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11, 주현 후 제 6주, 산상변화주일)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내 양심이 성령을 힘입어서 이것을 증언하여 줍니다.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나는, 육신으로 내 동족인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이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내 동족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이 있고, 하나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들이 있고, 율법이 있고, 예배가 있고, 하나님의 약속들이 있습니다. 족장들은 그들의 조상이요, 그리스도도 육신으로는 그들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만물 위에 계시며 영원토록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 하나님의 불꽃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주현절기의 마지막 주일이자 산상변화 기념주일입니다. 수난의 골짜기로 들어가기 직전 주님은 가까운 제자 셋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은 주님의 모습이 희게 변화된 채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대화를 나누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황홀한 광경이었습니다. 외경심에 사로잡힌 베드로는 그곳에 모세와 엘리야와 주님을 위해 초막 셋을 짓겠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모습이 변화한 이 사건을 저는 물리적 현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두웠던 제자들의 마음의 눈이 열리자 가려졌던 주님의 본질을 직관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유사한 사건을 우리는 압니다. 출애굽기는 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현존 앞에 오래 머물렀던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고 전합니다. 찬송가 27장 1절은 “빛나고 높은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주 예수 얼굴 광채가 해같이 빛나네 해같이 빛나네”라고 노래합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성자 프란체스코 1>에서 성인은 자기를 따르는 레오 형제에게 “우리의 목적은 진흙 덩이인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거예요”(니코스 카잔차키스, <성자 프란체스코 1>, 김영신 옮김, 열린책들, p.266)라면서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불꽃이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은 일상 속에서 늘 접하던 스승이신 예수님 속에 있는 가장 깊은 빛과 만나 경외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빛은 본래 있던 것인데 그들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했던 것 뿐입니다. 우리는 눈에 무명의 백태가 끼어 세상에 가득 찬 하나님의 신비를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빛은 어떻게 나타난 것일까요?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라는 대답은 너무 상투적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말끔히 비우신 분이십니다. 비웠기에 깨끗합니다. 깨끗함이 곧 빛입니다. 우리는 욕망 주변을 맴돌며 살지만 주님은 세상의 고통을 당신 속으로 받아 안으셨고, 세상의 모든 설움과 고통을 당신과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낯선 이들을 향한 무한한 사랑과 공감이 하늘의 빛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그 빛이 흐려지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마음 하나 얻기 위한 순례의 과정이 우리 신앙생활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 신앙생활의 자랑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치열한 노력
앞서 말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에서 프란체스코는 “인간이 된다는 것은 전사가 되고, 일꾼이 되고, 반역자가 된다는 뜻”(니코스 카잔차키스, 앞의 책, p.229)이라고 말합니다. 전사가 되라는 말은 사사건건 사람들과 시비를 벌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이 되기 위한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적은 바로 ‘자기 자신’일 때가 많습니다. 자기를 이기지 못해 삶이 비루합니다. 나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일에 ‘자기’를 중심에 놓는 버릇을 끊지 않고는 우리 영혼이 자랄 수 없습니다. 반역자가 된다는 것은 사람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들에 맹목적으로 끌려가지 않고 새로운 가치를 추구한다는 말입니다. 돈과 권세와 명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섬김과 사랑과 이해와 공감의 영역으로 옮겨가는 사람들이야말로 영적 의미에서 반역자들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런 의미에서 전사였고 반역자였고 일꾼이었습니다. 그는 진실하게 살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적당히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철저하게 공부했습니다. 그는 종교적 실천에 대한 열정도 있었습니다. 자기가 받아들일 수 없었던 예수를 따르는 이들을 박해하기 위해 그는 몸을 움직였습니다. 그것은 물론 무지에서 비롯된 열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행동을 하면서도 자기를 성찰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성찰은 이중적 과정을 거칩니다. 성찰은 먼저 타인들과 만난 후에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다음 과정은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과의 대화가 바로 생각입니다.
그리스도와 만난 후 그는 자기 삶을 꼼꼼하게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존재의 어긋남에 대해 놀랍니다. 삶을 돌아보니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지만, 그것을 실행할 능력이 없음을 알고 그는 깊이 좌절합니다(롬 7:18). 우리도 이런 한계를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모든 사람을 친절하게 대하고, 어려운 이들의 형편을 잘 헤아리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살려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만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이 어긋남이 그를 참담하게 만들었습니다. 저절로 깊은 탄식이 우러나옵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처절한 자각입니다.
자기 의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때, 내가 밝힌 등불로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음을 자각할 때, 어둠이 확고하게 우리를 사로잡을 때야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속에 유입될 때입니다. 깨진 마음에 하나님의 빛이 스며듭니다. 바울 사도는 이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단조로 진행되던 노래가 갑자기 장조로 전환된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은혜는 예기치 않은 순간 우리 일상을 꿰뚫고 들어옵니다. 바울은 짙은 어둠의 터널을 벗어나 환한 빛 앞에 선 사람처럼 자기에게 찾아온 해방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성령의 법이 죄와 죽음의 법에서 자기를 해방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확철대오(廓撤大悟)라는 말이 있습니다. 불교에서 깨달음의 경지를 말할 때 쓰는 용어인데 테두리가 없이 크게 깨닫는다는 뜻입니다. 은총의 신비에 눈을 뜬 바울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우뚝 선 듯한 기쁨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롬 8:28)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롬 8:31b)
은혜의 세계에 사로잡힌 바울은 세상의 어떤 것도 믿는 이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노래합니다. 로마서 8장 후반부는 절창입니다. 그리스도와 우리를 하나로 묶어준 은총은 환난, 곤고,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협, 칼로도 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자기 속에 기둥처럼 박힌 확신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 8:38-39)
∎ 큰 슬픔, 끊임없는 고통
그런데 9장으로 넘어오면 이 놀랍고 확신에 찬 분위기가 일변됩니다. 바울은 자기 속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내겠다면서 뜻밖의 고백을 합니다.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습니다.”(롬 9:2) 그는 자기 양심이 성령을 힘입어 그것을 증언해준다고 말합니다. 그렇게도 확신에 차 있던 그를 온통 사로잡고 있는 ‘큰 슬픔’과 ‘끊임없는 고통’은 무엇일까요? 자기의 동족인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불구덩이에서 벗어난 사람이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이들을 깨우려고 아무리 외쳐도 반응하지 않을 때 느끼는 절망감과 같은 것이었을 겁니다. 이미 눈 앞에 시원한 샘물이 있는데도 목이 말라 죽어가면서도 고집스럽게 그 물을 마시지 않으려는 사람을 보며 느끼는 속상함과 같은 것이었을 겁니다. 바울은 자기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대가로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끊을 수 없었던 그리스도와의 연결 고리가 설령 끊어지더라도 동족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깊은 믿음의 사람은 자기의 존립 근거를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서 찾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곤경과 환란 가운데서도 믿음을 굳게 지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위로를 받았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주님 안에 굳게 서 있으면, 이제 우리가 살아 있는 셈이기 때문입니다.”(살전 3:8) 저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놀랍니다. 목회자로서의 바울의 태도가 너무나 곡진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아파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이 있고, 하나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들이 있고, 율법이 있고, 예배가 있고, 하나님의 약속들이 있습니다.”(롬 9:4) ‘있고’라는 단어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 단어의 반복이 제게는 오히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모든 것을 소홀히 하고 있음을 드러내주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소중한 것들은 부재를 통해 자신의 존재 의미를 드러내곤 합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야 그분들을 그리워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잘 산다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소중히 여기며 사는 것이 아닐까요? 바울이 볼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답게 살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도 강했고, 성전 예배에도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열심이 다 아름답지는 않습니다.
“나는 증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열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성은 올바른 지식에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롬 10:2)
이것은 바울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증언일 것입니다. 그는 박해자요 훼방자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지식’에 기초하지 않은 열심은 파괴적일 때가 많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적 지배자에 의해 이용당하는 군중들을 가리켜 폭민(暴民, mobs)라 했습니다. 나쁜 의도를 가진 이들은 증오해야 할 대상을 만들고 폭민들 앞에 먹잇감으로 던져줍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역사의 주역이라 생각하지만 실은 하수인에 불과합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 확신이라는 너울에 씌워진 채 진실을 보지 못하는 동족들을 보며 큰 슬픔과 고통을 느낍니다.
∎ 타자에 대한 책임감
믿음의 세계에 진입한 사람은 자기 혼자만의 깨달음 속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웃에 대해 무한 책임을 느낍니다. 노아는 당대에 의롭고 흠이 없는 사람이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노아가 아닌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습니다. 노아도 아브라함도 순종의 챔피언들입니다. 그들은 공히 하나님이 지시한 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있고 노아에게는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타자에 대한 책임감입니다. 노아는 자기 시대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중보의 기도를 올리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성을 향해 가고 있는 하나님의 천사들에게 의인을 악인들과 함께 죽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조카 롯이 전쟁의 와중에 적들에게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집에서 기른 사병들을 데리고 그를 구하기 위해 출전을 감행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는 동안 얻은 가장 귀중한 깨달음은 ‘고난받는 종의 노래’에 담겨 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허물과 죄를 짊어지고 그것을 정화해내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 절정이 바로 자신을 무한히 선물로 내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연약함, 슬픔과 죄까지도 주님은 다 당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 은총이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세상의 모든 아픔과 슬픔에 반응하지는 못하더라도 지금 우리 주변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눈길이 그들을 향할 때, 우리 발걸음이 그들을 향할 때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이 드러날 것입니다.
주님이 산 위에서 희게 변화되신 사건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이기적인 우리가 다른 이들의 아픔과 슬픔에 반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 병든 세상을 치유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좋은 말씀 > 김기석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갈라진 벽을 고친 왕 (사 58:6-12) (6) | 2024.03.15 |
---|---|
평화의 전령이 되어 (눅 10:1-12) / 김기석목사 (1) | 2024.02.26 |
넘치는 사랑 (느 9:27-31) (1) | 2024.01.30 |
주의하여라 (막 8:14-21) (1) | 2024.01.26 |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미 6:6-8) (0) | 2024.01.20 |