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자극하여 폭동으로 이어질 것을 염려하여 축제가 끝나기까지 기다..

변화를 가져오는 생각의 법칙(빌립보서 4:8-9)

변화를 가져오는 생각의 법칙 (빌립보서 4:8-9)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생각한다는 것은 고된 노동”이라고 말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늘 잠자리 머리맡에 펜과 수첩을 두고 잠들었다는 일화가 이해됩니다. 생각의 진정한 가치는 생각을 바꾸는 것으로, 생각을 바꿀 수 있다면 결국 우리 삶도 달라집니다. 트레스가 많은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피로를 느끼는데, 생각을 바꾸면 더 이상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도 ..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막 11:1-11)

드디어 예루살렘에 예수님이 입성하십니다. 갈릴리에서 시작된 여정의 마지막을 마무리하기 위함입니다. 갈릴리는 골고다를 향하여 준비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성경의 예언대로 준비되었습니다. 오실 메시야는 나귀를 타고 입성하십니다(슥9:9). 말씀대로 준비된 어린 나귀를 타십니다. 주님이 쓰시겠다는 말에 순종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사 사람들이 앞에서 뒤에서 따르면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하더라고 하면서 외칩니다. 이들의 외침에 속 마음이 다 들어있습니다. 호산나는 지금 구원하소서 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있어서 구원자는 다윗의 나라입니다. 즉 고통받고 있는 현실에 대한 구원자입니다. 그러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