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0, 사순절 제4주)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햇살처럼 비칠 것이며, 네 상처가 빨리 나을 것이다. 네 의를 드러내실 분이 네 앞에 가실 것이며, 주님의 영광이 네 뒤에서 호위할 것이다. 그 때에 네가 주님을 부르면 주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다. 네가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 '내가 여기에 있다' 하고 대답하실 것이다. 네가 너의 나라에서 무거운 멍에와 온갖 폭력과 폭언을 없애 버린다면, 네가 너의 정성을 굶주린 사람에게 쏟으며, 불쌍한 자의 소원을 충족시켜 주면, 너의 빛이 어둠 가운데서 나타나며, 캄캄한 밤이 오히려 대낮같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 너를 늘 인도하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너의 영혼을 충족시켜 주시며, 너의 뼈마디에 원기를 주실 것이다. 너는 마치 물 댄 동산처럼 되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처럼 될 것이다. 너의 백성이 해묵은 폐허에서 성읍을 재건하며, 대대로 버려 두었던 기초를 다시 쌓을 것이다. 사람들은 너를 두고 "갈라진 벽을 고친 왕!" "길거리를 고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한 왕!" 이라고 부를 것이다.]
∎ 삶과 유리된 믿음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사순절 중간을 지나고 있는 지금 우리는 경칩 절기를 맞이했습니다. 깊은 겨울잠에 빠졌던 모든 생명들이 일제히 깨어나 생명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 영혼 깊은 곳에서도 생명의 기운이 솟아나와 주님을 한껏 찬미할 수 있기를 빕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정치에 쏠린 정치의 계절이 되었습니다만 우리는 주님과 함께 어두운 역사의 한복판을 통과하며 하늘의 빛을 끌어들이는 소명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순절에 훈련하는 것 중의 하나가 금식입니다. 금식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인 식욕을 억제하면서 더욱 본질적인 가치에 집중하기 위한 훈련입니다. 공교롭게도 무슬림들의 집중적인 금식 기간인 라마단이 오늘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무슬림들은 해 뜰 무렵부터 해질녘까지 음식을 입에 대지 않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굶주림을 체험한다는 뜻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해가 지면 음식을 준비해서 이웃들과 나눠먹기도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유대인들의 경건 행위 가운데 하나인 금식의 참 의미를 인상 깊게 보여줍니다. 예언자란 제3의 눈으로 역사를 살피는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정념(情念, pathos)을 고스란히 느끼는 존재입니다. “사자가 으르렁거리는데, 누가 겁내지 않겠느냐? 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누가 예언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암 3:8) 아모스의 이 말은 예언자들이 하나님에게 사로잡힌 이들임을 보여줍니다. 예언자는 율법의 문자에 매이지 않습니다. 문자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립니다. 그들은 외적 행위가 곧 경건함이 아님을 직감적으로 느낍니다.
이사야는 자기 시대 사람들이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고, 하나님의 법도를 잘 지킨다고 자부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를 즐긴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예민하게 꿰뚫어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는 삶을 보아 판단할 일이지,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자기 진술을 통해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사람은 대체로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타인들에 대해서는 너그럽지 못합니다. 주님은 이것을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 수 있다는 말로 표현하셨습니다. 이사야는 금식을 하면서도 자기의 향락을 찾고, 일꾼들에게 무리하게 일을 시키고, 자기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을 보며 탄식합니다. 차라리 금식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금식은 자기 만족적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경건 행위에 도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금식의 본뜻과는 거리가 멉니다. 타인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보면 그의 영혼의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제 아무리 천사와 같은 말을 한다 해도 다른 이들을 수단으로 대하고, 경멸하고, 함부로 대하는 이들은 하나님과 무관한 사람입니다.
∎ 주님이 기뻐하시는 금식
이사야는 참된 금식이 무엇인지를 오롯이 드러냅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사 58:6) 음식을 제한하는 것만이 금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참된 금식이란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 타자에 대한 책임을 지려는 태도입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들의 아픈 사정을 헤아리고, 곁에 다가서고, 그들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무거운 책임을 감당하려는 마음이 곧 금식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된 사람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을 풀어주는 것(눅 4:18)을 당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사야는 참된 금식의 의미를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합니다.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7)
이 구절은 마태복음 25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최후의 심판날 주님이 물으시는 것은 우리가 교인이었는지 아닌지, 혹은 어느 교파에 속했는지, 교회에 얼마나 오래 다녔는지, 헌금을 얼마나 했는지가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연약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는지입니다. 연민이라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많은 말이긴 하지만 타자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는 이들에게서 우리는 거룩함을 봅니다. 베버는 연민을 가리켜 단순한 감정적 반응이 아니라 ‘정의와 평등을 위한 비판적 행동주의’라고 규정합니다(강남순, <데리다와의 데이트>, 행성B, p.272에서 재인용). 누군가의 고통과 아픔을 덜어주려고 애쓰는 마음이야말로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금식입니다. 이렇게 누군가의 삶에 책임감을 느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이사야는 그것을 아주 선명한 언어로 드러냅니다.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햇살처럼 비칠 것이며, 네 상처가 빨리 나을 것이다. 네 의를 드러내실 분이 네 앞에 가실 것이며, 주님의 영광이 네 뒤에서 호위할 것이다.”(사 58:8)
저는 이 대목에 감동합니다. 우리가 대명천지에 살면서도 마치 어둠에 갇힌 것처럼 답답함을 느끼고, 많은 것을 누리고 살면서도 한껏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아주 사소한 일에도 상처를 받는 까닭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다른 이들에 대해 책임을 느낄 때 비로소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10절이 이것을 절묘하게 드러냅니다. “네가 너의 정성을 굶주린 사람에게 쏟으며, 불쌍한 자의 소원을 충족시켜주면, 너의 빛이 어둠 가운데서 나타나며, 캄캄한 밤이 오히려 대낮같이 될 것이다.” 우리 내면을 밝히는 빛,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은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들에 대해 책임을 지려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가리키는 방향도 이와 동일합니다.
∎ 샘이 막힌 까닭
우리가 이웃에 대해 책임적 존재가 될 때 하나님이 우리를 늘 인도하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우리 영혼을 충족시켜 주시고, 뼈마디에 원기를 주십니다. “너는 마치 물 댄 동산처럼 되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처럼 될 것이다.”(사 58:11b) 예수님은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요 4:14)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물은 무슨 신비한 성분이 든 물이 아닙니다. 주님의 물은 자신을 누군가에게 선물로 내주는 삶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던 주님은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시라면서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요 7:38)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수는 지하 수맥에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생의 가뭄이 찾아와도 그 물은 마르지 않습니다. 주님의 샘은 마르는 법이 없었습니다. 퍼주어도 퍼주어도 고갈되지 않았습니다. 그 샘의 이름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무능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의 샘이 말라버린 것은 아닌지요? 샘 구멍이 막힌 것은 아닌지요? 우리 존재 깊은 곳에서 사랑의 샘물이 솟구쳐 나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풀려진 자아가 아닙니까? 자기에 대한 과도한 관심과 집착이 우리를 무능하게 만듭니다. 자아에 붙들릴 때 우리는 사랑에 무능력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 욕망을 최우선으로 삼는 사람은 타자의 아픈 사정을 외면하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누리면서도 여전히 목마름을 느끼고, 삶을 향유하지 못하는 것은 이웃들에 대한 책임을 소홀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코가 석 자라며 자기 문제에만 몰두하는 이들은 결코 주님이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를 맛볼 수 없습니다. 한꺼번에 전환하기 어렵다면 조금씩이라도 삶의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웃들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한 일에 작은 실천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말 한 마디라도 모질게 하지 마십시오. 빈정거리거나 심판하는 태도로 말하지 마십시오. 아주 작은 나눔이라도 실천해 보십시오. 우리의 샘에 조금씩 생수가 차오름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 무너진 기초를 세우는 사람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무너진 세상의 기초를 다시 세우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욕망의 방향으로 떠밀려가는 역사의 물줄기를 되돌려놓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공의와 정의의 토대 위에 세우셨습니다. 그 세상을 감싸 안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지금의 세상은 공의와 정의가 무너진 세상입니다. 주님은 그 무너진 토대를 다시 세우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1911-2010)의 ‘마망’(Maman)이란 작품이 있습니다. 프랑스어로 ‘엄마’라는 뜻입니다. 작가는 거대한 거미를 형상화해 놓았습니다. 높이 9미터, 지름 1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설치작품입니다. 이태원에 있는 리움 미술관 앞에 전시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용인에 있는 호암미술관으로 이전했다고 들었습니다. 작가가 이런 작품을 제작하게 된 것은 거미가 거미줄을 치는 모습이 어릴 적 어머니가 베 짜던 모습과 닮았다는 사실을 자각했기 때문입니다. 루이스의 거미는 가늘고 약한 여덟 개의 청동 다리로 몸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얇은 다리는 상처받기 쉬운 내면을 표상합니다. 거미의 몸통 왼쪽 아래에는 알 주머니가 달려 있는데, 그 주머니에는 하얀 대리석으로 된 알 열두 개가 담겨 있습니다. 거미는 품고 있는 알을 보호하기 위해서 몸을 잔뜩 부풀려 높이 솟아오름으로써 상대에게 겁을 주려 합니다. 모성 본능입니다. 루이스는 거미에게서 삶을 배웁니다. 누군가 거미줄을 뭉갠다고 하여 거미는 화를 내지 않습니다. 거미줄을 다시 짜고 수선합니다. 이 매혹적인 작품을 두고 송정희 작가는 이런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거미줄은 약하나 강하고, 가늘지만 질기다. 금세 바스러질 듯 보여도 진동이나 습기를 무척 잘 견딘다. 누군가 거미줄을 끊고 또 끊어도 쉼없이 다시 짠다. 징그럽고 혐오스러운 외모에 독까지 품은 거미. 그러나 자신의 몸을 내주고 새끼를 살리는 거미의 모성과 희생에 부르주아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모습이 바로 그녀의 어머니와 닮았기 때문이다.”( 송정희, <매혹하는 미술관>, 아트북스, p.290)
저는 외람되게도 이 거미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봅니다. 자기를 희생하여 우리를 살리시는 주님, 세상에서 범법자처럼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지만 끝내 인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신 주님,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에 당신 자신을 선물로 내주신 주님은 지금도 끊어진 관계의 줄을 짜고 계십니다. 바스러질 듯 보여도 그 사랑의 끈은 결국에는 이어질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사랑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이들을 일러 사람들은 ‘갈라진 벽을 고친 왕!’, ‘길거리를 고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한 왕!’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우리의 소명이 바로 이것입니다. 벌레들이 꿈틀거리며 밖으로 나오는 이 경칩 절기에 우리도 자기 속에 유폐되었던 삶에서 벗어나 사랑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기쁨을 한껏 누릴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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