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5 13

태형의 목적(신25:1-3)

태형의 목적(신25:1-3)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형벌제도 중 체형은 매를 때리는 태형과 동해 보복법이 있었는데, 본문은 그중 태형에 관한 규정이다. 여기서 태형은 사실 범죄자로 하여금 자기 죄를 깨닫고 개심하도록하여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는 데 그 근본 목적이 있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태형을 40대 이상을 초과하여 가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태형을 집행하는 동안 재판관이 28:58-59을 낭독하고 매질을 끝나면 시78:38을 낭독하여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사람들에게 선포했다고 한다. 혹시라도 잘못으로 40대를 초과하는 경우 있을 것을 우려해서 태형은 40에서 하나를 감한 39대까지만 가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태형을 다섯 번이나 당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고후11:24).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린도후서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린도후서3:17)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성령께서 심령에 거하는 그리스도인은 이미 자유를 얻은 자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복음이 주는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 인생의 무거운 짐으로부터의 자유, 근심과 염려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유를 얻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유를 얻으십시오! 주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계신 마음은 자유의 마음, 평안의 마음, 기쁨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명시해주신 이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참다운..

갈라진 벽을 고친 왕 (사 58:6-12)

(2024/03/10, 사순절 제4주)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햇살처럼 비칠 것이며, 네 상처가 빨리 나을 것이다. 네 의를 드러내실 분이 네 앞에 가실 것이며, 주님의 영광이 네 뒤에서 호위할 것이다. 그 때에 네가 주님을 부르면 주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다. 네가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 '내가 여기에 있다' 하고 대답하..

빌라도의 재판(7)(막15:4)

'빌라도가 또 물어 이르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하되'(막15:4)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아무 대답도 없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산헤드린이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어 음해하고 무고하는데도 자기를 방어하지 않는 예수님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빌라도의 이 질문은 예수님을 두둔하는 뉘앙스를 풍깁니다. 이 뒤로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별로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습니다. 로마의 총독이 이런 정도로 관용적이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빌라도를 가능한 대로 호의적으로 봅니다. 산헤드린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책임이 실제로 빌라도보다 산헤드린에게 더 있었을까요? 복음서와 달리 ..

빌라도의 재판(6)(막15:4)

'빌라도가 또 물어 이르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하되'(막15:4) 빌라도의 입장은 지금 매우 난처해 보입니다. 유대 지역의 치안에 대한 총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이니 산헤드린의 고발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실정법에 의해서만 권한을 행사해야 할 총독의 입장에서 죄 없는 사람을 무턱대고 죽일 수도 없습니다. 예수가 반로마 무력투쟁을 사주한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에는 객관적인 증거가 하나도 없습니다. 단지 산헤드린의 고발만 있을 뿐입니다. 산헤드린의 고발도 그렇게 명쾌한 게 못 됩니다. 산헤드린의 주요 관심사는 신성모독이었습니다. 빌라도의 관심은 사회 소요입니다. 이 두 사안은 별개의 것입니다. 신성모독은 순전히 종교적인 문제입니다. 산..

빌라도의 재판(5)(막15:3)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발하는지라.'(막15:3) 예수님의 대답이 긍정도 부정도 아닌 탓에 대제사장들이 다시 나서서 고발했다고 합니다. 이들을 오늘날의 검사로 생각하면 됩니다. 그들은 자칫 예수님이 무죄로 석방될까 걱정되어 체면 불구하고 예수님의 유죄를 증명하기 위해서 온갖 주장을 쏟아낸 것 같습니다. 그들은 지금 어떤 심정일까요? 일단 좋은 쪽으로 생각해보지요. 그들은 당시의 최고 엘리트 종교인들이었습니다. 오늘의 대형교회 목사이거나 대법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발언은 사람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정도였습니다. 그들이 아무런 근거로 없이 막무가내로 예수님을 고발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복음서만으로 대제사자들의 고발 내용을 소상하게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합니다. 예수님이 신성을 모독했다는 것입..

심리학3. 고통의 문제 / 류현모교수

모든 인간의 삶에는 고통이 있다. 불교에서 인생은 “고통이 가득한 바다”라고 표현한다. 기독교와 다른 세계관들도 인생에 존재하는 고통을 부인하지 않는다. 고통은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고통은 당연히 정신적인 고통을 말할 것이다. 세속적 무신론 세계관을 가진 많은 사람들은 고통의 문제를 제기하며,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선천적 질병을 가지고 태어나는 아이, 자신과 관계없는 전쟁으로 인해 죽어가는 아이들을 전능하시고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이 어떻게 고통 가운데 버려두신다는 말인가? 전능하지 않거나, 인간을 사랑하지 않거나, 전능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하나님이든지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논리적이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그들은 고..

넘겨 줄 대상 (막14:10-11) / 김영봉목사

해설: 그 즈음에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찾아가 예수님을 넘겨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 대가로 은돈을 주기로 약속합니다(10-11절). 유다가 예수님을 넘겨 준 이유는 돈에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더 많은 돈을 요구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반란을 일으키도록 궁지로 몰아넣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분은 이상하게도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 이후로 갈릴리에서 행하던 이적을 끊으셨습니다. 왜 그 이적의 능력을 억압하고 있는지, 그로서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궁지로 몰아 넣으면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떨치고 일어날 것으로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는 그 때부터 예수님을 넘겨 줄 기회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마가는 “넘겨주다”라는 말을 두 번 사용합니다. 복음서..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배려하면…(고린도전서 9:19-23)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배려하면… (고린도전서 9:19-23)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3 내가 ..

하나님을 믿으라 (막 11:12-26)

예수님은 베다니에 머물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옵니다. 시장하신 예수님은 잎사귀가 많은 무화과나무를 보았습니다. 혹 열매가 있을까 보았는데 열매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무화과 잎만 있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를 보시고 제자들에게 영적 교훈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를 향하여 명령하십니다. 영원토록 열매를 따 먹지 못할 것이라 말씀합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다시 성에 들어갔을 때 무화과 나무가 뿌리부터 마른 것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이 놀라운 사건에 대하여 알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모든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그러므로 무화과나무가 순종한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예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